베르사이유 궁을 나와서 지베르니(Giverny)로 갔습니다. 모네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이죠. 모네(Claude Monet)는 1883년부터 1926년에 죽을 때까지 43년 동안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모네 그림 중 수련 연작은 다 여기서 만들어졌고, 그 그림의 모티브가 된 연못을 볼 수가 있는 곳입니다.


모네의 집 앞입니다. 이곳은 지금 박물관처럼 조성돼 있구요, 이 앞의 정원을 지나서 도로 밑으로 연결된 지하 보도를 지나가면 도로 반대편으로 모네의 연못이 나옵니다. 집은 아담한데, 인상적이라고 한다면 방 구석구석에 걸려 있는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입니다. 모네가 수집을 했다고 합니다만, 지나치게 많이 걸려 있어서 마치 모네의 그림이 일본 판화에 기원을 두었다고 애써 주장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나중에 오빠가 얘기해주길, 이 박물관을 관리하는 것이 모네 재단인데, 이 재단에 돈을 대는 것이 일본이라고 하네요.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죠. 여튼, 일본 사람들이 오면 무지 좋아할 것 같습니다.
또 하나 특이한 건, 온통 노랑으로 칠해진 응접실과 온통 파랑으로 칠해진 주방입니다. 수혁이가 보면 파랑색이라고 무지 좋아할 것 같았는데, 사진을 못찍게 해서 좀 아쉽네요...

여기서부터는 연못 퍼레이드...


촛점이 잘 맞은 사진은 양 옆에 워낙 엑스트라들이 많아서요. 인물 촛점은 약간 흔들렸지만,
이게 그래도 그림이 제일 이쁘게 나왔습니다.

 

지베르니를 떠나서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입니다. 이곳은 고흐(Vincent Van Gogh)가 생애 마지막 70일을 보낸 곳입니다. 처음엔 겨우 70일을 가지고 이 마을을 기념하냐며 비웃었는데, 비록 70일이지만 그 기간에 그린 그림이 굉장히 많다고 하네요. 한가지 아쉬운 건, 책자에는 분명 월요일이 휴관이라고 해놓고 막상 갔더니만 월/화 이틀 내내 휴관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토요일부터 시작해서 화요일까지 쉰다는 것이고, 결국 일주일에 3일 일한다는 거네요. 헐~
결국 고흐의 집도 못보고, 고흐의 정신과 상담을 맡았었던 가셰 박사의 집도 못갔습니다. 하지만 뭐, 고흐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풍경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만으로도 진귀한 경험이었어요.


고흐 그림의 배경이 된 오베르 성당


고흐가 동생 테오와 나란히 묻혀 있습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배경이 된 곳입니다. 누가 표지판에 불을 질러 놓은 건지, 원...

 

이렇게 넷째 날의 일정을 마무리 했습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다시 파리 시내로 들어오는 길이 꽤 막혀서, 많이 늦었습니다.
이날은 지베르니와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가이드 역할을 담당해준 오빠에게 우리가 한턱 쏘는 날. ㅋㅋ
마레 지구의 맛난 식당 중 하나인 les philosophies에 가서 맛난 저녁을 먹었습니다. 양고기, 생선, 비프 요리입니다. 애피타이저는 모짜렐라 토마토였고요, 후식은 크렙이었는데 사진을 못찍었군요. 아주... 달달하고 맛난 디저트였습니다.

오늘의 일정은 베르사이유에서 출발입니다.

베르사이유는 파리 시내에서 비교적 가깝습니다. 가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일종의 교외선 같은 RER을 타고 가는 방법이 있고, 아니면 지하철 한번에 버스 한번으로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뭉치표(까르네)를 사면 전철표 달랑 두 장으로 베르사이유까지 갈 수 있어서 RER로 가는 것보다 싸다고 유럽여행 전문 까페에는 나와 있더라구요. 그렇게 가려고 했었는데, 일단 돈이 적게 드는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오빠도 그렇고 가이드도 그렇고 그냥 RER을 타라고 조언을 하길래 RER 탔습니다. 오빠는, 예전에 조카가 쓰다 남은 베르사이유행 RER 차표가 한 장 있다며 친절하게 아침에 챙겨 주었지요.

오빠 출근 길에 앵발리드 역까지 나와서 RER표를 끊을 때에서야, 오빠가 준 그 기차표를 옷장 위에 고이 모셔두고 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헐... 이눔의 정신 머리. 어쩔 수 없지요. 그냥 두 장 끊는 수밖에...

 


전철역에 내려서 베르사이유 가는 길입니다. 저 멀리 베르사이유 궁이 보이네요. 세계 어느 곳이든, 커다란 가로수가 양쪽에 심어져 그늘을 만들어주는 길들은 다 멋진 것 같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이 좀 더 가까와졌네요. 아침 일찍 서둘러 나온 편인데, 벌써 주차장은 가득 차 있는 상황입니다.

 


베르사이유 입장 완료. 뮤지엄 패스를 끊어서 바로 들어갔습니다. 아... 눈부셔라. 선그라스는 어디다 삶아 먹을려고 저러고 찍었는 지 모르겠네요.

 

베르사이유 궁은 원래 루이 13세가 지은 사냥용 작은 궁전이었으나, 태양왕 루이14세가 정원을 만들고 건물도 증축해서 지금처럼 화려한 궁전으로 거듭났습니다. 궁전 내부는 정말 화려하다~~~는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구요, 중요한 방들은 거울의 방, 전쟁의 방, 평화의 방, 아폴론의 방... 같은 일부 방들이죠. 천정과 온 사방이 그림으로 이루어지고, 수많은 조각과 부조들로 치장된 화려하기 그지 없는 궁전입니다. 루이 14세가 이리로 이사하면서, 파리의 모든 귀족들도 따라서 이사를 왔고 그래서 혁명 이전까지 거의 모든 왕족/귀족들이 모두 베르사이유 궁전과 그 주변에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엔 화장실이 없습니다. 따라서 관광객을 위한 화장실도 매우 부족한 편. 보일 때마다 수시로 들어가줘야 낭패를 면합니다. 예전엔 대충 근처 정원 나무 사이로 가서 알아서 해결하거나, 아니면 얼른 자기집까지 뛰어가서 볼일을 보고 다시 왔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프랑스는 화장실 인심에 야박했었나봅니다. ㅋㅋ


왕실 예배당

 

열심히 오디오 가이드를 듣고 있습니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됩니다.
안내원에게 "Korea"라고 말을 하자, "안녕하세요~! 자, 1번, 녹색, 시작!" 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에 '시작'이란 말을 '치자'로 알아듣고 치긴 뭘 치나 고민했습니다. 어쨌든, 1번을 누르고 녹색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시작한다는 얘기를 활짝 웃는 얼굴로 잘 설명해주니 고맙더군요.

 


루이 14세 동상

 


사방 팔방 다 루이 14세

 


그 유명한 거울의 방입니다.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회랑으로 거의 천정 높이까지의 거울이 벽면을 가득 매우고 있습니다. 천장은 다른 여느 방과 마찬가지로 프레스코화로 되어 있구요. 궁정의식을 치르거나 외국특사를 맞을 때 사용된 방이라고 합니다. (1783년 미국독립혁명 후의 조약, 1871년 독일제국의 선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조약체결 등)

 


왕의 침실

 


내려다본 정원의 모습입니다... 사실, 저는 이 나무들이 매우 불쌍합니다. 각을 잡아서 깎아 놓은 게 좀 답답하게 느껴져요. 저것도 예술이라고 봐야 할런지는 모르겠으나, 저렇게까지 각잡아 깎아 놓는 건 제 스타일은 아닌 듯 합니다. 여튼, 정원에 광활하다는 표현을 쓰는 게 어울리는 걸까요. 하지만, 광활하다는 말 밖에는... 그런데, 이게 빙산의 일각이었다니... ㅋㅋㅋ

 


왕비의 침실

 


전쟁의 방. 전쟁과 관련한 벽화가 양쪽 벽면 가득합니다

 


음... 주요한 방마다 이런 식의 현대 미술 작품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냄비로 만든 하이힐이라든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엄청나게 큰 모빌 같은... 도대체 이게 어울리지 않게 무슨 짓인가 싶었는데, 베르사이유에서 이런 식으로 새로운 작품들의 전시도 겸해서 한다는 게 꼭 나쁜 아이디어 같진 않더라구요. 전통과 현재의 만남 같은? 한 해 관광객만 수백만명인데, 그 사람들에게 자기 작품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도 있겠구요. 여러모로 참신한 아이디어 같기는 해요.

 


이제 궁전 구경을 다 마치고, 꼬마기차를 타러 갑니다. 꼬마 기차를 타고 별궁과 왕비의 촌락을 보러 갈껍니다. 저 너머가 아까 창에서 내려다본 정원인 거죠. 그 광활한 정원...^^

 


여기는 그랑 트리아농(Grand Trianon) 앞입니다. 루이 14세가 애인이었던 맹트농 부인과 밀애를 나누기 위해 조성한 곳입니다. 장밋빛이라고 해야 할 지, 하여튼 핑크빛 혹은, 연한 붉은빛이 도는 대리석이 정말 은은하고 우아합니다. 너무 이쁜 곳이에요. 그 대리석이 너무 특이하다보니 '대리석의 트리아농'이라 불리기도 한다네요.

 


여기는 쁘띠 트리아농(Petit Trianon) 앞입니다. 이곳은 루이 15세가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과 지내기 위해 만든 곳이라고 하네요. 아비나 아들이나... ㅋㅋ 뭐랄까, 아주 소박한 느낌입니다. 베르사이유궁과 대비하면 더욱 그렇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볼품없어 보이진 않아요. 마리 앙투와네트가 특별히 좋아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쁘띠 트리아농의 내부입니다. 침대 진짜 작습니다. 인류는 점점 더 큰 사이즈로 진화하는 게 맞나 봅니다.

 


당구대가 있는데, 포켓볼용 당구대입니다. 그런데 정확히 사이즈는 재보지 않았으나 당구장의 당구대보다 사이즈가 좀 크게 느껴지더라구요. 검증할 방법은 없네요...

 

자, 이제 왕비의 촌락으로 갑니다~
쁘띠 트리아농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다보면 이번엔 마리 앙투아네트가 애인이었던 페르센과 밀회를 즐겼다는 정자가 하나 나오고, 거기서 더 가면 바로 왕비의 촌락이 나옵니다. 궁정 생활을 답답해 하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12채의 시골집을 지어서 마을을 하나 만든 것이지요. 재미 삼아 시골 생활을 해보라는 배려였습니다. 진짜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로서는 정말 황당할 노릇이었겠지만, 어쨌든 마을은 정말 이쁩니다. 그리고 진짜 시골 마을 처럼 텃밭이며, 농장까지 다 갖추었습니다. 이 농장에서 자라는 동물들이야말로 가장 팔자 편한 애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촌락 가는 길...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연못이 굉장히 큽니다.

 


마을 정말 이쁩니다...

 


세상에서 가장 팔자 편한 소 앞에서...^^

 

이제 다시 왕비의 촌락에서, 그랑 트리아농을 거쳐 수로가 있는 곳까지 걸어갑니다. 꽤 한참을 걸어야 했는데, 가다 보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내버려둔 큰 나무들도 있습니다. 물론 각 잡아 깎은 나무들이 더 많긴 하지만요.


이건 뭐... 핫도그도 아니고... 나무를 어떻게 이런식으로 가지치지를 할 생각을 하는 지...

 


그랑 트리아농의 뒷부분입니다. 대리석 색이 이쁘지요?

 


운하가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이 운하가 베르사이유 궁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나오면서 다시 그랑 트리아농의 내부를 살짝 구경했습니다. 여기도 당구대가 있군요...

 

여기까지 구경하고, 다시 꼬마 기차를 타고 베르사이유궁으로 돌아와 밖으로 나왔습니다. 자전거를 빌려서 하루 종일 이 안에서만 놀아도 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도시락 싸들고 가서, 정원 아무곳이나 돗자리 하나 펴고 뒹굴뒹굴 누워서 책도 읽고 낮잠도 자고 도시락도 까먹고 놀면 딱 좋을 곳입니다. 예쁜 정원, 또 보고 싶네요...

 

자 이제 몽생미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초원은 소금 초원입니다. 바로 저 수도원 부근부터 바다라 염분을 많이 머금은 곳이라고 하네요. 소금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들, 그런데 가만 보면 발과 얼굴만 까맣게 생긴 아주 특이한 애들입니다.

 

몽생미셸은, 섬 위의 수도원입니다. 이 섬은, 우리 나라의 진도처럼 밀물과 썰물에 따라서 육로로 연결되기도 했다가, 다시 섬이 되기도 했다가 합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15m나 된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부는 이곳이 유명해지고, 많은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이 찾아오자 이곳에 둑을 쌓고 철길을 놓아서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철길만 걷어내고 자동차로 갈 수 있도록 둑에 포장도로를 만들고 양쪽에 주차장을 조성했습니다. 그러다가 바로 얼마 전 그 주차장을 폐쇄하고 다소 먼 곳에 주차장을 만든 후, 셔틀버스를 타고서만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다가 되던 곳에 둑을 쌓아 놓으니 물의 흐름이 바뀌게 되고, 그러면서 둑의 양안으로 심한 퇴적이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지형이 변하고, 그것이 주변의 경관과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주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프랑스 정부에서는 다시 둑을 걷어내겠다는 큰 결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방이 공사 현장입니다. 일단 퇴적물을 걷어내고, 둑을 다시 없앤 후, 섬에 접근하기 위해 다리를 놓을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 공사가 2025년 완공 목표라는군요. 어찌 보면 참 별 거 아닐 것 같은 공사인데, 일단 자연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어떻게든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 같았으면 2~3년 안에 끝날 공사 같은데 말이죠. 어쨌든, 한번 자연을 망가뜨린 결과로 다시 십수년에 걸쳐 돈과 시간을 들여 복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우리의 4대강이 떠오릅니다. 아... 복구하려면 도대체 얼마가 들런지... 복구는 될 수 있을런지...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일 입구입니다. 오로지 길은 하나. 양 옆으로 기념품 가게가 즐비합니다. 옛날에도 이곳은 수도원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상대하는 가게들이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중간에 놓여 있던 광고판...? 여튼, 여기 사진 보시면 예전에 둑이 없던 시절의 사진입니다. 물 들어오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옛날 순례자들 중에는 물에 휩쓸려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입장이 5시라서, 일단 허겁지겁 올라갔습니다. 수도원 입구입니다.

 

원래는 돌섬이었던 거죠. 그 돌 섬 위에 수도원을 지은 거라, 여기저기 곳곳에 원래 자연 그대로의 바윗덩이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정말 고생 많았을 것 같아요.

올려다본 수도원의 꼭대기... 전형적인 고딕 양식이네요.

 

제일 위의 황금빛 미카엘 천사 보이시나요? 미카엘 천사는, 이 수도원을 짓도록 주교의 꿈에 나타났던 천사입니다. 그래서 이 수도원을 짓고, 화룡정점으로 제일 위에 미카엘 천사를 올린 거지요. 이건 직접 올리지 못하고, 비행기를 동원해 마지막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수도원의 건축 과정을 모형으로 전시해놓은 것이 밑의 사진들입니다.

자 이제 꼭대기에 미카엘 천사를 올리는 작업입니다.

 

수도원 제일 위의 전망대까지 올라가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이게 다 갯벌이에요. 이 갯벌은 굉장히 단단해서 밟아도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기가 편하대요. 그리고 갯벌도 색이 하얀 편이에요. 우리 나라의 갯벌은 어두운 색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전망대에서 한 장. 저 뒤에 보이는 것도 무인도입니다. 이 섬이 한 때는 요새로 쓰였었는데, 그 때 저 무인도와 함께 철옹성이 되어주었다고 합니다. 저 섬에 지어졌던 요새는 다 파괴되고, 지금은 다시 무인도가 되었구요, 이 섬은 수도원이 된 것이죠.

 

수도원의 주 예배당입니다. 내부 양식도 전형적인 다른 고딕 양식의 성당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높은 아치와 둘러선 회랑...

여기 저기 놓여 있는 성모상, 아치형 창문들... 이 수도원은 고딕양식과 로마네스크양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웅장한 느낌이죠...?

 

여기도 계단틈에 바위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네요.

 

뒤에 보이는 곳은, 수도사들이 밥을 먹고 묵상을 하며 거닐었던 회랑입니다.

회랑이 참으로 화려하죠? 회랑 안쪽의 정원도 매우 깔끔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회랑에서 내다본 갯벌입니다...

회랑의 조각 장식이 참 섬세합니다. 나무 아치도 특이하구요.

회랑에서 올려다본 수도원 상부...

 

수도원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을 나타내주는 부조입니다.
수도원을 만든 것은 오베르 주교입니다. 어느날 오베르 주교가 꿈을 꾸는데 미카엘 천사가 나타나서 이 섬에 수도원을 지으라고 얘기를 합니다. 오베르 주교는 그냥 꿈이라 생각하고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다시 미카엘 천사가 꿈에 나타나 오베르 주교의 이마를 엄지 손가락으로 꾹 누릅니다. 꿈에서 깬 오베르 주교가, 자신의 이마에 난 손가락 자국을 보고 그제서야 실행에 옮겨 이 수도원이 지어졌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미카엘 천사가 말하기를, 이 섬에 수도원을 지으면 절대로 외적이 이 땅을 차지하지 못하게 막아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실제로 이 섬은 단 한번도 외적에 의해 점령 당한 적이 없었고, 백년 전쟁 때도 영국은 결국 프랑스를 함락하지 못하고 물러서게 됩니다.  따라서 프랑스 사람들에게 이 몽생미셸은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구요. 수도원 제일 꼭대기에 황금빛 미카엘 상을 올리게 된 것도 다 이런 이유인 것이지요.

 

이곳은 순례자들이 묵었던 곳입니다.

 

수도원에 오게 되는 순례자들의 짐과 기타 여러 가지 필요 물품들을 끌어 올리던 도르레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라고 써 있네요. 이곳은 장례 집전이 이루어지던 공간입니다.

피에타 상.

장례식을 치루던 곳에 어울리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 지...

 

원래 수도원은 오로지 수도사들이나 순례자들만 묵을 수 있었습니다만, 이 곳은 요새로도 쓰였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기사들을 위한 공간이 존재합니다. 이 곳이 기사들이 묵었던 숙소입니다.

숙소에 있다가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기사들이 뛰어 내려가던 계단입니다.

 

이제 수도원을 내려오면서 찍어 보았습니다. 수도원의 뒷모습쯤 되겠네요.

 

수도원 밑의 마을에서 한장. 집들의 모양이 상당히 특이하죠?

나무조각 하나하나를 이어붙인 지붕입니다.

전형적인 노르망디 양식의 집이네요. 어떤 집은 납작돌들로 지붕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좁은 길들과 옹기종기 들어앉은 집들...

 

다시 수도원 입구.
여기에는 유명한 과자가 하나 있습니다. 뿔라 Poulard 아줌마라고, 아주 오래 전 순례자들을 위해 오믈렛을 정말 맛나게 만들어 팔던 아줌마였는데, 이 아줌마가 음식 솜씨가 좋아서 과자도 맛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식당에서는 여전히 오믈렛을 팔고, 이 아줌마 이름을 딴 과자를 여기저기서 팔고 있습니다. 식당은 지금 그 아줌마의 후손이 경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여기서 과자를 많이 사더군요. 저도 회사에 가져갈 과자를 좀 샀습니다.

 

우리가 먹은 저녁. 해물 모듬을 시켰습니다. 옹플레흐에서 홍합 한 냄비를 먹는 모습을 보고, 해산물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해물모듬이 괜찮다길래 일행 모두 이걸 시키고, 가이드 아저씨는 홍합을 시켰습니다. 결론은... 별루.
일단 게는 정말 맛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 꽃게나 대게만큼 달지도 않고, 그렇다고 킹크랩마냥 실하지도 않은 상황. 퍽퍽하고 별 맛 없더라구요. 고동 류는 나름 괜찮았는데, 메인이라 할 수 있는 게의 맛이 별루라서 실망이었습니다. 고동/소라는 정말 많이 주어서 결국 고동은 많이 넘겼습니다. 먹기 위한 노동력이 너무 많이 들었어요.
가이드가 이곳의 특산물 중 하나인 뽐므 시드르를 사주었습니다. 사과 탄산주? 사과 샴페인? 이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정말 술 같지도 않고, 달달하니 정말 맛났습니다. 하지만, 주당인 남편은 너무 술 같지 않다고 그닥 좋아하지 않더라구요. 하지만 내 입맛에는 딱!

 

저녁을 먹은 후, 몽생미셸의 야경을 찍기 위해 다시 수도원 밑으로 버스를 타고 왔습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습니다.

 

해가 지면서 제일 가운데부터 불이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희한한 것이, 불이 한번에 켜지지 않습니다. 가운데를 시작으로 해서 한군데씩 한군데씩 켜지는 것이, 아무래도 사람이 올라가면서 수동으로 켜는 것 같은 느낌. 관리실이라든가 이런 곳에서 한번에 켜면, 쫙 불이 들어오는 걸 예상했는데 너무나도 황당하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씩 하나씩 불이 켜지더라구요. 정말 재미났습니다.

시간차를 두고 가이드가 계속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삼각대를 안 가져가서 가이드가 찍어준 사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위 야경 사진은 삼각대도 없이 남편이 인간승리의 정신으로 얻어낸 야경! 오른쪽의 공사용 크레인이 흠이지만, 정말 잘 찍었네요. 사진 밑의 형광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은 일본인 관광객입니다. 너무나 재미있게도, 일본 관광객들은 다 저걸 입었더라구요. 야경 투어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행사에서 일괄적으로 나눠준 듯 합니다. 아무래도 밤이고, 차가 다니는 곳이니 안전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는지 미리 준비는 잘 했지만, 마침 옆이 공사장이다보니 다 공사장 인부 같아 보였다는...^^

이렇게 해서 몽생미셸 투어가 끝났습니다. 너무나도 아쉬운 하루, 정말 길었던 하루.
하지만, 정말 멋진 풍경들을 눈에 가득 담아 올 수 있어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셋째날은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 투어!
한국에서 이미 한달 전쯤 고민 끝에 투어를 예약해 두었습니다. 프랑스 하면 에펠탑, 루브르 못지 않게 몽생미셸이 연상되곤 했던 지라 소원풀이가 오히려 늦은 편이라고 해야 할런지요. 어쨌든, 이번 파리 여행의 가장 기대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었지요. 오늘은 노르망디 해변 특집입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우리에겐 낯익은 지명이지요. 그 노르망디 맞고요… 여튼, 그쪽 해안에도 절경이 많다 하더라구요. 우선 에트르타를 들렀다가, 옹플레흐를 거쳐, 몽생미셸까지 가는 기다긴 일정. 아침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예정된 아주 빡센 일정입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비가 옵니다. 부슬부슬~~~ 거참. 내다 보니 우산을 안 쓴 사람이 없을 정도의 비네요. 하지만, 곧 개이기를 바라며 출발했습니다. 우선 가이드를 만나기로 한 콩코드 광장까지는 오빠가 태워다 주었구요, 콩코드 광장에 도착해보니 승합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 말고 모녀 두 명의 일행이 있더군요. 일행이 있는 게 나쁠 건 없지만, 대학 다닌다는 그 딸은 시차 적응도 안 되고(우리보다 하루 먼저 왔건만!) 감기까지 걸려서 가이드 설명은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잠만 자더라는… ㅋㅋ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에트르타(Etretat) 였습니다. 다행히 날이 환~하게 개서 정말 환상적인 햇살을 뿌려줍니다. 오르세에서 보았던 그림에도 나오는 그 에트르타의 코끼리 절벽! 다음의 행선지인 옹플레흐랑 가까운 편입니다. 그래서 모네는 옹플레흐에 사는 스승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이곳에 자주 들러 그림을 그렸다고 하네요. 많은 화가들이 사랑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저 절벽위 푸른 곳은 바로... 골프장입니다. 에트르타 골프장. 정말 멋지다고 하네요. 골프를 안 치는 저로서는 뭐 상상도 잘 안 되지만, 여튼... 좋아 보이긴 합니다.

 

마을까지 한 화면에 넣어봤습니다. 정말 아기자기하고 이쁜 마을이죠.
사진의 배경이 되는 곳은 엄마 코끼리 입니다. 코끼리가 바다에 코를 빠뜨리고 서 있는 것 같은 모양 맞지요? 엄마 코끼리 뒷편으로는 좀 더 굵은 코의 아빠 코끼리 바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완전히 정반대의 위치로 가야만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투어 상품에 따라 거기까지 걸어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던데, 우리는 시간 관계 상 생략. 그림 엽서로만 만족해야 할 것 같네요.  

 

에트르타를 주제로 한 화가들의 그림에는 종종 아빠 코끼리도 나옵니다. 1번이 아기코끼리, 2번이 엄마코끼리, 3번이 아빠코끼리입니다. 우리가 서서 기념 사진을 찍은 위치가 4번입니다.

 

언덕 위에는 기념 탑이 하나 서 있습니다. 최초로 지중해 횡단 비행기가 떴던 곳이 바로 이 에트르타 언덕 위라고 합니다. 그 당시 파일럿들의 얼굴이 새겨진 부조도 있고, 기념탑과 기념관이 있습니다. 사실… 뭐, 그닥 멋지지는 않고 어울리지도 않아요. 너무 크기만 하고 말이죠. 프랑스답지 않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 작고 아담한 교회. 들어가 볼 수는 없더군요.

 

뒤로 보이는 게 아기 코끼리 바위입니다.

 

해변도 자갈 해변입니다. 아주 특이해요.
해변에 경고 문구가 써 있었습니다. “이 자갈은 해변의 자산이고, 이 마을 사람들은 이 해변으로 인해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당신이 이 자갈을 하나 집어가면, 그 만큼 이 해변 마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게 된다…” 아주 정중하면서도 피부로 확 와 닿는 경고 문구더라구요. 그냥 “자갈 채취 금지!” 뭐 이렇게만 써 놓는 것보단 훨씬 구속력이 크지 않나요.

 

 

마을 자체가 너무 아기자기하고 이쁩니다. 처음에 동사무소 같은 곳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현재 기념품 가게입니다. 그 앞이 이 마을의 광장. 사실, 광장이라 하기엔 거시기하지만, 뭐 유럽쪽은 광장은 ‘넓은 평지’ 라기 보단 ‘널리 열려있는 곳’에 가까운 거니까요.

 

그냥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발견한 도자기 가게입니다. 컵 하나에 5유로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살까 말까 몇번을 집어 들다가 그냥 왔습니다. 저 정도의 도자기는 이천에 가도 많을 것 같아서요. 흐흐.

 

이곳에서 출발한 시간이 거의 11시 30분 넘어서인 것 같습니다.
두번째 행선지로 달리면서 센강을 가로지르는 노르망디대교를 건넜습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사장교에 드는 다리지요. 한 때는 세계 최장의 사장교였으나, 기록은 뭐 늘 갱신되는 것이구요. 인천대교보다 약간 긴데, 좀 거시기한 건 인천대교 디자인이 거의 이거랑 똑같다는 것입니다. 음… 사장교의 한계인 건지, 완벽한 표절인 건지는 잘 모르겠구요. 여튼, 사진과 달리 경사가 장난 아닙니다. 사진을 찍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다리를 건너면서 찍어봤자 view가 좋게 나올 것 같지도 않으니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으로 대체. ^^ 

 

달리고 달려~ 옹플레흐 항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아, 정말 예쁜 항구 마을이지요. 이 마을은 모네의 선생이었던 외젠 부댕(Eugene Boudin)이 살던 곳이라, 이 사람 이름을 딴 미술관도 있습니다. 아주 작은 항구구요. 예전엔 이 마을의 항구에서 수산업까지 모두다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외곽쪽에 신항구가 새로 생기고 이곳은 개인용 요트 정박이 대부분입니다. 이 요트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일까요…?^^


 

마을 입구의 샌드위치 가게에서 간단한 점심을 사서 해결했습니다. 요트를 바라보는 계단참에 앉아서 먹었어요. 워낙 밥값이 비싼 동네다보니, 베르사유 궁전에서든 루브르에서든 그 어느 곳에서든 이렇게 샌드위치와 음료수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무지 많아요. 관광객이든 현지인이든 말이죠.

 

점심을 다 먹은 후, 다시 항구 입구에서 전체가 다 보이도록 한컷 더.

 

이곳은 높은 분들이 마을에 내려오시면 묵게 했던 공관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나무와 돌이 어우러진 독특한 양식이죠. 나무로 촘촘히 기본 골조를 만들고 사이사이를 다시 나무로 이은 후, 사이사이를 메꾸는 게 노르망디 양식이라고 하네요. 이건 노르망디 양식에 석조건축이 섞인 형태네요.

 

아주 이국적이지 않나요? 그런데 보면, 북유럽의 어느 곳 같기도 해요. 대부분의 건물들이 2~3층 정도까지와 그 이상이 약간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저층은 노르망디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고, 그 이후에 북유럽, 특히 노르웨이 쪽의 영향을 받아서 증축되었음을 보여준다는 거죠. 저 건물들 뒤쪽은 지대가 더 높아서 앞에 보이는 2층이나 3층 정도가 뒷면의 1층이 됩니다.

좀 전에 보았던 항구 주변 건물들의 뒷모습입니다. 항구쪽 1층이 대부분 상가였던 것처럼, 골목 쪽을 기준으로 볼 때 1층들도 대부분 상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모습이 전형적인 노르망디 양식이네요.

 

이건 원래 교회였어요. 지금은 해양 박물관 같은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참 이쁜 골목입니다. 그런데 이 길의 이름은 '죄수의 길'이라고 하네요. 골목 안쪽으로 보이는 곳이 죄인들을 가둬 두던 곳이라서 그렇게 붙여졌다고 합니다.

 

요트를 배경으로 해서 다시 한번. 가이드가 남편더러 이곳은 프랑스인데 도대체가 왜 천편일률적인 포즈를 보이냐며 구박하는 바람에, 얼굴도 웃고 있고 포즈도 좀 바뀌었습니다. 하하.

 

외젠 부댕의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입니다. 딱 이 지점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그림과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네요. 어딘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과 풍경... 우리 나라는 18세기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 어디에 가면 있을까요?

 

옹플레흐는 정말 작은 어촌 마을이지만, 화가들이 워낙 좋아했던 곳이고 무엇보다 인상주의에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외젠 부댕의 고향이니만큼 화가들의 아뜰리에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실제로 현대미술 작품을 취급하는 화랑도 정말 많았어요. 문제는 가격이 장난 아니라는 거…^^;;

 

모네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골목길입니다.

화가들의 아뜰리에가 몰려 있는 골목입니다. 골목의 모습 자체가 예술이에요.

 

카트린느 성당과 종탑입니다.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의 목조 성당이라고 하네요. 고딕은 늘 석조만 보아왔던 지라 정말 특이해요. 목조인 까닭에 그리 높진 않았고, 석조 건물과는 또 다른 매력을 풍깁니다. 왠지 사찰의 느낌이 나요. 재료의 차이가 중요한 까닭입니다. 프랑스의 시골 성당에서 절의 향기를 느끼다니요…

 

성당 내부입니다. 석조 고딕만큼 웅장하고 큰 느낌은 아니죠. 소박한 느낌입니다.

이곳의 파이프오르간은 소리가 또 남다르다고 합니다. 다른 성당과는 달리 나무에 소리가 부딪히기 때문에 훨씬 부드럽고 깊은 소리가 난다는 거에요. 들어볼 수 없는 게 아쉬울 뿐…

이제, 옹플레흐를 떠나 드디어 몽생미셸을 향해 갑니다...^^

 

 

 

 

 

 

같이 투어를 받은 가족과 함께 파스타와 피자로 점심식사를 한후, 다시 프라하 성으로 올라와 관광을 시작했습니다...

 

프라하성에서 점심 먹으러 내려가는 계단길... 광고 및 각종 뮤직비디오에 많이 나오는 곳... 오른쪽으로 아기자기한 이쁜 건물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아주 분위기 있는 계단길이다.

 

 

밥먹으러 내려가다가 놀라서 자빠질 뻔 했다. 저 사람이 내 발목을 잡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ㅋㅋ

저 집이 예전엔 감옥이었던 걸까? 왜 저런 형상을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광고효과 하나는 끝내줄 듯.

 

 

우리... 로밍했었다. 뿌하하... 살다 살다 별 걸 다 해보네.

그래도 타지에 나가 정신 없는 와중에 공중전화 찾느라 헤매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맘 편하고, 시간 맞추기도 좋을 것 같아 로밍을 선택했다. KTF 로밍을 받았는데 남편의 폰이 유럽쪽 로밍을 지원하지 않아서 NOKIA 핸펀을 받았다. 한글을 지원하지 않는 바람에 문자 해독하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다. "KACHICOL, 000-000 GOGAEKNIMKE GEOLYEOON JUNHWAIBNIDA..." 해독해 보시라.

 

 

프라하성과 페테르진 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이 만나는 작은 광장. 점심 먹고 이곳에서 다시 모여 다시 관광을 시작했다. 

 

 

네루다 거리... 내려올 때는 계단으로 내려왔지만, 밥 먹고 다시 올라갈 때는 네루다 거리를 통해서 올라 갔다.

네루다는, 체코의 국민작가로 그 사람의 작품 하나쯤은 모두다 읽어보고 자랄 정도의 위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마지막 사진의 건물이 네루다가 살았던 집으로 벽면에 청동판으로 네루다가 조각되어 있다.

프라하의 건물들은 다른 유럽과 마찬가지로 예전 모습이 남아 있으면서 다양한 색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 더 아기자기하고 이쁘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세계 3대 성당 중 하나인 성비트성당.

전형적인 고딕양식의 성당인데, 파리의 노트르담에 비해 좀 더 밝은 느낌을 준다. 건축물 자재 자체가 '사암'이라는 것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검게 변하는 특성을 지녔다고 하는데, 그것에 비하면 덜 검다는 것이 성비트 성당의 특징이다. 전면에 있는 장미창 역시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들이 인상적이다. 각 문마다 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하는 부조가 표현되어 있고 배수를 위한 악마의 조각 또한 수도 없이 많다. 보면 볼수록 노트르담 성당이 생각났다.

 

 

성당의 지하에 있는 카를4세의 무덤이다. 카를 4세는 프라하의 카를다리에서 볼 수 있듯, 체코에서 역사적으로 아주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왕이다. 부인들의 무덤이 옆에 겹겹이 놓여 있다. 죽어서도 호강이다... ㅋㅋ

 

 

자... 밑에서부터는, 스테인드글라스 퍼레이드... 여기에도 물론 노르트담성당에서 본 것과 같은 장미창이 있었다.

하지만, 별 짓을 해도 내 눈으로 보여지는 색감이 표현이 되지 않았다.

가이드 왈, 카메라가 나빠서도 아니고 세상의 그 어떤 카메라로도 담아낼 수 없는 빛의 신비라고 했다.

사실 장미창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스테인드글라스들이 내가 찍은 것보다는 실제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다...

 

 

 

비트성당 내에 있는 조각품... 조각품 역시 고딕양식의 특성을 살려 한껏 멋을 냈다.

 

 

몇백년 전에 만들어진 프라하 시내의 지도이다. 블타바강이 보이고, 카를교가 보인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집 몇 개를 제외하면 저 지도가 여전히 현실세계에서도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이 조각품들은 체코의 성인인 네포묵 신부를 기리는 조형물이고, 가장 오른쪽은 네포묵 신부의 관이다.

네포묵 신부는, 자신이 바람을 폈다는 왕비의 고해성사를 왕에게 고하지 않은 죄로, 혀가 뽑힌 채 카를교 위에서 물에 빠뜨림을 당한 신부이다... 몸에 납덩이를 묶은 채로 빠뜨렸으나, 시체가 물에 뜨자 왕이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어쨌든, 프라하의 여러 조각상 들 중에 머리에 별 다섯개가 그려져 있으면 그것은 무조건 네포묵 신부를 뜻한다.

가운데 사진에 자세히 보면 천사가 쟁반 위의 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자신의 도리를 지킨 네포묵에 대한 찬양이다.

네포묵 신부의 관 뒤에 보면 황금색 탑이 보인다. 저건 순황금 덩어리다.

어떻게든 잘 찍어보려고 했으나 플래쉬를 터뜨리면 더 이상하게 나오고, 플래쉬를 안 터뜨리면 촛점이 흐려지고... 삼각대를 안 가져간 것이 정말 너무 후회스러웠다.

 

 

찍고 나서 화면으로 확인했을 때는 분명 잘 나왔었는데... 도착해서 확인해보니 흔들렸다. 아쉽기 그지 없다...

이것은, 파이프오르간으로 베토벤이 직접 연주를 하기도 했다는 오르간이다.

연주하는 소리를 직접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성당의 제일 뒤에서 전면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아치형 지붕과 건물의 웅장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중앙의 회랑만을 보여줄 뿐, 이 회랑을 빙 둘러서 각 왕들의 개인 기도실과 다양한 조형물들,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되어 있다.

 

 

다른 성당에서도 그렇고 나는 왜 저런 악마의 모습들이 건물 모서리마다 조각이 되어 있는 지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저 조형물들은 배수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쫙 벌린 입으로 물이 떨어져 나옴으로써 악의 순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비트성당의 원래 출입구. 세 문 위로 좌측에는 지옥, 우측에는 천국이 그려져 있다.

 

 

 

 

비트성당 문에 각 별자리가 조각되어 있다. 그래서 남편은 쌍둥이자리 앞에서, 나는 처녀자리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체코에는 바다가 없어서 그런지, 게자리에 가재가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

그래서 전갈자리인 일행 하나는 가재를 전갈로 알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ㅋㅋ

 

이것도 뭔지 기억 안 나는...ㅋㅋ

 

 

 

 

프라하성을 내려오는 작은 골목길에 있는 또 하나의 전망 point. 블타바 강이 건물들 사이로 작게 보인다.

 

 

일명 "인형 명품관" 프라하성에서 내려와 카를교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인형가게다.

저 수많은 인형들이 모두 직접 손으로 깎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가이드가, 가격표 꼭 보고 사려면 사라고 하길래 얼마나 하나 봤더니

인형 하나에 몇십만원은 기본이었다... 내참. (원래 프라하는 인형극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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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파리의 미술관은 크게 세 곳으로 대표됩니다. 곳곳에 위치한 소규모 미술관/박물관에도 물론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요.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죠. 이 중 오르세 미술관은 19세기의 작품들을 망라해 놓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2월혁명이 일어난 1848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4년까지의 작품들인 거죠. 이 이전의 작품은 루브르에, 이 이후의 작품은 퐁피두에 전시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1804년 최고재판소로 지어진 건물로 오르세궁이라 불렸으나 불타 버리고, 1900년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파리국립미술학교 건축학 교수였던 빅토르 랄로에 의하여 오르세역으로 다시 지어졌다. 현대적으로 지은 역사(驛舍)였으나 1939년 문을 닫게 된 이후 방치되었다가 1979년에 현재의 미술관 형태로 실내 건축과 박물관 내부가 변경되어 1986년 12월 ‘오르세미술관’으로 개관되었다. [출처] 오르세미술관 | 두산백과"

오르세궁이 불타 버린 후에는 도심의 공원으로 사람들이 이용했다고 합니다. 제대로 갖춰진 공원은 아니었으나, 폐허가 되어버린 궁터와 그 틈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들이 나름 분위기 있는 광경을 제공했다고 해요. 그러다가, 오를레앙 철도공사의 제안으로 철도역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때 만국박람회에 맞추느라 엄청난 공기단축을 감행했다고 하네요. 이후 다시 방치되었다가 미술관으로 바뀝니다. 

19세기의 회화 작품이 주가 되다 보니,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았던 낯익은 그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많은 경우 루브르보다는 오르세에 대한 기억을 더 좋게 가진 사람들이 많더군요. 이번에도 그런 낯익은 그림들을 만나서 반가웠던 반면, 지난번에 갔을 땐 그닥 눈에 보이지 않던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그 감동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정리해 봅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마네, 모네, 고흐, 고갱, 밀레, 세잔, 르느와르, 드가... 등은 skip 입니다. 


#1.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 1845-1924), 카인(Cain)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잘 아는 카인과 아벨의 바로 그 카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두 형제인데, 가인이 질투로 인해 아벨을 죽이고, 쫓겨나게 되죠. 이 그림의 가장 앞에 선 사람이 카인입니다. 카인의 죄악으로 인한 기나긴 고생의 나날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인물 하나하나에 고단한 삶의 흔적들이 보이는 그림인데, 사이즈가 굉장히 커서 보는 순간 바로 압도 되어 버리더군요. 캔버스에 유채 그림이고 사이즈는 308 x 700cm 입니다. 1880년 작품입니다.


#2.

토니 로베르 플뢰리(Tony Robert-Fleury), 코린트의 마지막 날 (기원전 146년) (Le dernier jour de Corinthe (146 avant J.C.))

배경은 전쟁이에요. 코린트면 성경의 고린도인데, 성경 상의 어떤 사건은 좀 아닌 것 같아요. 코린트는 그리스 중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도시입니다. BC 8세기 경에 도시 국가가 완성되었고, 부를 누리며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도 나오듯 물질적인 번영과 함께 타락도 동반했던 것 같네요. 여튼, 중세 후기에 이르면서 쇠퇴하다가 1458년 터키에 정복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로 보면, 아마 터키에 정복될 당시의 모습을 그린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추측을 해봅니다만, 아무리 검색을 해도 이 그림과 관련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네요. 

여튼, 이 그림을 보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군인들이 진군해오는 상태에 여인과 아이들은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입니다. 한쪽 구석에서는 겁탈당하는 장면도 묘사되어 있고,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여인들, 숨어 있는 여인, 그저 괴로워하는 여인, 아이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인, 죽은 것 같은 아이를 올려놓고 망연자실한 여인, 그리고 이미 쓰러진 남자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너무나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눈물이 찡할 정도로요... 이 그림은 리얼한 현장 포착의 보도 사진보다 더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캔버스에 유채 그림이고 사이즈는 400 x 600cm 입니다. 19세기경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3.

레옹 프레데릭(Leon Frederic), 노동자의 시기들(Les âges de l'ouvrier, triptyque)

이 사람은 벨기에의 화가구요, 세쪽으로 나누어져 그려진 그림입니다. 인체의 명암표현이 선명하게 대비되도록 표현을 한 게 특이해요. 제일 왼쪽엔 힘든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그려져 있고, 제일 오른쪽은 아기를 돌보고 있는 엄마들, 그리고 가운데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제목이 노동자의 시기라는 것은 이 세 폭에 주로 등장하는 연령대의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 되어버리나요? 예전엔, 아이들을 그저 '작은 사람'으로만 보았다는 걸 이 그림에서도 알 수 있는 것 같네요. 저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가운데 중앙에 장례식의 행렬이 있어요. 결국 우리 모두는 저 길로 간다는 걸 얘기해주는 것 같아요. 어쨌든, 이 그림 또한 표현 방식의 강렬함과 리얼리즘으로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캔버스에 유채 그림이고 사이즈는 163 x 93.5cm, 1895~1897


#4.

루이스 어니스트 바리아스(Louis Ernest Barrias), 과학의 등장으로 베일을 벗는 자연(Nature Unveiling Herself to Science)

이번엔 조각인데요... 밑의 부분별 확대 사진을 다시 한번 보세요... 정말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돌로 저런 곡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정말 살아 있는 여성 같은 따뜻함과, 색색의 돌들로 이루어진 옷과 장신구. 

와우~~ 정말 환상적입니다... 청록색 보석과 푸른색의 띠까지!

발끝으로 흘러내리는 드레스의 우아한 자연스러움!

금방 나를 쳐다보며 웃어줄 것만 같은 느낌, 스르륵 저 매듭이 풀어지며 사뿐히 걸어 내려올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지 않나요?

제목이 좀 특이하다 했는데, 1889년 보르도의 의학 대학이 생기며, 장식용으로 의뢰된 조각이라고 합니다. 의학과 과학, 자연, 인체... 조각이 은유하는 것이 무엇일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이날 처음 봤는데, 너무나도 유명한 조각이라 장식용으로 굉장히 많은 모조품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멋집니다. 높이 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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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부터는 귀스타프 쿠르베(Gustave Courbet)의 그림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빠져든 화가죠. 사실주의 화가로서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한번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말해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오로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그대로 표현을 하죠. 하지만, 화가의 개인적인 감성이 반영되지 않을 순 없겠죠. 쿠르베 그림의 분위기와 소재, 그리고 그림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들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름 부유하게 태어나 부모님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파리 혁명 당시에는 민중들의 편에서 싸우기도 했던 사람이구요. 


#5.

화가의 작업실(The Painter's Studio; A Real Allegory), 361 x 598cm

1855년 국제박람회에 출품했다가 거절당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도 매우 큰 작품인데, 작품의 사이즈도 거절의 이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쿠르베는 인물을 사실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실제 인물만큼은 커야 한다고 생각했기 대문에 큰 작품을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 속의 화가는 자기 자신입니다. 나체 모델이 하나 서 있고, 어린 아이가 있죠. 그림 해설에서는 모델은 '진실', 아이는 '창조'를 은유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게 쿠르베가 한 말인지 사람들이 갖다 붙인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른쪽에는 지식인들, 상류층 사람들, 화가의 후견인 그룹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매우 밝고 자유스러운 느낌입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현실을 대변하는 민중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배고픔, 가난, 추위 등 곤궁한 현실인 거죠. 사회는 그렇게 양분되어 있었지만, 자신은 중간에서 양쪽을 매개함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6.

폭풍우가 지나간 에트르타 절벽 (La falaise d'Etretat après l'orage), 133 x 162cm

프랑스의 서쪽 노르망디 해변의 에트르타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세번째 날 여행기에서 실제 사진을 첨부하겠지만, 정말 이것과 '똑같습니다'. 모네도 이 해안을 좋아해서 에트르타를 그린 그림이 많이 있는데, 모네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더더욱 쿠르베가 왜 사실주의 화가인 지, 모네는 왜 인상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 너무 좋아요...^^


클로드 모네,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


실제 에트르타 해변의 코끼리 바위


#7.

수원지(The Source), 128 x 97cm

쿠르베의 그림 중에 누드화가 꽤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여인의 몸은 고대로부터 이어진 화법 그대로 절대적 미를 갖춘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 주류였다고 합니다. 매끈한 피부, 완벽한 균형 등으로 대표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런 몸을 가진 여인이 실제로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것은 사실주의에 어긋나는 것이죠. 그래서 쿠르베는 반기를 들고 여인의 나체를 그립니다. 이 작품에서 보듯이 말이죠. 한눈에 봐도 77사이즈 이상은 되어 보이는 저 풍만한 중부지방을 보고 누가 완벽한 여인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까. 특히 전통적인 그림만 보아오던 사람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겠죠. 미술계에서는 이걸 반항적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전시회장을 방문했던 나폴레옹 3세는 이 그림으로 인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들고 있던 승마용 채찍으로 화면을 내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네요. ㅋㅋㅋ


#8.

오르낭의 매장(A Burial at Ornans), 314 x 663cm

1849년에 오르낭에 머물며 그리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위해 실제 마을의 대다수가 모델을 자처했다고 하네요. 사실주의 작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실제 인물을 하나하나를 모델로 하여 그림을 구성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모델이 되었기 때문에 무척 뿌듯해 했으나, 정작 1850-1851 살롱전에서는 무시 당했습니다. 그림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저는 그저 사실적인 묘사 자체가 참 마음에 듭니다. 전체적으로 장례식다운 어둡고 깊은 톤 속에서, 각 인물들의 표정이 다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다 똑같은 감정으로 슬퍼하지 않는 곳이 장례식이쟎아요. 그래서 마음에 듭니다. 사이즈를 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큰 그림이지요. 오르세에서도 벽면 전체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둘째날... 완벽한 시차적응을 해낸 우리 부부. 사실, 시차적응을 못하는 게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일단 비행기 안에서 5시간 이상을 잤는데 파리 도착한 이후 졸리다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그리고 도착한 후 또 여섯시간 정도 지나서 바로 잠자리에 들 수 있는 데다가, 그 뒤로는 그냥 8시간을 내리 잘 수가 있는데 왜 시차 적응을 못하는 걸까요? 몸이 일단 피곤한데 내리 자지도 못하고 한국에서 매일 아침 일어나던 시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새벽에 깨어난다는 게 이상합니다. 잠 많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차 부적응자들... 쯧쯧. ㅋㅋ

오늘은 일요일. 9월의 첫번째 일요일. 매달 첫번째 일요일엔 대부분의 박물관, 미술관들이 무료 관람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루브르는 분명 도떼기시장일 것이고, 그래서 오르세를 선택. 그래도 공짜는 양잿물도 마신다고, 사람이 많을 수 있으니 오픈 시간에 맞추어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시차적응을 너무 잘하려는 노력 때문이었는지, 눈이 좀 부었군욤. 

오르세 미술관의 대형 시계 전망대... 9년 전과 다르게 완전 리모델링 되었더군요. 훨씬 더 깔끔하고, 고급스러워진 느낌이었습니다. 벽면을 어둡게 하는 게 의외로 분위기를 가라 앉혀서 그림 감상에 더 도움이 되더라구요. 그림의 색깔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해주고요... 


오르세는 내부에서 사진 찍는 게 금지 되어 있어요. 물론, 몰래 몰래 찍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저는 교양있는 대한민국 국민인 관계로... 그림과 상관 없는 2층 난간과 오르세 전망 테라스에서만 찍었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은 9시 30분부터 입장이었는데, 우리는 10분 정도 줄 선 후 거의 제 시간에 들어가서 2시 30분 넘어 나온 듯 합니다. 결정적으로 밥도 못먹고... 그 안에서 먹었어야 했는데, 미처 그 생각을 못했네요. 여튼, 저는 고흐의 그림과 꾸르베의 그림에 폭 빠져서 정신을 못차렸습니다. 그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더 찾아보고 공부해보고 싶을 정도였어요. 고흐의 붓터치는 정말 실제 그림을 보아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추후에 사진으로 본다 한들 감동이 다시 느껴질런지 모르겠지만, 오르세에서 고흐의 그림을 마주하는 순간의 전율은 잊지 못할 것 같네요.


6개 대륙 -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북미, 남미, 호주 - 을 상징하는 여신상입니다. 낭뜨 지방의 공원에 버려져 있던 것을 발견해서 가져다 이렇게 오르세 앞뜰에 전시해 놓았다고 하네요. 바로 위에 있는 건, 아시아를 상징하는 여신입니다. 가만히 보면, 얼굴 모양이 정말 대륙을 대표하도록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제 오르세 미술관을 봤으니, 다음엔 강을 건너 바로 건너편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갑니다. 가면서 점심을 때우기로 한 거죠... 그런데, 가는 곳까지 먹을 거 파는 곳이 없더군요. 그런 채로 오랑주리 미술관까지 도착. 허헐.

줄이 10미터 가량... 보니까 검색대 통과를 위한 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밀어붙이기로 합니다. 밥 대신 그림을!!!

오랑주리 미술관에는 모네의 수련 그림 아주 큰 게 네 점이나 걸려 있더군요. 원형의 방을 빙 둘러서 말이죠. 그런데 신혼여행 때 취리히에서 본 그림과 뭐가 다른 건지...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은, 이제 거의 추상화 경지에 올라선 수련 연작이었어요. 모네가 백내장이 심해지면서 수련 그림 또한 추상화의 특성을 더욱 강하게 띠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랑주리 미술관도 실내 촬영 금지라 사진은 하나도 없는데, 우리 둘다 너무 배가 고팠었는 지 세상에 외관 사진조차 찍지를 않았네요. ㅋㅋ 사실, 미술관 건물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림이 중요한 거지. ㅋㅋ


오랑주리 미술관은 콩코드 광장이랑 바로 면해 있습니다. 뒤에 보이는 게 콩코드 광장이구요. 콩코드 광장에는 그 유명한 오벨리스크가 써 있죠.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가 로제타석의 상형문자를 해석해준 고마움의 표시로, 이집트에서 선물로 보낸 오벨리스크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된 일은 아닌 거지요. 하지만, 콩코드 광장의 역사는 매우 깁니다.


부르봉 궁전입니다. 오랑주리 미술관 관람을 끝내고 콩코드 다리를 지나 로댕 미술관 가는 길에 바로 만나게 되는 건물이죠. 지금은 국회 건물이라고 하네요. 루이14세가 자신의 딸에게 지어준 궁전이래요. 콩코드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마들렌 교회와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서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나오겠지만, 마들렌 교회의 건물 역시 28개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빙 둘러져 있어서 전면의 모습은 부르봉 궁전과 매우 유사합니다. 콩코드 광장에 서서 좌우를 바라보면, 마치 똑같은 건물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형국이 되는 것이지요. 마치 신개선문과 카루젤 개선문처럼요...


부르봉 궁전 근방까지 전혀 식당을 찾을 수 없다가, 궁전 뒷편에서야 하나의 레스토랑을 발견했습니다. 시간은 이미 3시가 넘었고, 대안이 없으니 무작정 들어가서 앉았으나... 사진은 하나도 없고, 온통 불어로만 써져 있고... 간신히 Beef와 Chicken이라는 것만 짧은 영어로 알아내고 시켰는데, 저렇게 나왔습니다. 소고기는 육회로, 그리고 닭다리는 두개가 덜렁 구워져서... 그리고 샐러드는 베이컨과 치즈가 잔뜩 올라간... 비싸기는 또 어찌나 비싸던지. 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워낙 고기가 좋기 때문에 사람들이 육회를 많이 먹는다고 하네요. 우리 나라 육회와 거의 유사한 모양으로 나오는 곳도 있고, 저렇게 얇게 사시미 뜨듯 나오는 경우도 있다 하네요. 저 뻘건 소고기 위에 있는 것들은 올리브유에 버무린 허브 가루와 치즈입니다. 저는 처음에 감자인 줄 알았어요. 

이제... 로댕 미술관으로 갑니다...

칼레의 시민들과 이철재...

백년전쟁 중에 위기에 처했던 도시를 구했던 여섯명의 용감한 시민들을 기념하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칼레는 프랑스 연안의 도시구요, 백년 전쟁 시 계속되는 영국의 공격에 칼레 시가 항복을 선언하자 영국의 왕은 시민 대표로 교수형에 처해질 6명을 뽑으라고 명합니다. 이에 용감한 여섯명의 시민이 자원을 하게 되는데, 이 사람들은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부자, 법률가, 사업가 들이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 아니겠습니까. 여튼, 영국왕의 임신한 왕비의 청으로 결국 사형은 면했는데, 백 여 년이 지난 후 칼레 시가 이 여섯명의 용감함을 기리기 위해 로댕에게 작품을 부탁했다고 하네요. 목에 밧줄을 두르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건 그 유명한 지옥의 문. 이건 취리히에서도 봤었고, 오르세에서도 봤었는데, 생각해보니 이태리에서도 봤던 기억이...

1880년 미술협회로부터 '파리 장식미술 박물관'의 문 제작을 의뢰 받고는, 단테의 신곡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었으나, 결국 사용되지 못했다고 하네요. 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생각하는 사람,입맞춤, 우골리노와 자녀들 같은 작품들이 이미 그 안에 다 들어 있어요. 나중에 그 부분들이 독립적으로 다시 크게 제작된 거죠.

이건 정원 남쪽 끝이에요. 아, 지금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우골리노와 자녀들 같네요. 단테(Alighieri Dante)의 『신곡』 「지옥편」 33번의 이야기를 토대로 자기 자식들과 함께 지옥에 갇힌 우골리노(Ugolino)와 그의 아들들을 재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제 지식이 짧아 잘 모르겠는데, 오르세에도 똑같은 제목의 조각품이 있거든요. 그런데 좀 형태가 달라요. 로댕이 같은 제목으로 작품을 여러 개 만들었나봐요. 음... 무식해서, 요까지만.

"13세기 이탈리아는 여러 개의 도시 국가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당시 우골리노 백작은 피사(Pisa)의 귀족으로서 권세를 좋아하며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에 자기의 당을 배반하고 루지에르와 함께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루지에르의 배반으로 우골리노 백작은 두 아들과 세 명의 손자와 함께 피사의 탑 속에 감금되었다. 탑의 열쇠는 강으로 던져졌고 그들은 아사상태가 되었다. 아이들의 죽음을 목격한 우골리노는 기아의 고통 끝에 그들의 시신을 먹은 후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다. 교회가 금기시한 이러한 행동 때문에 그는 지옥으로 보내졌다." - naver 지식백과

이건 뭐... 말 안 해도...

난 이상하게 발자크상이 멋지더라구요... ^^

로댕은 문인협회로부터 발자크의 기념상을 의뢰 받았는데, 사실보다 아름답게 표현되었던 그 당시의 보편적인 기념상과는 다른 파격적인 모습에 지옥의 문마냥 거부 당했다고 하네요. 로댕이 많이 속상했겠죠. 난 좋은데 왜 그랬을까나...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혁신을 좋아하진 않나봅니다. ㅋㅋ


이것은 바로 Autoolib! 전기차를 충전하는 곳입니다! 물론, 공용 전기 자동차를 말하는 것이지요. 공용 자전거인 벨리브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정말 많이 봤습니다. 이런 건 참 부럽더라구요. 우리 나라는 정말 안 될 사업 아이템 같아 슬프지만서두...

이제 나폴레옹의 무덤을 보러 앵발리드로 Go, Go!!!

아, 근데... 오늘 오르세, 오랑주리, 로댕 미술관 모두 공짜로 봤는데, 군사박물관과 나폴레옹 무덤은 안 된다는 겁니다. 내참... 사람 맘이 간사해서, 계속 공짜로 관람을 하다가 공짜가 안 된다고 하니 뭐 꼭 봐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무덤이 무덤이겠지. 그리고 나폴레옹을 심히 존경해서 꼭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그냥 Skip!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건물이 멋진 관계로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지요. 저는 앵발리드의 정문을 배경으로 찍었고, 남편은 건물 저 안쪽의 나폴레옹 상이 보이게 찍어달라고 해서 그렇게 찍어줬습니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 저게 나폴레옹인지, 사람인지, 고양인지 알 수도 없군요. 사실, 이 건물의 핵심은 저 멀리서도 보이는 황금색 돔 지붕인데 말이죠, 정작 그걸 찍은 게 없습니다. 아쉽지만, 인터넷에서 퍼온 그림으로 대체!


그리고, 이제 에펠탑을 만나러 훠이훠이 걸어갑니다...

이건, Parc du Champ-de-Mars 공원에서 바라본 에펠탑입니다.

사실, 에펠탑 배경으로 사진 찍기 가장 좋은 장소는 공원 반대편으로 언덕에 위치한 사이요궁입니다. 공원에서 오빠를 만나서 차를 타고 사이요 궁 picture-point에 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날따라 파리의 무서운 10대들이 뭔가 대규모로 모여 있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해 있어서, 오빠는 차를 가지고 근방에서 기다리는 바람에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은 없습니다. 옆의 관광객에게 찍어달라고 했는데, 그 아저씨가 어이 없게도 우리와 에펠탑을 일직선에 놓고 찍어서, 우리 둘의 머리 위로 에펠탑의 위 1/3 만큼만 보이도록 해놨더군요. 완전 어이 상실... 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짜증나서 그냥 와버렸습니다. ㅋㅋ

파리에서 가장 맛있다는 베트남 쌀국수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한국의 쌀국수보다는 좀 더 국물맛이 진하고, 고기도 엄청 많이 들어 있습니다. 다음날 가이드 말에 의하면, 유학생들에게는 파리를 떠나고 나면 가장 생각나는 곳 중 하나라고 하네요. 주인장 베트남 아저씨가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육수를 삶아내고 남은 고기 몇점 묻은 뼈도 선물로 주곤 한답니다. ㅋㅋ 오빠도 종종 가는 단골집이라 하구요, 밖에 줄 서 있는 거 보이나요? 우리도 조금 기다렸는데, 우리가 먹고 나오는데도 줄이 저렇게 서 있더군요. 여튼, 맛있었어요. 쌀국수도 맛나고 무슨 춘권 비슷한 걸 쌈에 싸먹는 것도 맛났어요. 우리 나라에선 그런 메뉴 없었던 듯. 여튼 추릅~ 참고로, 차이나타운 근방에 있습니다.

3시 넘어 점심을 먹고, 쌀국수 한대접까지 다 먹고 배 빵빵해진 채로 집에 들어와 쉬었습니다... 이렇게 파리의 둘째날이 저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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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랑스런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프랑스로 함께 출장을 간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어주는 나이라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죠...^^;;


9월 1일 토요일 11시 25분 출발 비행기를 타고 장시간의 비행 끝에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하니 9월 1일 토요일 오후 4시가 다 되어갑니다. 우리 트렁크에 붙여 놓았던 태그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우리 가방을 못알아보고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가방을 집어 들고 오빠를 만나 집으로 왔습니다. 화창한 파리의 날씨~~ 아, 행복하여라...


오빠의 집은, 파리 중심가 생루이 섬 바로 옆의 강변입니다. 9년 전에 살던 아파트에 비하면 궁궐이더군요. 방도 두개나 되고, 욕조까지 있는 목욕실도 있고 말이죠.^^ 오빠 집 측면 유리창으로 내다본 전경입니다. 정말 호젓하죠. 날씨가 화창하면, 센강변에 빛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아주 이쁩니다...

우리가 가져간 라면으로 저녁을 가볍게 때우고, 일단 걸어다닐 수 있는 근방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관광책자에 보면 마레 지구가 꼭 들러야 할 명소로 나와 있는데, 우리는 그 마레지구를 거의 매일 간 듯 합니다. 오빠 집 뒤가 바로 마레지구이다보니 수시로 가로지르게 되더라구요. 첫날도, 마레지구를 가로 질러 가서 바스티유 광장으로 갔습니다.


바스티유 광장의 혁명기념탑입니다. 이 자리에 바스티유 감옥이 있었고,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파리 대혁명은 시작이 된 거지요. 그러나 그 당시 바스티유 감옥에는 죄인이라고는 달랑 7명이 있었고, 7명은 정신이상자와 잡범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루이 16세는, 힘으로는 더이상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큰 물줄기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고, 따라서 정치적인 탄압이나 힘을 바탕으로 한 억압책은 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바스티유 습격으로 풀려난 그 7명의 죄수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다른 지역의 감옥에 서로 다른 이유로 다시 수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 혁명 기념탑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탑은 아닙니다. 저 혁명기념탑은 '7월혁명 기념탑'으로 1830년 7월 혁명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루이 16세의 동생이었던 샤를 10세가 입헌군주제를 인정하지 않고,  기본권을 제한하자, 이에 반대한 혁명으로 그 결과 루이 필립이 왕에 오르는 부르주아 혁명이었습니다.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 간 시가전이 벌어졌으며, 그 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탑이 바로 이 바스티유 혁명기념탑입니다. 탑 꼭대기, 황금빛의 천사가 하늘로 막 올라갈 것 같은 모양입니다. 

그 뒤에 보이는 게 바스티유 오페라 건물입니다. 미테랑 대통령 시절 만들어진 것이지요. 한 때 정명훈이 바스티유 오페라단의 지휘를 맡기도 했었지요. 들어가보진 않았습니다... 


다시 마레지구 쪽으로 걸어오다가, 보주 광장 입구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보주 광장은 수도 없이 지나다녔으면서, 막상 제대로 된 배경 사진은 마지막날이 되어서야 찍었습니다. ㅋㅋ


다시 걸어오다 만난 곳은, 바로 파리 시청사!


파리의 햇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를 낀 나도 눈이 부실 정도... 그러니 남편의 저런 어중간한 눈은 널리 이해해 주시기를... 지난번에 왔을 땐 겨울이어서, 이 앞의 스케이트장을 보며 재밌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광장으로. 거리의 악사들이 공연을 하기도 하고, 여행객들이 앉아서 쉬기도 하는 곳.


생 주느비에브 상입니다. 뒷모습이 보이네요... 생 주느비에브는 파이의 수호 성녀입니다. 예전에는 저 상이 세워진 곳이 파리의 시 경계였다고 합니다. 그 경계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며 파리를 지켜달라는 얘기겠지요. 팡테옹, 생 데티엔 뒤 몽 교회 등 주느비에브 얘기가 여기저기 나오길래 사진 한번 찍어봤습니다.


오호호... 시테섬의 노르트담이 보이는군요. Notre-Dame 은 성모마리아 혹은 성모의 집을 뜻한다고 하네요. 따라서 프랑스 곳곳엔 노트르담 성당이 엄청 많습니다. 그니까 저 뒤에 보이는 건 당근 Notre-Dame de Paris. ^^


Pont Sully 에서 만난 거리의 악사. 노래 잘하고, 잘 생기고, 쇼맨십까지 뛰어났던 아저씨. 이 아저씨를 여행 막바지, 퐁피두에서 다시 만나니 무척이나 반갑더군요.^^ 


이건 Pont Sully에서 찍은 파노라마 컷. 옵티머스 LTE2 짱!!! ^^


이렇게 날은 어두워지고, 우리는 집에 들어와서 첫날을 마무리했습니다... 

4월 7일, 무사히 결혼식을 마치고 8일 1시 50분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 내려서 3시간여를 대기, 다시 프라하를 향해 날아가야 하는 긴 여정... 하지만, 여행이란 늘 그렇듯 설레임과 기대로 부풀어 들뜬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종철씨가 태워다줘서 편하게 공항에 도착... 이제, 드디어 '신혼여행' 이라는 걸 한번 떠나가 볼까요...

 

비행기 안이다... 난 거의 사망 수준이었는데 남편께서는 영화도 두 편 다 보고 음악도 듣고 잘 버티며 갔다... 확실히 결혼식이라는 것은 피곤한 거다. 이렇게 비몽사몽 상태로 11시간을 갔으니... ㅋㅋ 이게 누렇게 뜬 내 모습이다... 이 와중에 나름 찍어보겠다고 애썼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프라하로 가기 위해 4시간 동안 대기 중이다... 간단하게 쇼핑센터 구경도 하고, 카메라 메모리도 하나 샀다. 그래도 명색이 독일이니 맥주도 한잔 마셔주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남편께서는 공항에서 산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열심히 읽고 계신다. 두 권짜리 책인데, 아직 1권의 반도 못 읽었다. ㅋㅋ

 

호텔이 위치해 있던 홀레쇼비츠 지하철역... 이제 드디어 첫날 투어를 하러 나가는 길이다. 남편, 아주 신나셨다... ㅋㅋ

 

바츨라프 광장이다... 바츨라프는 체코의 왕으로서, 체코라는 국가의 형성에 아주 혁혁한 공을 세운 위대한 왕으로 추앙 받고 있다. 저 기마상이 바츨라프 기마상... 아침 9시 가보니 수많은 가이드와 관광객들이 투어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뒤로 보이는 건물은 프라하 국립박물관... 박물관에 관심 많은 남편은 매우 들어가보고 싶어했으나, 정말 별 거 없고 돈 아깝다는 가이드의 충고에 포기했다. 바다가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주로 바다와 관련한 생물들의 자료가 관리되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가이드의 말을 꼭 들어야만 했을까 싶기도 하다. 가이드도 엄연히 자기 취향이 있는 건데 너무 곧이 곧대로 믿었던 건 아니었을까...?

어쨌든 여기에서 우리 부부 이외에 함께 투어할 가족을 만났다. 벨기에에서 건너온 부부와 아들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는데 원래 생활 터전은 미국이고, 지금 잠시 벨기에에 근무하러 와 있다고 한다. 유럽에 온 김에 유럽 일주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데, 쩜매 부러웠다. 쩝... 이제 하루짜리 프라하 시내 투어가 시작됐다...

 

국립박물관 건물 앞 인도 바닥에서 이상한 구조물을 발견했다. 나무 십자가가 완만한 곡선으로 휘어진 채, 돌바닥 사이에 묻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남편께서 열심히 책을 뒤지며 혹시나 설명이 있는지 열심히 찾고 있다. 끝내 못 찾아서, 나중에 가이드에게 물어보자며 다시 바츨라프 기마상으로 내려왔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내려오며 내가 남편에게 "분신 자살"에 대해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가이드의 설명을 통해 위에서 본 구조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프라하의 봄' 때, 체코의 민주화를 외치며 국립박물관 입구에서 온몸에 불을 붙인 채 한 청년이 계단을 걸어 내려와 쓰러진 자리에 위에 있는 십자가 구조물을 만든 것이다. 온몸에 불을 붙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고 한다.

그 뒤로, 일년 후 또 다른 청년이 똑같은 방식으로 체코의 민주화를 외치며 분신 자살을 했고, 이에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바츨라프 기마상 아래쪽에 오른쪽과 같은 추모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전태일 열사도 생각나고, 철들고 나서 겪었던 많은 분신 자살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살을 태우고 뼈를 태우는 고통만큼 충분히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 주었을까?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했다...

트램을 타고 프라하성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 트램은 체코에서 자체 개발한 트램으로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선전을 한 신형 트램이라고 한다. 칸과 칸이 나뉘는 부분에 서 있다가 커브돌 때 낑겨 죽는 줄 알았다. ㅋㅋ 저, 흰 모자가 가이드 청년이다.

 

프라하성 입구의 전면/후면이다. 생각보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는 성문이다. 이 성문을 통과한 후문 뒤쪽을 배경으로 다시 찍어 보았다. 뒤에서 보니, 그제서야 성문이 겪어온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가 있다... 프라하 성문이 어찌 되었건, 우리 남편은 신났다. ㅋㅋ

 

프라하성문을 통과하자마자 보이는 수도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금욕주의 수도원으로 실제 미사가 열리는 수도원이다. 섬세한 조각들과 황금 장식들이 아주 인상적인 건물이다.

 

실제로 수도원에서 생활하시는 신부님이시다... 하얀 옷이 아주 인상적이다. 게다가 얼굴도 팀 로빈스를 닮았다. 뿌히힛.

 

미사를 끝내고 나오는 남자들에게는 나이를 막론하고 저런 막대기가 하나씩 들려 있다. 저 막대기로 여자들의 엉덩이를 때린다. 부활절 풍습 중 하나라는데, 여자들의 엉덩이를 때려주면 사악한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간대나 뭐래나... 저렇게 남자들이 때려주면, 여자들은 고맙다고 사탕이나 계란을 준다. 나이 어린 꼬마들은 사탕 한번 얻어보겠다고 여자들 엉덩이를 때리고 다니느라 정신 못차리고 있었다. ㅋㅋ

 

수도원 내부다... 사진 찍지 말라는 표시가 있었지만, 모두들 플래쉬를 터뜨리지 않은 채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찍었다. 남편도 동조했다. 근데, 함께 투어를 받은 아줌마가 사진 찍지 말라고 되어 있다며 한소리 했다. 우리 남편 용감하게, "다들 찍는데요?" 라고 대꾸했다. 뿌히힛.

 

프라하 성의 전망대... 빨간 지붕의 낮은 건물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는 프라하... 다른 유럽의 도시들에 비해 좀더 아기자기하고, 파스텔 톤의 건물 색 또한 너무 이쁘다. 바람이 좀 많이 불어서 머리가 수습이 안 되었다는 걸 빼고는, 하늘이며 기온이며 너무나도 완벽한 날씨였다.

 

로레타 성당을 배경으로... 첫번째 사진 왼쪽의 동상은 체코의 2대 대통령의 동상이다. 굉장히 불행했던 대통령으로, 임기 내내 고생하고, 퇴임과 복직을 반복했던 대통령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동상도 무척 우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어떤 사람의 대저택이었다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쩝.

 

프라하 성의 근위병 교대식. 매 정오마다 이루어지는 교대식을 보기 위해 프라하성 대통령궁 앞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 가이드의 잔머리 덕분에 우리는 저기서 걸어오는 근위병들의 뒤꽁무니에 붙어 따라갔다. 사람들이 당연히 근위병들을 위한 길을 열어주고, 우리는 그 꽁무니에서 계속 따라가 결국 정문 바로 앞에 아주 편하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뿌하핫. 정문 위를 장식한 섬세한 황금 문양 속에도 한때 체코를 지배했던 오스트리아의 상징적인 문양이 들어 있다. 정확히 뭐였는지는 기억 안 난다. ^^;;

 

프라하성의 대통령궁을 지키고 있는 근위병이다.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곁으로 가서 사진을 찍는데 전혀 표정 변화도 없고 움직임도 없다. 누군가 지나치게 접근하거나, 직접 건드리거나 하면 들고 있는 총으로 바닥을 '쾅!' 내리찍어서 물러서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가이드 왈, 한국의 스튜어디스같은 예쁜 여자들이 오면 옆에 가서 팔짱을 껴도 가만히 있고, 심지어는 힐끗힐끗 곁눈질로 보기도 한다고... 남편께서 자꾸 옆으로 더 가보라고 했지만, 행여 총을 콱 내리 꽂을까봐 소심한 A형은 그냥 저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ㅋㅋ

 

근위병이 지키고 있는 대통령궁 정문 양쪽에는 저렇게 황금관을 쓴 사자와 독수리상이 있다. 사자와 독수리는 각각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체코가 오랜 기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를 받았음을 알려주는 조각이다. 또한, 몽둥이와 칼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조각도 오스트리아와 체코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조각으로, 둘다 가해자는 오스트리아, 피해자는 체코를 상징하는 조각이다. 가까이서 보면 체코인의 눈동자는 빠진 채 조각되어 약간 공포스러운 느낌을 준다. 체코로서는 정말 치욕적인 조각이지만, 이것 또한 체코의 역사이므로 절대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궁 맞은 편에는 동상 하나가 대통령궁을 노려보며 서 있다. 동상의 주인공은 '토마스 마사릭' 이라는 체코의 초대 대통령으로 체코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 죽어서도 후대 사람들이 정치를 잘하는 지 못하는 지 지켜보기 위해 저 자리에 저런 방향으로 동상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나야 체코의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니 진짜 훌륭한 대통령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판단할 길 없지만, 그래도 저런 유언을 남길 정도라면 굉장한 애국자는 맞는 듯...

 

 

 

근위병 교대식이 있었던 제1정원을 지나, 제2정원으로 가는 문이다.

저문 역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의 흔적이남아 있는 조형물로 저 가운데 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합스부르크가의 권위를 우러르고 복종함을 의미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저 옆에 있는 좁은 문으로 지나갔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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