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지 (지은이) | 푸른숲 | 2009-09-21 | 초판출간 2009년


보통 사람들이 우리 나라와 선진국을 비교할 때, 비교가 되는 나라들은 뻔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그러다, 요즘엔 북유럽 국가들이 종종 등장한다. 발전된 자본주의, 산업의 발달을 비교할 때는 주로 미국이나 영국이 언급되는 것 같고, 민주주의나 정치 제도, 사회보장제도 등이 주제일 때는 독일과 프랑스가 주로 언급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프랑스나 독일은 비교적 리버럴하고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막연한 동경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 같다. 나에게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어서, 가끔은 내가 그곳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고, 내 아이들이 그런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드는 느낌은 어느 사회나 겉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실제로 겪는 것 사이의 간극은 굉장히 크다는 것이다. 물론, 그 나라들이 알고 보니 정말 후졌더라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어느 나라도 세계사의 흐름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고, 특히 요즘같이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세상에서는 더더욱 사회 내부의 갈등 요인이라는 것이 한 국가에만 국한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족 혹은 인종 간의 갈등, 세대 갈등, 교육 이슈, 빈부 갈등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하나도 없으며, 그 정도와 양상이 다를 뿐 결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여러 갈등과 논쟁, 그리고 크고 작은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를 통해 역사는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보통 과거사 청산 혹은 역사적 잘못에 대한 사죄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일본과 독일을 종종 비교한다. 모든 역사적 잘못을 부인하고 합리화하는 일본과 총리가 폴란드에 가서 무릎을 꿇는 행위까지 해가면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는 독일을 비교하며 일본을 꾸짖곤 한다. 하지만 독일 내부에서도 일본의 우익 못지 않게, 신나치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왜 우리가 이렇게까지 반성해야 하는가, 도대체 언제까지 반성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선조들이 잘못했는데 왜 우리까지 속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와 이웃한 나라가 아니고,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나라여서인지 몰라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국가들이나 유태인들이 들으면 공분을 살 만한 발언들이 종종 공개적으로 표출되거나 일상적인 사람들의 대화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다소 의외였다. 나는 정말 그들이 뛰어난 민족성을 지녔다고 생각했고, 정말 과거에 대해 참회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100%는 아닐지라도 98% 쯤은 말이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결국 우리도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지었고,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속죄를 하고 있는 지 생각해 보게 됐다. 우리는 베트남에게 공식적으로 사죄를 하지도 않으면서, 일본에게만 앙앙대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정말 생각해 볼 일이다.

외국인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나라의 큰 사회적 이슈 중 하나인 다문화 가정과 관련한 문제를 그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겪고 있다. 그들의 경우는 터키인인데, 경기가 상승기조이고 노동력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그들을 필요로 해놓고, 통독 이후 경기가 바닥을 치면서부터는 그들로 인해 국내 고용 상황이 더 나빠지고,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사회적 보장을 똑같이 누리는 바람에 오히려 독일인들이 피해를 본다며 그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모습은 내가 상상하고 있던 독일 사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독일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선민의식이, 그곳에서 반평생이 넘게 살아온 한국인을 이방인 취급하고 차별하는 것으로 표출되는 상황이라니...

전반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결국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인 일들을 가지고 우리 국민들을 탓할 것도 아니요, 괜시리 선진국이라는 데를 갖다 붙여서 비교하며 나무랄 일도 아니다. 물론, 우리보다 조금 더 앞서 나가 있는 나라들을 살펴 배울 것은 배워야 하는 게 맞겠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선망의 대상으로 삼거나, 우리를 비하하는 일은 없어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한국인 여자와 독일인 남자가 만나 이룬 가정은 여러 면에서 특별했다. 늘 환경을 생각하기에 차를 소유하지도 않고, 일상적인 곳에서 양심을 지켜나가며, 아이들에 관한 한 무한 신뢰를 보낸다. 그렇기에 늘 행복할 수 있었고, 늘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며, 아이들은 기대 이상으로 바르게 커주었다. 과연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나도 환경을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내몸 편한 걸 일단 우선으로 삼는다. 그래서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곳도 귀찮다고 차를 몰고 나설 때도 많다. 열심히 기부도 하고 나누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돈 내는 걸로 스스로 만족할 뿐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을 인용한다면,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충분히 가고 있지만, 문제는 가슴에서 발까지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이들에 대해서도 아직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께 가서 "우리 아이들은 성적이 좋진 않지만, 성격이 좋은 아이들이니 괜찮다."고 얘기할 수 있는 당당함이 부럽다. 열두살 된 딸아이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1년 이상 사귀게 되면 내년에 둘이 같이 캠핑을 가서 자고 오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그러라고 대답해줄 수 있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엄마 아빠는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콘돔의 갯수를 알지 못하니, 언제든 필요할 때 쓰라고 고등학생 딸에게 얘기해줄 수 있는 부모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아들에게 단한번도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는 부모는 또 얼마나 될까? 

여러 면에서 내가 본받아야 할 삶을 살고 있는 저자를 보며, 이 책을 읽는 내내 반성하고 또 반성하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에 단순히 환경과 관련한 책이겠거니 생각하고 집어 들었다가,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됐다. 올바른 부모 되기, 환경을 생각하기, 교육제도에 대한 고민, 인종과 민족 문제, 부부 간의 사랑 등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마주하는 저자를 보면서 나는 나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고 있는 지, 어떤 생각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지, 이 땅에서 올바른 지성인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는 지 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저자가 말한 대로 '세상은 앞에서 활약하는 주연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배경을 이루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므로, 든든한 배경이 되기 위해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도록 노력해야겠다.


(본문 중에서...)

세상은 앞에서 활약하는 주연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배경을 이루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주연이 아님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이 '배경'의 위력을 항상 생각하며 '좋은 배경'이 되겠다는 뜻으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씨를 뿌리며 사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기로 했다. 티끌인 나에게 태산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p.71)


무기 수출국인 독일에서 내가 290유로나 빼돌려 피해자 어린이들의 의족을 마련하는 사업에 힘을 보탰으니 얼마나 장한가? 당장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하는 일이 바로 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기쁨 아니겠는가? 사회가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변치 않는 나의 가치를 확인한 것, 이것이 인생의 횡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p.77)


우리 아이들은 학교 성적은 그저 그래도 영재임에 틀림없다. 학교라는 거대한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적성이 비슷한 아빠를 따라 도약하는 아들, 취향이 다른 부모 밑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딸, 자긍심 지수를 학교 점수와 동일시하지 않는 현명함, 이런 점들이 모두 우이아이들이 영재라는 증거다.(p.81)


아이들 나이가 십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우리 부부는 그나마 쥐고 있던 고삐도 늦추고 느긋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어른이라고 우리가 더 잘하느 것도 없으면서,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들을 과소평가하고 참견하는 일이 낯간지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 곁에 친구처럼 있어줄 뿐이다.(p.96)


"그럼 앞으로는 당신만 먹어. 다른 사람들까지 먹을 필요는 없잖아. 바다 생선 안 먹고도 잘 살아온 사람들까지 맛을 들여 엄청나게 먹어대니 씨가 안 마르겠어? 정작 생선에 의지해온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빼앗긴 셈이고 말이야. 그건 변태야."


"공부도 안 끝난 애가 임신하면 어떡해? 그애 인생은 어떻게 되고?""인생이 어떻게 되긴? 우리 아직 건강하겠다, 부모가 힘껏 도와줄만 한데 아기 키우면서 공부하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그런 걸로 사람 인생 안 망쳐. 그런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우울증이나 마약 같은 마음의 병이야. 그건 부모가 암만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잖아."


동독인들은 통일 이후에 자신들도 당연히 누릴 줄 알았던 부와 안정 대신 실업과 상실감만 맛보았고, 자신들의 독일의 이등 국민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피해 의식을 가진 사람일수록 발아래를 살펴 자기도 밟을 자가 없는 지를 찾게 되는 법인지, 이렇게 해서 동독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야만적인 수난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p.177)


나는 모든 사회에는 주류가 있고 지성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류는 '주된 흐름'이란 말 그대로 전통을 이어가며 어제와 다름없이, 이웃과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다수이다. 그리고 지성인은 주류의 방향을 잡아주는 소수이다. 지성인은 개인의 양식에 따라 판단하고 이를 용기 있게 표현해 주류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정치권은 주류의 시녀일 따름이고, 주류의 물길을 조정하는 것은 지성인이다.(p.194)


이것은 국민을 속인 정부의 책임이다. 몇백만 외국인들을 돌려보내는 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고 실리적으로 부당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진작 고백하고 거기에 맞는 정책을 세웠어야 했다. 독일 국민에게는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이 손해가 아니라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보탬이라고 가르쳤어야 했고, 외국인들에게는 출신국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독일 사회와 자발적으로 융화할 수 있도록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었어야 했다.(p.228)


인간이 태고에 집단생활을 시작한 것은 생존의 가능성을 높여 종족 보전을 잘하자는 합리적인 이유에서였다. 한 나라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마치 손과 발처럼 긴밀한 공생관계에 있다는 것, 몸의 가장 약한 부분이 사람의 수명을 결정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의치가 곪아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머리가 좋아야 되는 일이지 마음만 착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p.231)


창조적인 인적자원을 매출하기 위해, 즉 기회의 평등과 재능의 개별적인 계발이 좀 더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학생의 인격이 좀 더 존중받는 학교 풍토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독일 사회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고 (핀란드를 모델 삼아) 교육 제도를 꾸준히 개선하고 있다. 학생들은 인적자원이기에 앞서 그들의 유일한 인생을 값지게 살 권리가 있는 영혼들이기에 더욱 그렇다.(p.239)


사람을 쓸데없이 초조하게 만들어 창조적인 사고를 배워야 할 귀중한 시점을 놓치게 만드는 등수 경쟁을 과연 누구에게 이익이 될까? '분할하라. 그리고 지배하라(divide et impera).' 이것은 기원전부터 서구 사회에 전래하는 널리 알려진 병법이다. 적을 따로따로 경쟁시켜 자기네들끼리 힘을 빼게 만든 후에 효율적으로 잡아먹으란 뜻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끼리 자진해서 경쟁이라니?(p.249)


죽음의 고통이 길어서 나쁘다는 건 우리의 생각일 뿐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죽음을 서서히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 게 메를린의 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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