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파리의 미술관은 크게 세 곳으로 대표됩니다. 곳곳에 위치한 소규모 미술관/박물관에도 물론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요.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죠. 이 중 오르세 미술관은 19세기의 작품들을 망라해 놓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2월혁명이 일어난 1848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4년까지의 작품들인 거죠. 이 이전의 작품은 루브르에, 이 이후의 작품은 퐁피두에 전시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1804년 최고재판소로 지어진 건물로 오르세궁이라 불렸으나 불타 버리고, 1900년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파리국립미술학교 건축학 교수였던 빅토르 랄로에 의하여 오르세역으로 다시 지어졌다. 현대적으로 지은 역사(驛舍)였으나 1939년 문을 닫게 된 이후 방치되었다가 1979년에 현재의 미술관 형태로 실내 건축과 박물관 내부가 변경되어 1986년 12월 ‘오르세미술관’으로 개관되었다. [출처] 오르세미술관 | 두산백과"

오르세궁이 불타 버린 후에는 도심의 공원으로 사람들이 이용했다고 합니다. 제대로 갖춰진 공원은 아니었으나, 폐허가 되어버린 궁터와 그 틈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들이 나름 분위기 있는 광경을 제공했다고 해요. 그러다가, 오를레앙 철도공사의 제안으로 철도역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때 만국박람회에 맞추느라 엄청난 공기단축을 감행했다고 하네요. 이후 다시 방치되었다가 미술관으로 바뀝니다. 

19세기의 회화 작품이 주가 되다 보니,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았던 낯익은 그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많은 경우 루브르보다는 오르세에 대한 기억을 더 좋게 가진 사람들이 많더군요. 이번에도 그런 낯익은 그림들을 만나서 반가웠던 반면, 지난번에 갔을 땐 그닥 눈에 보이지 않던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그 감동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정리해 봅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마네, 모네, 고흐, 고갱, 밀레, 세잔, 르느와르, 드가... 등은 skip 입니다. 


#1.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 1845-1924), 카인(Cain)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잘 아는 카인과 아벨의 바로 그 카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두 형제인데, 가인이 질투로 인해 아벨을 죽이고, 쫓겨나게 되죠. 이 그림의 가장 앞에 선 사람이 카인입니다. 카인의 죄악으로 인한 기나긴 고생의 나날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인물 하나하나에 고단한 삶의 흔적들이 보이는 그림인데, 사이즈가 굉장히 커서 보는 순간 바로 압도 되어 버리더군요. 캔버스에 유채 그림이고 사이즈는 308 x 700cm 입니다. 1880년 작품입니다.


#2.

토니 로베르 플뢰리(Tony Robert-Fleury), 코린트의 마지막 날 (기원전 146년) (Le dernier jour de Corinthe (146 avant J.C.))

배경은 전쟁이에요. 코린트면 성경의 고린도인데, 성경 상의 어떤 사건은 좀 아닌 것 같아요. 코린트는 그리스 중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도시입니다. BC 8세기 경에 도시 국가가 완성되었고, 부를 누리며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도 나오듯 물질적인 번영과 함께 타락도 동반했던 것 같네요. 여튼, 중세 후기에 이르면서 쇠퇴하다가 1458년 터키에 정복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로 보면, 아마 터키에 정복될 당시의 모습을 그린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추측을 해봅니다만, 아무리 검색을 해도 이 그림과 관련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네요. 

여튼, 이 그림을 보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군인들이 진군해오는 상태에 여인과 아이들은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입니다. 한쪽 구석에서는 겁탈당하는 장면도 묘사되어 있고,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여인들, 숨어 있는 여인, 그저 괴로워하는 여인, 아이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인, 죽은 것 같은 아이를 올려놓고 망연자실한 여인, 그리고 이미 쓰러진 남자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너무나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눈물이 찡할 정도로요... 이 그림은 리얼한 현장 포착의 보도 사진보다 더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캔버스에 유채 그림이고 사이즈는 400 x 600cm 입니다. 19세기경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3.

레옹 프레데릭(Leon Frederic), 노동자의 시기들(Les âges de l'ouvrier, triptyque)

이 사람은 벨기에의 화가구요, 세쪽으로 나누어져 그려진 그림입니다. 인체의 명암표현이 선명하게 대비되도록 표현을 한 게 특이해요. 제일 왼쪽엔 힘든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그려져 있고, 제일 오른쪽은 아기를 돌보고 있는 엄마들, 그리고 가운데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제목이 노동자의 시기라는 것은 이 세 폭에 주로 등장하는 연령대의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 되어버리나요? 예전엔, 아이들을 그저 '작은 사람'으로만 보았다는 걸 이 그림에서도 알 수 있는 것 같네요. 저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가운데 중앙에 장례식의 행렬이 있어요. 결국 우리 모두는 저 길로 간다는 걸 얘기해주는 것 같아요. 어쨌든, 이 그림 또한 표현 방식의 강렬함과 리얼리즘으로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캔버스에 유채 그림이고 사이즈는 163 x 93.5cm, 1895~1897


#4.

루이스 어니스트 바리아스(Louis Ernest Barrias), 과학의 등장으로 베일을 벗는 자연(Nature Unveiling Herself to Science)

이번엔 조각인데요... 밑의 부분별 확대 사진을 다시 한번 보세요... 정말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돌로 저런 곡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정말 살아 있는 여성 같은 따뜻함과, 색색의 돌들로 이루어진 옷과 장신구. 

와우~~ 정말 환상적입니다... 청록색 보석과 푸른색의 띠까지!

발끝으로 흘러내리는 드레스의 우아한 자연스러움!

금방 나를 쳐다보며 웃어줄 것만 같은 느낌, 스르륵 저 매듭이 풀어지며 사뿐히 걸어 내려올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지 않나요?

제목이 좀 특이하다 했는데, 1889년 보르도의 의학 대학이 생기며, 장식용으로 의뢰된 조각이라고 합니다. 의학과 과학, 자연, 인체... 조각이 은유하는 것이 무엇일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이날 처음 봤는데, 너무나도 유명한 조각이라 장식용으로 굉장히 많은 모조품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멋집니다. 높이 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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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부터는 귀스타프 쿠르베(Gustave Courbet)의 그림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빠져든 화가죠. 사실주의 화가로서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한번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말해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오로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그대로 표현을 하죠. 하지만, 화가의 개인적인 감성이 반영되지 않을 순 없겠죠. 쿠르베 그림의 분위기와 소재, 그리고 그림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들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름 부유하게 태어나 부모님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파리 혁명 당시에는 민중들의 편에서 싸우기도 했던 사람이구요. 


#5.

화가의 작업실(The Painter's Studio; A Real Allegory), 361 x 598cm

1855년 국제박람회에 출품했다가 거절당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도 매우 큰 작품인데, 작품의 사이즈도 거절의 이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쿠르베는 인물을 사실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실제 인물만큼은 커야 한다고 생각했기 대문에 큰 작품을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 속의 화가는 자기 자신입니다. 나체 모델이 하나 서 있고, 어린 아이가 있죠. 그림 해설에서는 모델은 '진실', 아이는 '창조'를 은유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게 쿠르베가 한 말인지 사람들이 갖다 붙인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른쪽에는 지식인들, 상류층 사람들, 화가의 후견인 그룹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매우 밝고 자유스러운 느낌입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현실을 대변하는 민중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배고픔, 가난, 추위 등 곤궁한 현실인 거죠. 사회는 그렇게 양분되어 있었지만, 자신은 중간에서 양쪽을 매개함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6.

폭풍우가 지나간 에트르타 절벽 (La falaise d'Etretat après l'orage), 133 x 162cm

프랑스의 서쪽 노르망디 해변의 에트르타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세번째 날 여행기에서 실제 사진을 첨부하겠지만, 정말 이것과 '똑같습니다'. 모네도 이 해안을 좋아해서 에트르타를 그린 그림이 많이 있는데, 모네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더더욱 쿠르베가 왜 사실주의 화가인 지, 모네는 왜 인상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 너무 좋아요...^^


클로드 모네,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


실제 에트르타 해변의 코끼리 바위


#7.

수원지(The Source), 128 x 97cm

쿠르베의 그림 중에 누드화가 꽤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여인의 몸은 고대로부터 이어진 화법 그대로 절대적 미를 갖춘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 주류였다고 합니다. 매끈한 피부, 완벽한 균형 등으로 대표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런 몸을 가진 여인이 실제로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것은 사실주의에 어긋나는 것이죠. 그래서 쿠르베는 반기를 들고 여인의 나체를 그립니다. 이 작품에서 보듯이 말이죠. 한눈에 봐도 77사이즈 이상은 되어 보이는 저 풍만한 중부지방을 보고 누가 완벽한 여인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까. 특히 전통적인 그림만 보아오던 사람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겠죠. 미술계에서는 이걸 반항적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전시회장을 방문했던 나폴레옹 3세는 이 그림으로 인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들고 있던 승마용 채찍으로 화면을 내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네요. ㅋㅋㅋ


#8.

오르낭의 매장(A Burial at Ornans), 314 x 663cm

1849년에 오르낭에 머물며 그리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위해 실제 마을의 대다수가 모델을 자처했다고 하네요. 사실주의 작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실제 인물을 하나하나를 모델로 하여 그림을 구성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모델이 되었기 때문에 무척 뿌듯해 했으나, 정작 1850-1851 살롱전에서는 무시 당했습니다. 그림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저는 그저 사실적인 묘사 자체가 참 마음에 듭니다. 전체적으로 장례식다운 어둡고 깊은 톤 속에서, 각 인물들의 표정이 다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다 똑같은 감정으로 슬퍼하지 않는 곳이 장례식이쟎아요. 그래서 마음에 듭니다. 사이즈를 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큰 그림이지요. 오르세에서도 벽면 전체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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