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지은이) | 김희정 (옮긴이) | 부키 | 2014-07-08


나쁜 사마리아인부터 시작해서 장하준이 쓴 책은 꼭 사서 보는 편이다. 사실, 이 책은 살까 말까에 대해서 다소 고민을 했는데, 일단 제목이 경제학 강의라 하니 왠지 따분할 것 같았고, 다분히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이나 23가지 같은 경우는 현재 우리 경제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그에 대해서 나름의 대안을 내놓으며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주는 책이었다고 본다면, 그에 비해 그냥 따분한 강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이 책 역시, 경제학강의의 형식을 빌었을 뿐 자신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현실 세계의 진단에 대한 책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굉장히 객관적인 척하지만, 알게 모르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그게 보기 싫다거나 어색하지도 않다. 당연히 책이란, 저자의 가치관이 반영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100% 객관적으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서술된 책이라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심지어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국정교과서'라는 것 조차도 일부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술되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어찌 보면, 그 동안 장하준 교수가 주장하던 바가 이 사람의 영감에 의해 그냥 어느 순간 툭 튀어나온(갑툭튀) 것이 아니라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깊이 파고들어가, 끊임 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 속에서 얻어진 식견이라는 것을 강조해주는 책이라고 보는 게 옳을 듯 싶다. 더불어서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 또한 부가적으로 얻을 수 있는...

내용 또한 전혀 어렵지 않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두꺼워서 시간은 좀 걸리긴 했지만 피케티의 자본에 비한다면야 새발의 피.^^ 수혁이가 중학생 쯤 되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책장에 꽂아두고 시간 될 때마다 조금씩 다시 펴보고 싶은 그런 책이다. 아이와 함께 공부하려면 더더욱.


정혜윤 (지은이) | 푸른숲 | 2008-07-07 | 초판출간 2008년


내가 책에 대해서 나름 집착을 하는 이유는 콤플렉스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어렸을 때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아이가 아니었다. 책보다는 그냥 나가서 뛰어 놀고,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게 훨씬 더 즐겁고 행복했고, 중학교 이후의 사춘기 무렵에는 그저 학교와 시험공부 이외에는 오로지 교회에 모든 시간을 바쳤으니, 책 읽을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다행히, 내가 대학에 가던 시기까지는 그렇게 문학적 소양이 높지 않아도,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과 선생님들이 추천하는 일부의 문학작품만 읽어주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을 때였고, 그저 온몸으로 노는 것에만 몰중하던 나도 다행히 대학이라는 걸 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 은연 중에 나의 '무식함'에 대해서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와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정말 천재 아닌가 싶을 정도로 뛰어난 지력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고, 범접할 수 없는 언변으로 무장한 사람들도 있었고,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독서편력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학교 공부를 나보다 잘한 사람들이야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고 말이다. 

그리고 선배들과 세미나 같은 걸 할 때면 더더욱 난감했다. 그냥 문자 그대로 '읽고'만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고, '비판적 사고' 따윈 애초에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때까지 나는, 나에게 부족한 것이 '창의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본적인 '사고력'  또한 부족했던 것이다.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책 읽고, 책에서 말하는 거 다 믿어버리기. 그래서 세미나를 하면 난 늘 벙어리로 변하곤 했었다. 

그런 무식한 나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일단 '다독'이라도 해봐야겠다 싶어서 읽기 시작한 책들... 그래서 어쩌면 난 책에 관한 한 늦바람이 난 케이스라고 볼 수가 있다. 어쩌면, 아직도 '다독'의 스타일에서 벗어났다고 보긴 어려울 때가 있지만, 그래도 이젠 이렇게라도 기록을 남기고, 읽다가 어떤 대목에 줄도 치고, 나름 합리적인 의심을 품어보기도 하면서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젠 '책읽기' 자체가 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음을 느끼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냥' 읽는 경우가 많을 때가 있는 초심자라고나 할까.

이 책은 여러 사람들의 인생과 책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기들 스스로가 책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들의 인생에서 책이 차지하는 자리가 어떠할 지는 충분히 짐작이 될 수 있을 터. 그만큼, 그 사람들은 책을 읽으며 인생을 배웠고, 책 속에서 세상을 발견하고, 자아를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만큼, 아주 어릴 적부터 책은 그 사람들의 인생과 동일한 단어가 되었고, 그렇기에 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책들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욕심 같아서는 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그 책들을 나도 다 읽어보고 싶지만, 그건 그냥 그 사람들의 인생을 다시 한번 더 들여다보고픈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아서 조용히 책을 덮었다. 나도 나만의 책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 책들이 나의 삶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끔씩 누군가가 쓴 글을 볼 때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이 사람들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궁금해 할 만한 인물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이 책과 함께 어떤 길을 걸어왔는 지 보여주기 때문에 즐겁게 읽을 수 있고,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추천 목록을 만나서 기분 좋고, 그 사람들의 인생을 통해서 나에게 지적 자극을 주니 고마운, 그런 책이다. 지금보다 좀 더 '사색'을 더해가며 책을 읽어 보리라. 읽는 만큼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 보리라...

윤태호 | 하종강 | 김현수 | 최혁진 | 고원형 | 강도현 | 송인수 (지은이) | 시사IN북 | 2014-06-25


정혁이를 임신했을 때였다. 회사에서 그룹차원의 행사가 있어서 이천에 있는 연수원에 가서 1박 2일을 하고 왔다. 그 행사의 마지막은 늘 연예인 초청 공연. 그날의 마지막 공연은 윤도현 밴드였다!!! 복권 당첨과 같은 기쁨을 느끼며 그 시간을 학수고대했으나, 8개월의 배를 내밀고 펄쩍펄쩍 뛰며 공연을 즐기기에는 무리였다. 그저 아쉬운 마음 달래며 의자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야광봉 흔드는 데에 만족할 뿐... 

공연이 너무 감동적이어서였을까. 갑자기 내 아이들이 나중에 윤도현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뜬금 없는 생각이긴 했는데, 윤도현같은 뮤지션이 되기를 바란다기보다, 그냥 저렇게 자기가 정말 좋아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랄까. 전혀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행사에 의무감 하나로 끌려 와서 앉아 있던 나와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부러움을 느껴셔였을 수도 있겠다. 자리에 앉아서도 공연이 끝난 후 임원들의 가실 일을 걱정하고, 대리기사들 연락처를 챙겨야 하는 내가 바라본 윤도현은 '자유' 그 자체였다. 그는 그 순간에라도 훨훨 날아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여겨졌다. 

그 때부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늘 소망했었다. 이 아이들이 수학문제 더 잘 풀고, 영어 단어 더 외우는 데에 절대 연연하지 않으리라. 이 아이들이 정말 자신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 지 발견할 수 있도록 도우리라... 하지만, 나 또한 이제 이 사회의 기성 세대가 되고, 근심만 잔뜩 짊어진 부모가 되다보니 마지막 한 가지 걱정은 덜어내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것은 바로 '먹고 사는 것'. 워낙 먹고 사는 게 쉽지 않은 세상이라 88만원 세대, 3포세대 등 신조어까지 등장하는 상황이다보니 애들이 자기들 밥벌이라도 하려면, 그래도 공부는 좀 잘하도록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곤 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게 다 무어야, 일단 안정적인 밥벌이가 최고 아닐까 하는 꼰대적 발상이라고나 할까. 

물론, 이 책이 그에 대한 속시원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나 자신에 대해서 다짐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할 수 있고, 그 어떤 것이든 열심히 하고 최고가 된다면 돈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 며칠 전 TV에서 보았던 힐링캠프에서 어느 탤런트도 그 말을 했다. "돈을 쫓아다녔더니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최고가 되면 돈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을...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최고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니 먹고 살 수 있게 되더라..." 

무엇보다, 사회가 조금씩 나아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도 궁상맞게 보이지 않고, 돈을 조금 적게 번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지 않을 수 있기를. 돈이라는 기준으로 손가락질 하는 세상이 되지 않기를. 자기가 버는 돈 만큼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세상이 아닌, 사람의 크기만큼 대접받는 세상이 되기를. 돈을 적게 가졌다고 해서 부당하게 차별받지 않기를... 나 또한, 세상이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아이가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명예를 얻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기를.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저 말 없이 뒤에서 응원해 줄 수 있기를...

이 책이 의미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Second Life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되었고, 그 고민의 기준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 지도 정리해볼 수 있게 되었다. 대안학교,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등 병들어가고 있는 지금의 사회를 회복시킬 수 있는 다양한 영역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귀중한 경험이었다. 


[본문 중에서...]

"시험 성적과 등수로 경쟁하지 않는데 학생들이 공부를 할까요?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도록 가르치면 됩니다. 등수 개념이 없는데도 우리나라보다 학업성취도 평가가 높게 나오기도 합니다. 독일은 아예 학업성취도 평가를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한때 '세계 최고의 교육'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렇게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이 결국 히틀러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는 반성으로부터 새로운 교육을 시작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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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승자뿐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체에 유익하려면 두 가지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그 경쟁이 공정해야 합니다. 핀란드 교육의 특징은 한마디로 극단적인 평준화입니다. 우리 나라로 치면 강남 8학군 학교나 저 시골 분교나 학교 시설, 교사 수준, 수업 내용 모두가 극단적으로 균일하다는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부잣집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남보다 유리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없앤 겁니다. 

두 번째, 탈락자에게 계속 패자부활전 기회가 보장되어야 해요. 시험을 봐서 공부 잘하는 1등을 뽑을 수도 있죠. 그러면 나머지 학생들 중에서 노래를 잘하는 학생, 운동을 잘하는 학생, 마음이 따뜻한 학생, 이웃의 불행에 대해 관심이 큰 학생들에게도 1등 기회를 줘야죠. 그래서 한 반 30명 모두가 1등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는 공부를 잘하고, 누구는 노래를 잘하고, 누구는 운동을 잘하고... 이걸 어떻게 비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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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이들의 실패는 없고 학교와 교사의 실패만 있을 뿐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실패가 권리에요. 젊은이들에게 실패는 권리죠. 실패는 우리의 권리고 실수는 기회입니다. 실패와 실수는 우리의 친구예요. 좀 더 정의롭고 훨씬 더 따뜻한 사회라면 실패와 실수를 환영합니다. 청소년과 청년에게 있는 재능을 어떻게든 찾으려고 다 같이 노력해야 해요. 재능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열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아이의 재능을 찾아주는 게 사회가 할 일이고 어른이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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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목에서 장일순 선생님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선생님은 싸구려 다방에 가서 티백녹차를 마셨습니다. 선생님을 찾아온 환경운동가가 티백녹차는 농약이 잔뜩 들어간 것이라고 하자 호통을 치셨어요. 선생님께서는 그 싸구려 다방에서 일하는 분들이 유기농 녹차 이상으로 소중했고, 또 유기농 이전에 농민 자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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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시마 전무는 "협동조합이 자립해야 한다고 하는데 자립이 무슨 뜻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자립은 서로 기대어 서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어요.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은이) | 이은선 (옮긴이) | 문학동네 | 2011-08-17 | 원제 Sarah's Key (2007년)


책을 읽은 지 한달이 지나가는 지금도, 여전히 이 책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하다. 우연치 않게 '누구나 홀로 죽는다' 이후 집어든 책이 또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이라니... 아마,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저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알고 있던 그 사건을 좀 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나치에 외롭게 저항하다 처형된 부부의 이야기를 읽고 우울하던 차에, 왠지 제목이 말랑말랑한 듯 느껴져서 골랐던 이 책이 오히려 나를 더 바닥으로 바닥으로 침잠하게 만들 줄 누가 알았을까. 
배경은 1942년 7월 16일 벨디브 사건. 프랑스의 유대인들이 일제 검거를 당해 벨디브 스테디움으로 끌려갔던 사건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이 사건이 더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건, 독일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프랑스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 프랑스계 유대인을 프랑스 경찰이 나치에 협조하기 위해 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자발적으로 색출해서 아우슈비츠로 보냈다는 점에서, 또한 나치가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학살이 '인종청소'라는 것을 인지한 프랑스 경찰이 많은 수의 아이들을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이것은 독일에서 자행된 홀로코스트보다도 더 비극적일 수밖에 없고, 프랑스로서는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더운 여름날, 어린 네살짜리 동생만 남겨두고 사라는 부모님과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끌려가는 순간에도 그것이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길임을 알지 못한 사라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따라오지 않으려는 동생을 몰래 벽장에 가둬둔다. 누나가 곧 와서 열어주겠다고, 잠깐만 기다리면 된다고 하면서. 늘 거기서 숨바꼭질을 했던 동생은 장난감 몇개와 함께 기꺼이 안에 들어갔고, 그렇게 사라는 부모님과 수용소로 향했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누구나 다 상상할 수 있는 일. 수용소에 가두어진 그들은 음식도 물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한 채, 제대로 된 인간대접도 받지 못한 채, 차에 실려, 열차에 실려 수용소를 전전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빠가 어디론가 끌려가고, 그 다음엔 아이와 엄마를 억지로 떼어놓은 채 엄마들만 다시 열차에 태워진 채 끌려가게 된다. 그 열차의 종착지는 바로 아우슈비츠. 천신만고 끝에 그 수용소를 탈출하게 된 사라와 동생을 구출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 그 힘든 수용소 생활 속에서도 동생이 숨어 있는 벽장의 청동 열쇠를 손에서 놓치 못한 사라의 애타는 사랑은 보는 내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한다. 더군다가, 그 동생의 나이가 바로 우리 아이들이 또래이다보니 여러가지를 상상하게 되고, 그 이쁜 모습을 떠올리다보면 사라가 느꼈을 그 안타까움이 바로 나에게 전해져와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이 들었다.
그 당시에 흔히 있었을 한 유대인 가족의 비극적인 사건이 다시 되살아나게 된 건 바로 미국계 프랑스인인 기자에 의해서였다. 우연치 않게 벨디브 사건을 취재하면서, 남편의 가족이 그 사건과 얽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그녀의 노력 또한 눈물 겹다. 한편으로는 그 기자는 그 사건과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녀의 남편 또한 전혀 상관이 없고, 다만 그녀의 시부모님과 시조부모님이 무언가 관계가 있다는 심증에서 시작된 일이기에, 그리고 그것을 더이상 캐묻지 않기를 바라는 무언의 압력이 있었기에, 그 기자는 굳이 그것을 캐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진실을 파헤치게 만든 것은 바로 역사에 대한 기억이었다.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에 내가 간접적으로라도 얽히게 되는 한,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고 그래서 '사과'해야만 한다는 어떤 무거운 책임감을 그 사람이 느꼈기 때문이다.
수많은 역사의 비극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프랑스조차도 그 벨디브 사건에 대해서는 꺼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유대인들이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며, 어떤 이들은 외면했고, 어떤 이들은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관심, 방관... 그것이 바로 그런 비극적인 사건을 만들어냈고, 그 비극적인 사건은 아직도 프랑스의 민주주의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90년대가 되어서야 좌파 대통령이었던 시라크 대통령이 그 사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도 그 사과에 대해서 대내외적으로 논란이 많았다는 사실은 자유/민주/평등이라는 자신들의 국가 이념을 자랑스러워하는 프랑스인들조차도 여전히 그 사건의 본질과 책임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 
주인공이 끝까지 원했던 것은 오로지 '내가, 그리고 우리가 잊지 않고 있다는 것. 우리가 너무 미안해 하고 있다는 것'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그 수 많은 목숨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니었을까. 우리가 잊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때의 무관심과 방조를 미안해 하는 것.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마르틴 뉘밀러 목사의 '그들이 내게 왔을 때'라는 시가 떠올랐나보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
First they came

나찌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Kommunist.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가둘 때,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Sozialdemokraten einsperr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Sozialdemokrat.


그들이 노조에게 왔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조가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Gewerkschafter holten,
habe ich nicht protestiert.
ich war ja kein Gewerkschafter.


그들이 유태인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Jud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Jude.


그들이 내게 왔을 때,
아무도 항의해 줄 이가 남아있지 않았다.
Als sie mich holten,
gab es keinen mehr, der protestieren konnte


[본문 중에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뭐하러 기억하겠어? 이 나라의 가장 어두운 과거인걸. (p.119)

일제 검거 때 붙잡혀간 유대인인 줄 이미 알고 계셨다고. 그런데 모르는 척했다고. 그 끔찍했던 1942년에 수많은 파리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냥 모르는 척했다고. 일제검거 때 그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실려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려가는데 모르는 척했다고. 아버지는 심지어 집이 왜 비어 있느냐고, 그 집 식구들이 쓰던 세간은 어떻게 됐느냐고 묻지도 않았다고 하셨지. 다른 사람들처럼 더 넓고 좋은 집으로 옮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거다. 모르는 척하면서. (p.255)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모르고 지내서 미안하다고요. 마흔다섯이나 먹을 때까지 모르고 지내서 미안하다고요." (p.296)

"언니는 한심한 짓을 저지른 거에요. 과거를, 특히 전쟁 중에 벌어졌던 일을 끄집어 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그 때 일을 다시 떠올리고 싶이하는 사람은, 그 때 일을 생각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요." (p.404)

기억할지어다. 절대 잊지 말지어다.

Zakhor. Al Tichkah.

한스 팔라다 (지은이) | 이수연 (옮긴이) | 씨네21북스 | 2013-01-18 | 원제 Jeder Stirbt Fur Sich Allein (1947년)


나치 치하의 독일. 그저 우리는 교과서에서만 몇줄로 배웠을 뿐이고, 간혹 그 시기를 안네의 일기나 홀로코스트 같은 책이나 영화로 그냥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안네의 일기나 홀로코스트 역시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잔혹한 범죄를 대변해줄 뿐, 그 당시를 살아갔던 수많은 독일인들의 삶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독일인'이라는 커다란 집합체로 인식하여 히틀러 정권과 다르지 않은 가해자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여전히 민족감정이란 것이 남아 있어서 독일의 침공을 받았던 주변국들이 스포츠 경기 때 독일에게 보이는 모습이, 우리가 일본에게 보이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닐까. 

이 책은 소설이지만, 실화에 기반을 둔 소설이다. 물론 그 '사실'이라는 것이 공소장에 나온 몇줄의 사건 기록이라 결국에는 작가의 상상력으로부터 만들어진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주인공은 실존 인물이고, 공소장이 나치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면 그 뒤에 숨어 있을 수많은 이야기들은 작가의 상상력보다 더 드라마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쟁에 의해 자식을 잃게 된 두 부부가, 나치를 향한 자기들만의 외롭고도 위험한 투쟁을 시작한다. 그것을 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며 비웃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방에 감시의 눈길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그 정도조차도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는 건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멀지 않은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술 먹고 술 집에서 정권을 욕했다는 이유로, 택시 기사에게 시국의 암담함을 토로했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야만 했던 사람들도 있지 않았는가. 

그 투쟁을 시작하게 된 애초의 동기는 아들의 죽음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알게된 부인이 남편에게 외쳤다. '당신의 총통이 내 아들을 죽였다' 라고. 이 말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 놓았다. 분명히 그들은 총통을 직접 뽑았다. 그들의 손을 뽑은 총통이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리고 자기를 뽑아준 국민들을 감시했고, 그들을 당원이냐 아니냐에 따라 차별하기 시작했으며, 이웃 간에도 서로를 의심하도록, 그리고 서로 무관심하도록 강요했다. 그들은 총통이 그런 방식으로 국가를 지배할 줄 모르고 뽑았지만, 결국 총통은 독재를 통해 수많은 죽음을 불러오고 있었다. 그들은 부자가 될 줄 알았고, 유럽의 강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희망을 가지고 총통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는 공포에 질려서 충성을 다하는 척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총통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지지하였으나 그들의 잘못된 선택을 뒤늦게라도 깨달은 사람들 중에 총통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후일에 발견된 공소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직화되지 않은 투쟁으로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의 투쟁은 과연 헛된 것이었을까? 그 부부가 뿌린 200통이 넘는 엽서는 대다수가 게슈타포에 신고가 되었고, 오직 스무통 정도만 회수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스무통이 나치 독일을 멸망시키는 씨앗이 되었을까? 절대 그럴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 스무통도 안 되는 엽서마저 겁먹은 누군가에 의해 불에 태워지거나 화장실 변기에 쓸려갔거나 그랬을 테니까. 결국 수년에 걸친 그 사람의 투쟁은 아무런 결실 없이 끝나버리게 된 것이다. 그의 투쟁은 과연 무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감옥에서 만난 박사의 입을 빌어서 이렇게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자신에게요.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의로운 인간이었다고 느끼게 될 거니까요. 크방엘 씨는 최소한 악에 저항했습니다. 같이 약해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야만적인 폭력에 맞서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우리가 승자가 될 겁니다."

"우리는 각자 행동했고, 따로 잡혀왔고, 홀로 죽을 겁니다. 하지만 헛된 죽음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괜히, 헛되이 일어나는 일은 없어요."


하지만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런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가, 더이상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불의와 맞닥뜨렸을 때, 자신들의 무지가 불의가 횡행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라면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되는 걸까. 그래도 살아서 그들의 멸망을 지켜보는 것이 더 확실한 저항이 되지 않을까. 그들의 본 낱낱의 사실들을 후세에 알리고 그렇게 해서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무도 읽지 않는 엽서를 만들고 그래서 공소장 몇줄로 기록에 남는 것보다 더 가치 있지 않을까. 그들의 투쟁의 결실이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저자 또한 가상의 경감을 만들어 그나마 그의 투쟁이 완전히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더더욱, 정말 겨우 한 인간의 참회가 그 투쟁이 불러온 유일한 결실이란 말인가...

나는 그 투쟁이 어떤 결실을 맺었고, 어떤 파급효과를 불러왔는 지, 그래서 그들의 투쟁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가치 판단도 내릴 수 없다. 다만, 그들은 분명히 저항했으며, 그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선택을 했을 뿐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 남들이 뭐라든 나는 괴물이 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하나, 최근 두번의 커다란 선거를 오버랩 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히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원했고,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보다는, 조금 더 잘 살게 되기를 바랬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 지는 분명히 역사가 증명해줄 것이다. 당신의 손으로 뽑은 총통이 당신의 아들을 죽인 사회, 그게 바로 나치 독일이었다. 우리라고 그러지 않을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게다가 요즘 같이 공권력이 하찮은 게시판 댓글에까지 지극한 관심을 보이고, 교수나 친구가 빨갱이이인 것 같다고 신고하는 레드컴플렉스가 여전히 만연한 이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과연 우리의 사회는 나치의 독일처럼 되지 않을 꺼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어서 나는 가끔 두렵다.


[본문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는 거예요. 설사 그들이 온 세상을 다 무릎 꿇게 만든다 해도 우리는 나치가 되지 말아야죠!"

"총통이 정말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라면 이런 전쟁은 일으키지 말았어야 했다. 수백만 명을 매일 사지로 몰아넣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위대한 사람일 리가 없다. 그녀는 자신만은 자존심을 지킬 거라고 결심했다. 그러면 바른 처신으로 자존심은 지켰다는 한 가지 성과는 인생에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저에게는 복종해야 할 주인이 있습니다. 그 주인은 저와 부인과 이 세상, 그리고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세상까지도 지배하는 분입니다. 그 주인은 바로 정의입니다.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의를 믿습니다. 그리고 정의만을 제 행동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은 폭력으로 우리를 그들과 같은 생각으로 전향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의 지배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비, 사랑, 정의를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행동해야 했고, 모두 따로따로 잡혀 들어왔고, 모두 혼자 죽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혼자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헛되이 죽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크방엘씨! 그러면 당신은 정의를 위해 죽는 것보다 불의를 위해 살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에게나 나에게나 선태의 여지가 없어요. 우리는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이 길을 걸어야 했던 겁니다."

넬레 노이하우스 (지은이) | 김진아 (옮긴이) | 북로드 | 2011-02-11 | 원제 Schneewittchen muss Sterben


원래 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 회사가 농번기에 접어 들기도 했고 이래저래 머릿속이 정돈되지 않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들 책이 필요했다. 마침, 회사 동료가 재밌다고 권한 책은 이 책의 저자가 쓴 연작, 이름하여 타우누스 시리즈.

그 동료도 이 책이 너무 좋아 시리즈를 모두 구매할 예정이라며, 1권부터 빌려줄 테니 읽어보라고 했다. 정작 넬레 노이하우스를 유명세에 올려 놓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아직 입수하지 못했다고 하기에, 그럼 1권부터 읽어보기로 생각하고 받은 책은 '사랑 받지 못한 여자' (원제 Eine unbeliebte Frau, 2009년).

그리고 정말 빛의 속도로 - 물론 다른 사회과학 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에 비해서 - 읽어내린 후, 연달아서 '너무 친한 친구들', '깊은 상처' 까지 읽었다. 그리고 네 번째 작품인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까지, 기대와 흥미 속에서 읽어 내렸다. 누군가 이 책들에 관심이 있다면, 나는 당연히 1권부터 읽기를 권한다. 그 이유는 첫째, 작가의 필력 또한 책을 써가면서 성장했기에 나중에 쓴 책을 읽은 후 1,2 권을 읽으면 좀 밋밋한 느낌도 들고 스토리가 단순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둘째로, 각각의 책에서 다뤄지는 사건 못지 않게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주인공들의 개별 스토리 또한 흥미롭기에 주인공들의 결말을 먼저 아는 것만큼 싱거운 건 또 없을 터. 따라서 이 책에 관심이 있고,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1권부터 찬찬히 읽어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갈수록 조금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사회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든가 혹은 시대상을 반영한 내용으로 사건을 구성해 나간다. 그런 측면에서 난 이 작가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저 단순한 개인적 사리사욕에 얽힌 사건이 아니라,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어떤 사건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3권의 깊은 슬픔의 경우 독일 사회를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나치과 여전히 독일 사회에 생채기로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풍력 발전사를 둘러싼 의심들, 아동 학대 등을 모티브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어떤 사건도 개인 간의 원한과 복수로 끝나지 않고, 사회경제적으로 그럴 둘러싼 권력의 힘과 부당한 힘의 남용, 국제적인 커넥션, 부당한 배후세력 등에 대해서 빠짐 없이 다룬다. 그렇기에 이 소설들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읽으면 읽을 수록 빠져들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건과 그를 둘러 싼 추리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을 때, 충분히 만족 시켜줄 수 있는 소설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표지 또한 책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일관성을 가지고 있어서 한 명이 디자인 한 줄 알았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주제와 벗어나긴 하지만, 책 디자인 만큼은 우리 나라도 수준급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됐다.








서민 (지은이) | 을유문화사 | 2013-07-15


처음에 경향신문의 컬럼에서 기생충에 은유한 이명박정권에 대한 풍자를 읽었을 때, 이 사람의 재기발랄함에 감탄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이후로 세상을 바꾸는 15분에 이 사람의 강의가 있길래 찾아서 들어보았다. 첫인상이 주는 느낌과는 다르게, 이름처럼 매우 서민적인 분위기로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이 사람의 모습은 관심을 갖기에 충분했따. 조금은 어눌한 듯 하면서도 자기 할 말은 따박따박 다 하는 모습에서 풍자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의대를 나와서 기생충을 연구할 수도 있구나 하면서 평소에는 뭘 하는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채널로 등장하는 걸 보면서, 이 사람의 숨겨진 욕망은 연예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참으로 끼가 많은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여튼,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도 안 되고, 글만으로도 판단해서도 안 되며, 공개된 모습만으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는 여러 가지를 알려준 사람 같다.

기생충 열전은, 저자의 말에 따르면 기생충과 관련한 책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쓰게 된 책이다. 물론, 학문을 위한 기생충 관련 책이야 없지 않겠지만,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기생충 관련 서적이 달랑 세 권밖에 없다는 것에서, 학자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쓴 책이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기생충을 백과사전 식으로 나열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상자에 요약 정리를 넣어주는 친절함까지 갖췄다. 요약 정리에는, 간략한 생김새와 생활사, 감염 경로, 위험도, 증상 등이 간략하게 나와 있어서 혹시 모를 상황에서 쉽게 참조할 수 있다. 

생활 속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민물회는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 "돼지 고기는 익혀 먹어야만 한다" 등과 같은 말들이 단순한 속설이 아니라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도 이 책에서 알려주고 있다. 나의 중학교 시절 정도부터 없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매년 철마다 채변봉투를 내야 했던 곤욕을 떠올려 보면, 기생충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것인가. 물론, 이제는 학교에서 채변봉투를 일괄적으로 걷고, 궁여지책으로 집에서 키우는 개의 변을 떠가는 바람에 기생충 약을 주먹채 털어 넣어야 하는 황당한 일은 발생하지 않지만, 여전히 약국에서는 구충제를 판다. 봄/가을로 먹어야 한다고 열심히 선전하면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나오는 기생충들에 대해서는 좀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저자의 기생충을 의인화 시켜서 설명하는 방법을 종종 쓰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 있다. 가끔은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오래 전 사람들의 대화를 상상해 내기도 하고, 기생충들을 사람에 비유해서 그들의 사랑과 전쟁을 설명하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며 혼자 키득키득 웃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으니 주의할 것. 

기생충이란 우리 몸에 해를 끼치는, 죽어 없애야 할 나쁜 것이고, 구충제를 먹으면 세상의 모든 기생충은 내 몸에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 믿는 사람, 그리고 정력을 위해서라면 사슴피든 생멧돼지 고기든 먹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우선 필독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생각을 좀 달리 할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기생충에 대한 대중서로서, 많은 사람들이 기생충에 대해서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램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 아닐까. 나도 이 책을 읽고 나니 다른 기생충 책들은 어떨까 궁금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본문 중에서...]


이렇듯 몇만년 동안 서로 친하게 지냈으니, 기생충이 갑자기 몸에서 박멸되고 난 뒤 우리 면역계가 느꼈을 박탈감이 어느 정도였을 지 짐작이 간다. 기생충 박멸 이후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이 늘어난 건 갑자기 상대가 없어진 면역계가 우리 몸을 공격한 결과이다.


외국에 나가면, 그게 설령 스웨덴이나 미국이라 할지라도, 물을 끓여 먹거나 메이커 있는 생수를 사 먹길 권한다. 좋은 물을 먹는 데 돈을 쓰는 것이 체류기간, 혹은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물설사를 쭉쭉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일 것이다.


다른 문화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생선회도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겠지만, 최소한 일본보다 먼저 회를 먹은 건 확실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선회의 주도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건 마음 아픈 일. 담도암 발생을 증가시키는 나쁜 기생충이지만 간디스토마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 잘하라고.(P.110)


의대는 인체 기생충을 다루는 곳이니만큼 최소한 한 명이라도 감염자가 있어야 중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서울주걱흡충은 이 논문이 나간 1964년부터 물 17년이나 무관심 속에서 울분을 삭여야 했다...... 그가 뱀을 먹은 것은 정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였다. 20대라는 한창 나이에 왜 그런게 필요했는 지 의아했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라는 말에 모든 게 이해가 됐다. 그때였다. 환자로부터 나온 충체를 보던 서교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 이 기생충 본 적 있어. 이건 20년 전에 봤던 서울주걱흡충이야."


의사: 당신은 서울주걱흡충에 걸렸습니다.

환자: 서울이요? 2002년 월드컵이 열렸던 대한민국의 수도 말입니까?

의사: 네, 그렇습니다.

환자: 이거 참, 배는 아팠지만 굉장히 반갑네요. 그때 우리 나라가 우승해서 한국에 대해 좋은 기억이 있는데.


수컷은 암컷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주고 사람 몸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주며, 결정적으로 알을 낳을 만한 적당한 곳을 찾아 주기도 한다. 이런 헌신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혈흡충을 존경하게 만든 이유인데, "기생충 제국"을 쓴 칼 짐머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구 상에서 남녀 간의 금실이 가장 좋은 동물은 원앙새가 아니고 주혈흡충"이라고. 아내 몰래 다른 암컷에게 추파를 더지고, 새끼를 낳으면 양육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원앙 수컷의 행태를 주혈흡충이 알았다면, 자신이 원앙과 비교되는 자체를 기분 나빠 했으리라.



조엘 바칸 (지은이) | 이창신 (옮긴이)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05-13 | 원제 Childhood Under Siege (2011년)


얼마 전 회사에서 'customer centric innovation'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자료를 찾아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아주 생소한 개념은 아닌데, 예전에는 제품이나 상품 자체에 집중해서 그것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를 기술자 중심으로 혁신을 해왔다면, 관점을 좀 달리해서 고객의 관점에서 생각하여 혁신의 지점을 찾아보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 중에 BBVA라는 스페인 은행의 사례가 있었다. 이 은행은 2020년을 대비한 비전을 세우면서, 회사의 상품들을 혁신하기 원했으나 2020년의 주 고객층은 지금의 어린아이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소비를 하고, 어떤 식으로 금융 거래를 할 지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웹킨즈라는 인터넷 게임이었다. 이 게임은 쉽게 말해 동물을 키우는 게임인데, 모든 게임들이 그러하듯 단순히 키우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먹이,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옷 등을 위해서 추가적으로 돈을 쓰게 만드는 게임이다. 그들은 아이들이 이 게임을 어떤 식으로 하는 지를 세밀하게 관찰해서, 이들이 나중에 어떤 방식의 금융소비를 하게 될 지를 예측했고, 그에 따라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여기까지는 고객의 취향을 파악하는 방법, 고객의 필요를 알아내는 방법에 대한 평범한 사례일 수 있겠지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결국 BBVA는 웹킨즈를 운영하는 회사에서 이미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고객의 성향에 대해서 너무 힘들게 알아낸 것일 수도 있다. 이 웹킨즈는 아이들의 경쟁의식, 동물에 대한 애정, '동물이 죽어가고 있다'는 메세지에 대해 아이들이 보이는 두려움과 즉각적인 반응, 적은 금액의 소비 정도는 부모에게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다는 사고방식 등을 이용해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BBVA에게 웹킨즈라는 것은 자신들의 사업을 어떻게 전개해나갈 것인지, 장기적인 사업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고마운 툴일 수 있겠지만, 수많은 부모들에게 이 웹킨즈는 아이들을 컴퓨터에 얽매이게 하고, 부모들에게 반항하게 만들고, 왜곡된 애정의 표출을 조장하고, 결국엔 중독에 빠지게까지 만드는 정말 나쁜 게임일 뿐인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아이들을 고객으로 하는, 그래서 정말 아이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어서, 진정한 Customer-Centric Innovation을 실천하는 기업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이윤 창출을 가장 기본이자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책에 나온 사례들은 충분히 참조할 만 하다. 아이들을 돈 벌이의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기업이 존재하는 한, 부모들은 한 시도 방심할 수가 없다. 얼마 전에 문제가 된 남자 아이들의 '쿠키런 딱지' 만 해도 그렇다. 아이가 좋아하고 원하니까 어쩔 수 없이 사주지만, 난 그 재질이 어떤 것일 지 심히 의심스럽다. 하지만 회사는 절대 그 재질을 밝히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먹히고 입히는 것에 예민한 엄마들의 마음을 건드려 자연주의, 유기농 온갖 것들을 갖다 붙이지만, 결국 그것들에 화학첨가물이 정말 어느 정도 들어가 있는 지에 대해서는 번번이 속이거나 감춘다. 도대체 부모들은 무엇을 믿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 걸까?

나는 아이들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에 관해서는 유난 떠는 엄마가 되고 싶다. 하지만 번번이 한계에 봉착하는데 지은이는 이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한다. 


"부모는 아이가 먹을 음식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맞지만, (1)부모의 선택은 아이가 사달라고 조르는 것에 크게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그리고 부모는 아이의 기분이나 가족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2)아이가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사달라고 조르는 이유는 업계가 아이들의 식욕을 자극하는 광고를 끊임없이 해댔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일지는 부모가 결정하지만, 그 결정은 업계의 전략에 조정 당하기 마련이다. 업계는 수십 억 달러를 들여 부모의 선택에 압력을 넣고 아이들의 건강보다는 업계의 이익에 도움이 될 선택을 하게 한다."


혹자는 그렇게 말한다. 우리도 다 그렇게 컸다고. 그러니 너무 유난 떨지 말라고. 하지만 난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은 '임계점'에 대한 것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거의 청장년 층이 될 때까지 자연에 가까이 살았었다. 그리고 우리 세대도 풍족하게 먹거나, 풍족하게 입고, 온갖 다양한 장난감과 매체에 둘러 싸여 살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어린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아니 태아에서부터 이미 현대 사회의 온갖 나쁜 환경에 접하게 된다. 그렇기에 몸속에 쌓이는 독소와 머리에 쌓이는 가치체계가 임계점에 도달하는 시기가 훨씬 빨라질 수 있고, 결국 그 지점을 넘어 폭발하게 된다면 온갖 질병과 폭력 들로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어른은 특정 화학물질에 다량으로 노출되어도 부작용이 없을지언정 유아, 어린이, 십대, 특히 태아는 미량에 노출되어도 “평생토록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다. 트러샌드가 “극도로 취약한 시기”라고 말한 어린 시절은 몸의 여러 기관이 발달하는 시기라 이때 생긴 손상은 복구하기 어렵다."


결국은 타이밍인 것이다.

그들의 마케팅은 집요하고 무섭다. 약한고리를 건드려서 서서히 파고들어와 결국엔 점령하고 만다. 그들의 그러한 이윤 위주의 마케팅은 결국 교육까지 집어 삼키고 있다. 아직 우리 나라는 그래도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좀 더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이미 미국은 공교육의 영역까지 민간 기업들이 점령하기 시작을 했다. 그래서 더욱 두렵다. 늘 미국이나 일본을 따라가려고만 하는 우리 나라가 기업의 이윤 추구의 관점에서 교육을 바라보고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건 시간 문제일 것 같아서이다. 그리고 이미 자율형 사립고나 사학 재단, 대학평가제, 일제고사 등을 통해 조짐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과연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낙관적으로 결론 짓는다. 


"역사의 다른 지배 조직들처럼 거대 기업도 청소년의 활력을 자기 목적에 이용해 그 활력이 자사 이익을 해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역사가 되풀이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사실은 청소년의 이상과 활력은 영원히 방향을 잃거나 희석되거나 억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상과 활력은 결국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힘으로 거듭나게 마련이다. 내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동의한다. 하지만 청소년의 활력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힘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다. 흔한 예로 핸드폰의 전자파처럼, 이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성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사용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나쁜 영향이 전혀 없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용을 금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부모들의 다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방적으로 금할 것들은 금하도록 규제를 만들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도한 마케팅을 금지하도록 정부의 정책을 바꾸어내는 것 또한 부모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 우리 아이는 지금 잘 지내고 있고 건강하니까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라는 관점에서, 이 아이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는 일은 결국 부모들이 해야 할 의무인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전략으로 부모의 선택은 제한되고 좌절되었고, 아이를 보호하는 부모의 능력은 점점 약해졌다. 예를 들어, 부모는 아이에게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이기로 선택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이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찾게 하는 강력한 마케팅에 대해서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 부모는 아이에게 무독성 제품을 사주기로 선택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을 산업용 화학물질에 노출시키는 다른 많은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 부모는 아이들이 미디어에 나오는 폭력을 덜 보게 하기로 선택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삶에 그러한 폭력이 갈수록 만연하고 그 정도가 잔인해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 (p. 26)

그런데도 어린이 마케팅은 아이와 부모의 유대를 끊는 기술을 개발한다. "아이들을 아이들답게"라는 신조에 충실하려면 아이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유대를 존중하고 북돋워야 하는데도 마케팅은 손쉬운 돈벌이를 위해 이런 유대를 약화시킨다. 어린이 마케팅의 진짜 신조는, 즉 어린이 마케팅의 야심과 활동을 정확히 보여주는 신조는 "아이들을 아이들답게"가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아이들을 간섭하도록"이라고 해야 옳다. 또한 어린이 마케팅이 아이들을 손아귀에 넣은 뒤에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아이들을 상대로 어떤 행위를 하는지 생각한다면 분노할 이유는 더 분명해진다. (p. 65)

부모는 아이가 먹을 음식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맞지만, (1)부모의 선택은 아이가 사달라고 조르는 것에 크게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그리고 부모는 아이의 기분이나 가족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2)아이가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사달라고 조르는 이유는 업계가 아이들의 식욕을 자극하는 광고를 끊임없이 해댔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일지는 부모가 결정하지만, 그 결정은 업계의 전략에 조정 당하기 마련이다. 업계는 수십 억 달러를 들여 부모의 선택에 압력을 넣고 아이들의 건강보다는 업계의 이익에 도움이 될 선택을 하게 한다. (p. 90)

현재 규제의 기초가 되는 전통적 독성학은 16세기에 파라켈수스가 독성학을 만들면서 처음 말한 대로 “독이 되고 안 되고는 용량에 달렸다”라는 추정에 근거한다. 따라서 특정 화학물질이 즉각적이고 눈에 보이는 부작용을 가져온다고 증명된 수치가 있을 때, 그 수치 미만은 ‘안전하다’고 규정한다. 이는 성인과 소아의 차이를 규정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특히 이미 발달한 생물 조직이 아닌 ‘발달 중’인 생물 조직이 화학물질에 노출될 때의 영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어른은 특정 화학물질에 다량으로 노출되어도 부작용이 없을지언정 유아, 어린이, 십대, 특히 태아는 미량에 노출되어도 “평생토록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다. 트러샌드가 “극도로 취약한 시기”라고 말한 어린 시절은 몸의 여러 기관이 발달하는 시기라 이때 생긴 손상은 복구하기 어렵다. (p.156)

과학자들은 BPA 같은 화학물질이 소량으로도 신체 기관 발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 정확한 과정을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때 중요한 요소는 타이밍과 호르몬이다. 신체 조직이 제대로 발달하고 작동하려면, 태아기와 어린 시절에 복잡한 세포 분열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수십억 회 일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기관 발달을 관장하는 유전자가 제때 켜졌다 꺼져야 하는데, 이는 그 스위치를 움직이는 호르몬이 정확한 순서에 따라 분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p.158)

아이들은 바닥 가까이에서 생활하고 많은 시간을 바닥과 땅에서 보내는 탓에 화학물질로 가득한 가정 내 먼지에, 그리고 화학물질에 흠뻑 절어 있는 잔디에 쉽게 노출된다. 아이들은 물건을 입에 넣고 끊임없이 플라스틱을 만지는 통에, 그리고 몸이 작다 보니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확률이 어른보다 높다. 아직도 발달 중인 아이들의 몸은 신진대사 과정에서 독을 제거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자궁에서 수백 가지 화학물질에 노출된 탓에 태어날 때 이미 그 물질에 절어 있는 상태다. 최근에 아기 10명의 제대혈을 조사한 결과 평균 200가지 산업용 화학물질이 검출되었는데, 그 중 상당수가 발암물질 또는 신경 독성 물질이거나 선천성 결함과 비정상적 발달을 유발하는 물질이었다. (p.163)

생물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과정을 이해하는 현재의 지식수준으로는 각 화학물질이 아이들의 건강에 미치는 부작용을 일일이 이해하기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부작용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해당 화학물질에 노출된 시간, (나이, 성별, 선천성, 후천성, 사회 환경, 일반적 건강 상태 등에 따른) 민감성의 개인차, 노출된 양, 노출 경로, 서로 다른 화학물질 사이의 상호작용 등 고려해야 할 조합이 끝도 없다. 그렇다 보니 완벽한 결론을 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가까운 시일 안에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의심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며, 업계의 소망대로 모든 의심이 제거된 뒤에 조치를 취한다면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p.184)

랜피어를 비롯한 수많은 아동 환경보건 전문가가 말하는 해결책은 (적어도 원칙 상으로는) 간단하다. ‘완벽한 증거’ 원칙을 ‘예방’ 원칙으로 바꾸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컨대 BPA나 일부 프탈레이트 또는 PBDEs 같은 화학물질이 건강에 해롭다는 절대적 증거는 없더라도 해로울 수 있는 다른 화학물질 수천 가지도 체계적으로 검사하며, 새로운 화학물질이 나오면 판매를 허용하기 전에 예방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위해성 검사를 실시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 업계는 자발적으로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뿐더러 부모가 직접 나서기에는 문제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p.186)

르네상스 2010은 시카고상공인클럽으로 대표되는 시카고의 비즈니스 엘리트들이 만든 계획이다……르네상스 2010에 나타난 “민간 부문의 전망’의 중심에는 세가지 기본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다. 첫째, 실패한 학교는 실패한 기업처럼 폐쇄되어야 한다. 둘째, 실패(또는 성공)를 가늠하는 척도는 표준화한 시험으로 학생들의 성적을 알아보는 것이다. 셋째, 신설되는 학교는 민간 기구가 운영해야 한다. 르네상스 2010에 따라 60여개 학교가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 학교 100개가 문을 열었다. 새로 문을 연 학교는 모두 해당 지역의 학구가 아닌 민간단쳬(특히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가 운영했다.  (p.186)

교육은 풍부하고 다차원적이어야 하며, 아이들에게 단지 숙련된 노동자가 아니라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정보력을 갖춘 생각하는 시민으로 살 준비를 하게 해야 하고, 단지 인력으로서의 잠재력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충분히 키워주어야 한다는 것이 교양교육의 개념이다. 따라서 교양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는 학생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이해하고, 과학정치예술인문에서 개인과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을 인식하고, 민주 시민의 필수 자질인 비판적 사고와 원칙 있는 행동을 할 능력을 개발하도록 해야 한다. 다이앤 라비치는 “제대로 교육 받은 사람은 역사, 과학, 문학, 예술, 정치에 관한 독서와 사색으로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다”고 말한다. “제대로 교육 받은 사람은 자기 생각을 설명하고 남의 생각을 경청하고 존중할 줄 안다.” (p.223)

교육이 갈수록 표준화하면서 교양교육은 뒷전으로 밀리는 추세 뒤에 숨은 원인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단순한 원인 하나는 새로운 시장 친화적 개혁이 거대 기업에게 돈이 된다는 사실이다. (p.236)

"교육은 들통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지피는 것이다." 시인 윌리엄 예이츠가 한 말이다. 불을 지피고, 생각을 촉발하고, 정보력을 갖춘 활력 있고 잠재력을 실현하는 개인과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교양교육의 목적이다. 이는 개인의 자아실현을 돕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건재와 번영을 위해 민주사회가 지난 한 세기 동안 끌어안은 이상이다. 개인에게도 정보력과 사고력이 필요하듯, 민주주의에도 정보력과 사고력을 갖춘 시민이 필요하다. (p.239)

고든 브라운은 영국 총리 재임 시절에 "낡은 규제 모델"은 버려야 하며, "교육 받은 부모 소비자, 책임 있는 기업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말은 막연히 그럴듯하게 들릴지 몰라도,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 발언이다. 현실에서 부모는 "교육받은 소비자"로서 자유롭게 선택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기업은 "책임 있게" 행동할 능력이 없다. (p.247)

좋은 부모가 되려면 선택을 할 여건을 바꿔야 하고, 기업을 비롯한 경제 주체의 손에서 아이들을 보호할 조치를 취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시민으로서' 사회를 바꾸려는 집단적 노력에, 즉 민주주의에 동참해야 한다는 뜻이다. (p.251)

기업이 막대한 재원을 내놓아 세상에 좋은 일을 한다면 여러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공짜 물건에 트집 잡지 말라"는 속담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그 공짜 물건이 트로이 목마라면,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따져보는 것이 순리다. 기업이 사회운동과 환경운동에 '공짜 물건'을 내놓았다면, 직원들의 의도가 아무리 순수해도 금전적 이익을 꾀하려는 계산된 전략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기업은 자사를 선한 힘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로 이런 활동을 벌이는데, 이들의 주요 활동이 그 반대일 때는 더욱 그렇다. (p.256)

역사의 다른 지배 조직들처럼 거대 기업도 청소년의 활력을 자기 목적에 이용해 그 활력이 자사 이익을 해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역사가 되풀이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사실은 청소년의 이상과 활력은 영원히 방향을 잃거나 희석되거나 억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상과 활력은 결국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힘으로 거듭나게 마련이다. 내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p.256)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은이) | 김욱동 (옮긴이) | 민음사 | 2003-05-06 | 원제 The Great Gatsby (1925년)


많은 사람이 궁금해 했다. 

"책은 다 읽었어. 그런데 개츠비가 왜 위대하다는 거지?"

영화도 안 보고 책도 안 본 내가 제목으로부터 유추한 느낌은 일종의 '대부'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저런 의문을 접하고나니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침 영원한 꽃미남 배우일 줄로만 알았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가 개봉이 되었고, 출판사에서는 너도나도 새로운 개정판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쇼핑의 단점은 우유부단한 내 성격을 만나서 극대화된다. 여러 출판사의 책을 놓고 끊임없는 비교 분석... 결국 원래 처음 출간했던 번역가가 다시 교정을 봐서 새로 출간판 민음사의 책과 소설가 김영하가 번역한 책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알라딘에서 제공한 미리보기를 놓고 비교하다가, 비교적 '각주'가 충실하게 달린 민음사의 책을 선택했다. 아무래도 1900년대 초반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면 단어 하나에도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다른 의미들이 숨겨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소설가의 번역은 지나친 의역으로 원본의 맛을 깎아낸다는 평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막상 다 읽고 나니, 각주를 충실히 읽으며 책을 읽지도 않았을 뿐더러 스토리에 집중하다보니 시대상 또한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소설을 소설가가 번역한 건 어땠을까하는 궁금함이 든다. 기회가 된다면 그 번역본으로 한번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다. 

그렇다면 과연 개츠비는 위대한가? 어딘가에서 읽기로는 그 시절, 사람 이름 앞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고 'The Great'를 붙이는 게 일종의 관습같은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도 그냥 '개츠비'인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제목을 붙일 때 그렇게 관습을 따라서 편하게 아무 생각없이 붙인다는 건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읽는 내내 왜 개츠비는 위대한가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어쩌면, 그로 인해 나의 책읽기는 좀 방해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개츠비는 위대하다. 그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엄청난 부와 명예,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만 붙이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개츠비같은 사랑을 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문제는 그가 사랑한 대상이, 황금모자를 쓰고 높이 뛰어오르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던 사람이라는 것이 비극의 시작일 뿐, 그는 정말이지 그녀를 사랑했다. 그가 이루어낸 모든 부가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 그녀를 되찾기 위해서였다는 건 처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로지 사랑 하나만 바라보고 전력질주한 인생, 그런 인생을 과연 누가 헛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개츠비는 위대한 것 아닐까.

머리가 복잡하고 피곤할 땐 소설을 읽는 게 최고다. 삶에 대해서 멀찍이 떨어져 관조할 수 있게 해주는 데는 소설만한 게 없다. 남의 인생을 통해 나의 인생을 돌아보는 것, 그래서 소설은 존재한다. 

폴 크루그먼 (지은이) | 박세연 (옮긴이) | 엘도라도 | 2013-04-15 | 원제 End This Depression Now! (2012년)


이런 사례가 있다고 한다. 조안 스위니와 리처느 스위니 부부가 소개한 것인데, 그레이트캐피털힐 육아협동조합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150쌍의 부부가 육아의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이 조합은 쿠폰 시스템을 실시했다. 조합에 가입하면 20장의 쿠폰이 지급되고, 쿠폰 한 장은 30분의 시간을 의미한다. 아이를 맡기는 경우 자신의 아이를 돌봐준 회원에게 시간을 계산하여 이 쿠폰을 낸다. 이런 방식으로 서로 남의 아이를 봐주면 쿠폰을 얻고, 내 아이를 맡기면 쿠폰을 지급하는 형태로 쿠폰은 유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냐면, 사람들이 너도나도 쿠폰을 절약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멀리 가거나, 오랜 기간 일을 봐야 할 때를 대비해서 쿠폰을 사용하지 않고 비축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렇게 하자,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쿠폰은 유통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쿠폰의 침체기라고 해야 하나? 결국 협동조합 회의를 통해 훨씬 더 많은 쿠폰을 각 가정에 지급하고나서야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충분한 쿠폰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미래의 벌어지지 않은 일을 위해 비축하는 일을 중단했고, 쿠폰은 활발하게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례가 이 책 한권 전체를 통해서 폴 크루그먼이 말하고 싶은 것의 요약판이다.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돈은 흘러야만 한다. 이 흐름이 멈추게 되는 것이 바로 경제의 침체이고, 이것을 흐르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정치가와 관료들의 임무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흐르게 해야 하는가. 

한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내리게 되는 처방은 뻔하다. 지출을 줄이고 빚을 갚아야 하며, 빚을 갚으면 다시 돈을 모아야 한다. 아주 간단하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하나의 국가로 확장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아주 간단하게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지금 미국을 비롯한 대다수의 국가들의 관료들은 이런 처방을 내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국가는 가정과 다르다는 것이다. 국가가 허리띠를 졸라매면 벌어지는 일이 바로 육아협동조합의 상황이라고 폴 크루그먼은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쉬이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나의 부채는 누군가의 자산이고, 누군가의 부채는 나의 자산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이다. 나는 부채로 인해 허리띠를 졸라매는데, 자산이 많은 사람들은 내가 허리띠를 졸라매서 벌어지는 잠깐의 경기침체를 보고는 덩달아 소비를 늘리지 않는다. 이런식으로 경기침체는 더욱 심화되고, 결론적으로 나의 부채는 갚아도 더 늘어나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식의 해결책으로는 지금의 불황을 끝낼 수가 없다는 것.

폴 크루그먼이 주장하는 건 매우 간단하다. 어떻게 해서든 정부가 지출을 늘리라는 것. 정부가 지출을 늘려서 고용을 확대하도록 돕고, 미래의 인플레를 기대하도록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쓰도록 만들어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돈이 순환이 될 때 국가의 경제는 침체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이렇게 해서 호황이 되면 그 때에는 정부의 지출을 줄이면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 저자의 주장에 동의가 되면서도 '이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기, 당연하게 따라야 할 진리'라고 강하게 주장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면, 자본주의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폴 크루그먼이 제시하는 근거들이 미국의 대공황과 2차대전, 한국전쟁 등의 시기라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정부가 돈을 쓰는 것보다 전쟁을 하면 해결이 되나? 라는 아주 우스운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게 만드는 근거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전쟁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전쟁에 준하는 상황이 되도록 정부가 돈을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정부의 지출이 경제의 호황을 이끌었던 사례가 오로지 전쟁과 정부의 군비지출이라는 것은 개운치 못한 뒷맛을 남기는 것은 사실이다.

얼마전 시사IN과 인터뷰한 장하준 교수도 포드의 이야기를 했다. 물론 포드가 나쁜 자본가의 모습을 많이 가지긴 했지만, 어쨌든 '노동자들이 가난하면 이 비싼 차를 누가 사겠나'라는 생각으로 임금을 올려줬고 결국 그 노동자들이 다시 차를 사는 경제의 선순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장하준 교수는 경영자의 안목과 책임감이라는 측면에서 이 이야기를 했지만, 이것 또한 지금의 불황을 타개하는 데 하나의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예화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과 재작년 우리 회사에서도 신입사원을 무척 많이 뽑았다.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어쨌든 신입사원을 많이 뽑는 것은 회사로서는 투자일 수밖에 없다. 신입사원이 당장 생산성을 올려주지 못하기에, 그로 인해 작년과 재작년 회사는 예상만큼의 실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다고 회사가 적자를 낸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몇백명의 신입사원들이 우리 사회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더 크게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이 그대로 청년실업자였다면 그로 인한 경제적 파급효과도 만만치 않았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들이 실업자였을 때와 신입사원이 되었을 때의 정확한 경제적 효과 비교야 내가 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고, 정말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식으로 기업도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하고 투자를 하고, 국가 또한 재정적자를 감수하고라도 지출을 늘려야 경제 시스템이 좀 더 안정화되고 선순환의 구조로 자리잡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지금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라든가 여성 노동력, 청년실업의 문제가 해결되어 가는 방식이 우리 나라의 경제성장을 미리 가늠해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정부의 지출은 곧 복지가 아닐까. 그렇게 복지가 강화되고 사회안전망이 촘촘해질 때,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고 신뢰가 회복될 때 사람들의 주머니도 열리고 혈액도 원활하게 순환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지금의 정치권을 보면 마냥 낙관할 수가 없다. 그래서 불안하다. 과연 이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불황을 타개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심을 거둘 수가 없는 이 현실이 가슴 아프다.


[본문 중에서]


어떤 집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남편이 자동차 전기 시스템을 수리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이제는 시동도 안 걸린다. 그런데도 배터리를 갈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배터리를 간다면, 그동안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대신 남편은 가족들에게 걸어다니거나 버스를 타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가족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자동차가 아니라 '남편'이다. (p.43)

그래도 이 사례는 오늘날 세계 경제가 떠안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 그러나 아직까지도 많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나의 지출이 당신의 수입이고, 당신의 지출이 나의 수입"이라는 개념의 실종이다. (p.48)

그들은 미국경제를 통제가 불가능한 외부 요인 때문에 소득이 줄고, 소득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가정처럼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절약을 하고 신중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소비를 줄이고, 빚을 갚고, 비용을 절감해라." 하지만 지금의 위기는 그렇게 해서 해결될 것이 아니다. 수입이 줄어들고 있는 이유는 지출을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p.78)

케인스 경제학이 촉구하는 정부 개입이 비교적 온건하고, 특정한 목표에 한정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정부의 개입 자체를 문제의 발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부 개입이 경기침체에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이로 인해 사회주의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케인스 경제학을 중앙 집중적 계획과 혁명적인 부의 재분배와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은, 실제로 그 진실을 알고 있는 경제학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보수 인사들에게 지극히 보편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케인스 자신은 이렇게 부인했다. "인간의 가치 있는 활동을 위해서는 부를 축적하려는 동기와 완전한 결실을 위한 사유재산제가 뒷받침돼야 한다."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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