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날은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 투어!
한국에서 이미 한달 전쯤 고민 끝에 투어를 예약해 두었습니다. 프랑스 하면 에펠탑, 루브르 못지 않게 몽생미셸이 연상되곤 했던 지라 소원풀이가 오히려 늦은 편이라고 해야 할런지요. 어쨌든, 이번 파리 여행의 가장 기대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었지요. 오늘은 노르망디 해변 특집입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우리에겐 낯익은 지명이지요. 그 노르망디 맞고요… 여튼, 그쪽 해안에도 절경이 많다 하더라구요. 우선 에트르타를 들렀다가, 옹플레흐를 거쳐, 몽생미셸까지 가는 기다긴 일정. 아침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예정된 아주 빡센 일정입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비가 옵니다. 부슬부슬~~~ 거참. 내다 보니 우산을 안 쓴 사람이 없을 정도의 비네요. 하지만, 곧 개이기를 바라며 출발했습니다. 우선 가이드를 만나기로 한 콩코드 광장까지는 오빠가 태워다 주었구요, 콩코드 광장에 도착해보니 승합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 말고 모녀 두 명의 일행이 있더군요. 일행이 있는 게 나쁠 건 없지만, 대학 다닌다는 그 딸은 시차 적응도 안 되고(우리보다 하루 먼저 왔건만!) 감기까지 걸려서 가이드 설명은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잠만 자더라는… ㅋㅋ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에트르타(Etretat) 였습니다. 다행히 날이 환~하게 개서 정말 환상적인 햇살을 뿌려줍니다. 오르세에서 보았던 그림에도 나오는 그 에트르타의 코끼리 절벽! 다음의 행선지인 옹플레흐랑 가까운 편입니다. 그래서 모네는 옹플레흐에 사는 스승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이곳에 자주 들러 그림을 그렸다고 하네요. 많은 화가들이 사랑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저 절벽위 푸른 곳은 바로... 골프장입니다. 에트르타 골프장. 정말 멋지다고 하네요. 골프를 안 치는 저로서는 뭐 상상도 잘 안 되지만, 여튼... 좋아 보이긴 합니다.

 

마을까지 한 화면에 넣어봤습니다. 정말 아기자기하고 이쁜 마을이죠.
사진의 배경이 되는 곳은 엄마 코끼리 입니다. 코끼리가 바다에 코를 빠뜨리고 서 있는 것 같은 모양 맞지요? 엄마 코끼리 뒷편으로는 좀 더 굵은 코의 아빠 코끼리 바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완전히 정반대의 위치로 가야만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투어 상품에 따라 거기까지 걸어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던데, 우리는 시간 관계 상 생략. 그림 엽서로만 만족해야 할 것 같네요.  

 

에트르타를 주제로 한 화가들의 그림에는 종종 아빠 코끼리도 나옵니다. 1번이 아기코끼리, 2번이 엄마코끼리, 3번이 아빠코끼리입니다. 우리가 서서 기념 사진을 찍은 위치가 4번입니다.

 

언덕 위에는 기념 탑이 하나 서 있습니다. 최초로 지중해 횡단 비행기가 떴던 곳이 바로 이 에트르타 언덕 위라고 합니다. 그 당시 파일럿들의 얼굴이 새겨진 부조도 있고, 기념탑과 기념관이 있습니다. 사실… 뭐, 그닥 멋지지는 않고 어울리지도 않아요. 너무 크기만 하고 말이죠. 프랑스답지 않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 작고 아담한 교회. 들어가 볼 수는 없더군요.

 

뒤로 보이는 게 아기 코끼리 바위입니다.

 

해변도 자갈 해변입니다. 아주 특이해요.
해변에 경고 문구가 써 있었습니다. “이 자갈은 해변의 자산이고, 이 마을 사람들은 이 해변으로 인해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당신이 이 자갈을 하나 집어가면, 그 만큼 이 해변 마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게 된다…” 아주 정중하면서도 피부로 확 와 닿는 경고 문구더라구요. 그냥 “자갈 채취 금지!” 뭐 이렇게만 써 놓는 것보단 훨씬 구속력이 크지 않나요.

 

 

마을 자체가 너무 아기자기하고 이쁩니다. 처음에 동사무소 같은 곳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현재 기념품 가게입니다. 그 앞이 이 마을의 광장. 사실, 광장이라 하기엔 거시기하지만, 뭐 유럽쪽은 광장은 ‘넓은 평지’ 라기 보단 ‘널리 열려있는 곳’에 가까운 거니까요.

 

그냥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발견한 도자기 가게입니다. 컵 하나에 5유로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살까 말까 몇번을 집어 들다가 그냥 왔습니다. 저 정도의 도자기는 이천에 가도 많을 것 같아서요. 흐흐.

 

이곳에서 출발한 시간이 거의 11시 30분 넘어서인 것 같습니다.
두번째 행선지로 달리면서 센강을 가로지르는 노르망디대교를 건넜습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사장교에 드는 다리지요. 한 때는 세계 최장의 사장교였으나, 기록은 뭐 늘 갱신되는 것이구요. 인천대교보다 약간 긴데, 좀 거시기한 건 인천대교 디자인이 거의 이거랑 똑같다는 것입니다. 음… 사장교의 한계인 건지, 완벽한 표절인 건지는 잘 모르겠구요. 여튼, 사진과 달리 경사가 장난 아닙니다. 사진을 찍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다리를 건너면서 찍어봤자 view가 좋게 나올 것 같지도 않으니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으로 대체. ^^ 

 

달리고 달려~ 옹플레흐 항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아, 정말 예쁜 항구 마을이지요. 이 마을은 모네의 선생이었던 외젠 부댕(Eugene Boudin)이 살던 곳이라, 이 사람 이름을 딴 미술관도 있습니다. 아주 작은 항구구요. 예전엔 이 마을의 항구에서 수산업까지 모두다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외곽쪽에 신항구가 새로 생기고 이곳은 개인용 요트 정박이 대부분입니다. 이 요트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일까요…?^^


 

마을 입구의 샌드위치 가게에서 간단한 점심을 사서 해결했습니다. 요트를 바라보는 계단참에 앉아서 먹었어요. 워낙 밥값이 비싼 동네다보니, 베르사유 궁전에서든 루브르에서든 그 어느 곳에서든 이렇게 샌드위치와 음료수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무지 많아요. 관광객이든 현지인이든 말이죠.

 

점심을 다 먹은 후, 다시 항구 입구에서 전체가 다 보이도록 한컷 더.

 

이곳은 높은 분들이 마을에 내려오시면 묵게 했던 공관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나무와 돌이 어우러진 독특한 양식이죠. 나무로 촘촘히 기본 골조를 만들고 사이사이를 다시 나무로 이은 후, 사이사이를 메꾸는 게 노르망디 양식이라고 하네요. 이건 노르망디 양식에 석조건축이 섞인 형태네요.

 

아주 이국적이지 않나요? 그런데 보면, 북유럽의 어느 곳 같기도 해요. 대부분의 건물들이 2~3층 정도까지와 그 이상이 약간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저층은 노르망디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고, 그 이후에 북유럽, 특히 노르웨이 쪽의 영향을 받아서 증축되었음을 보여준다는 거죠. 저 건물들 뒤쪽은 지대가 더 높아서 앞에 보이는 2층이나 3층 정도가 뒷면의 1층이 됩니다.

좀 전에 보았던 항구 주변 건물들의 뒷모습입니다. 항구쪽 1층이 대부분 상가였던 것처럼, 골목 쪽을 기준으로 볼 때 1층들도 대부분 상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모습이 전형적인 노르망디 양식이네요.

 

이건 원래 교회였어요. 지금은 해양 박물관 같은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참 이쁜 골목입니다. 그런데 이 길의 이름은 '죄수의 길'이라고 하네요. 골목 안쪽으로 보이는 곳이 죄인들을 가둬 두던 곳이라서 그렇게 붙여졌다고 합니다.

 

요트를 배경으로 해서 다시 한번. 가이드가 남편더러 이곳은 프랑스인데 도대체가 왜 천편일률적인 포즈를 보이냐며 구박하는 바람에, 얼굴도 웃고 있고 포즈도 좀 바뀌었습니다. 하하.

 

외젠 부댕의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입니다. 딱 이 지점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그림과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네요. 어딘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과 풍경... 우리 나라는 18세기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 어디에 가면 있을까요?

 

옹플레흐는 정말 작은 어촌 마을이지만, 화가들이 워낙 좋아했던 곳이고 무엇보다 인상주의에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외젠 부댕의 고향이니만큼 화가들의 아뜰리에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실제로 현대미술 작품을 취급하는 화랑도 정말 많았어요. 문제는 가격이 장난 아니라는 거…^^;;

 

모네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골목길입니다.

화가들의 아뜰리에가 몰려 있는 골목입니다. 골목의 모습 자체가 예술이에요.

 

카트린느 성당과 종탑입니다.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의 목조 성당이라고 하네요. 고딕은 늘 석조만 보아왔던 지라 정말 특이해요. 목조인 까닭에 그리 높진 않았고, 석조 건물과는 또 다른 매력을 풍깁니다. 왠지 사찰의 느낌이 나요. 재료의 차이가 중요한 까닭입니다. 프랑스의 시골 성당에서 절의 향기를 느끼다니요…

 

성당 내부입니다. 석조 고딕만큼 웅장하고 큰 느낌은 아니죠. 소박한 느낌입니다.

이곳의 파이프오르간은 소리가 또 남다르다고 합니다. 다른 성당과는 달리 나무에 소리가 부딪히기 때문에 훨씬 부드럽고 깊은 소리가 난다는 거에요. 들어볼 수 없는 게 아쉬울 뿐…

이제, 옹플레흐를 떠나 드디어 몽생미셸을 향해 갑니다...^^

 

 

 

 

 

 

같이 투어를 받은 가족과 함께 파스타와 피자로 점심식사를 한후, 다시 프라하 성으로 올라와 관광을 시작했습니다...

 

프라하성에서 점심 먹으러 내려가는 계단길... 광고 및 각종 뮤직비디오에 많이 나오는 곳... 오른쪽으로 아기자기한 이쁜 건물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아주 분위기 있는 계단길이다.

 

 

밥먹으러 내려가다가 놀라서 자빠질 뻔 했다. 저 사람이 내 발목을 잡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ㅋㅋ

저 집이 예전엔 감옥이었던 걸까? 왜 저런 형상을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광고효과 하나는 끝내줄 듯.

 

 

우리... 로밍했었다. 뿌하하... 살다 살다 별 걸 다 해보네.

그래도 타지에 나가 정신 없는 와중에 공중전화 찾느라 헤매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맘 편하고, 시간 맞추기도 좋을 것 같아 로밍을 선택했다. KTF 로밍을 받았는데 남편의 폰이 유럽쪽 로밍을 지원하지 않아서 NOKIA 핸펀을 받았다. 한글을 지원하지 않는 바람에 문자 해독하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다. "KACHICOL, 000-000 GOGAEKNIMKE GEOLYEOON JUNHWAIBNIDA..." 해독해 보시라.

 

 

프라하성과 페테르진 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이 만나는 작은 광장. 점심 먹고 이곳에서 다시 모여 다시 관광을 시작했다. 

 

 

네루다 거리... 내려올 때는 계단으로 내려왔지만, 밥 먹고 다시 올라갈 때는 네루다 거리를 통해서 올라 갔다.

네루다는, 체코의 국민작가로 그 사람의 작품 하나쯤은 모두다 읽어보고 자랄 정도의 위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마지막 사진의 건물이 네루다가 살았던 집으로 벽면에 청동판으로 네루다가 조각되어 있다.

프라하의 건물들은 다른 유럽과 마찬가지로 예전 모습이 남아 있으면서 다양한 색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 더 아기자기하고 이쁘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세계 3대 성당 중 하나인 성비트성당.

전형적인 고딕양식의 성당인데, 파리의 노트르담에 비해 좀 더 밝은 느낌을 준다. 건축물 자재 자체가 '사암'이라는 것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검게 변하는 특성을 지녔다고 하는데, 그것에 비하면 덜 검다는 것이 성비트 성당의 특징이다. 전면에 있는 장미창 역시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들이 인상적이다. 각 문마다 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하는 부조가 표현되어 있고 배수를 위한 악마의 조각 또한 수도 없이 많다. 보면 볼수록 노트르담 성당이 생각났다.

 

 

성당의 지하에 있는 카를4세의 무덤이다. 카를 4세는 프라하의 카를다리에서 볼 수 있듯, 체코에서 역사적으로 아주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왕이다. 부인들의 무덤이 옆에 겹겹이 놓여 있다. 죽어서도 호강이다... ㅋㅋ

 

 

자... 밑에서부터는, 스테인드글라스 퍼레이드... 여기에도 물론 노르트담성당에서 본 것과 같은 장미창이 있었다.

하지만, 별 짓을 해도 내 눈으로 보여지는 색감이 표현이 되지 않았다.

가이드 왈, 카메라가 나빠서도 아니고 세상의 그 어떤 카메라로도 담아낼 수 없는 빛의 신비라고 했다.

사실 장미창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스테인드글라스들이 내가 찍은 것보다는 실제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다...

 

 

 

비트성당 내에 있는 조각품... 조각품 역시 고딕양식의 특성을 살려 한껏 멋을 냈다.

 

 

몇백년 전에 만들어진 프라하 시내의 지도이다. 블타바강이 보이고, 카를교가 보인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집 몇 개를 제외하면 저 지도가 여전히 현실세계에서도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이 조각품들은 체코의 성인인 네포묵 신부를 기리는 조형물이고, 가장 오른쪽은 네포묵 신부의 관이다.

네포묵 신부는, 자신이 바람을 폈다는 왕비의 고해성사를 왕에게 고하지 않은 죄로, 혀가 뽑힌 채 카를교 위에서 물에 빠뜨림을 당한 신부이다... 몸에 납덩이를 묶은 채로 빠뜨렸으나, 시체가 물에 뜨자 왕이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어쨌든, 프라하의 여러 조각상 들 중에 머리에 별 다섯개가 그려져 있으면 그것은 무조건 네포묵 신부를 뜻한다.

가운데 사진에 자세히 보면 천사가 쟁반 위의 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자신의 도리를 지킨 네포묵에 대한 찬양이다.

네포묵 신부의 관 뒤에 보면 황금색 탑이 보인다. 저건 순황금 덩어리다.

어떻게든 잘 찍어보려고 했으나 플래쉬를 터뜨리면 더 이상하게 나오고, 플래쉬를 안 터뜨리면 촛점이 흐려지고... 삼각대를 안 가져간 것이 정말 너무 후회스러웠다.

 

 

찍고 나서 화면으로 확인했을 때는 분명 잘 나왔었는데... 도착해서 확인해보니 흔들렸다. 아쉽기 그지 없다...

이것은, 파이프오르간으로 베토벤이 직접 연주를 하기도 했다는 오르간이다.

연주하는 소리를 직접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성당의 제일 뒤에서 전면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아치형 지붕과 건물의 웅장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중앙의 회랑만을 보여줄 뿐, 이 회랑을 빙 둘러서 각 왕들의 개인 기도실과 다양한 조형물들,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되어 있다.

 

 

다른 성당에서도 그렇고 나는 왜 저런 악마의 모습들이 건물 모서리마다 조각이 되어 있는 지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저 조형물들은 배수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쫙 벌린 입으로 물이 떨어져 나옴으로써 악의 순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비트성당의 원래 출입구. 세 문 위로 좌측에는 지옥, 우측에는 천국이 그려져 있다.

 

 

 

 

비트성당 문에 각 별자리가 조각되어 있다. 그래서 남편은 쌍둥이자리 앞에서, 나는 처녀자리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체코에는 바다가 없어서 그런지, 게자리에 가재가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

그래서 전갈자리인 일행 하나는 가재를 전갈로 알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ㅋㅋ

 

이것도 뭔지 기억 안 나는...ㅋㅋ

 

 

 

 

프라하성을 내려오는 작은 골목길에 있는 또 하나의 전망 point. 블타바 강이 건물들 사이로 작게 보인다.

 

 

일명 "인형 명품관" 프라하성에서 내려와 카를교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인형가게다.

저 수많은 인형들이 모두 직접 손으로 깎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가이드가, 가격표 꼭 보고 사려면 사라고 하길래 얼마나 하나 봤더니

인형 하나에 몇십만원은 기본이었다... 내참. (원래 프라하는 인형극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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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파리의 미술관은 크게 세 곳으로 대표됩니다. 곳곳에 위치한 소규모 미술관/박물관에도 물론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요.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죠. 이 중 오르세 미술관은 19세기의 작품들을 망라해 놓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2월혁명이 일어난 1848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4년까지의 작품들인 거죠. 이 이전의 작품은 루브르에, 이 이후의 작품은 퐁피두에 전시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1804년 최고재판소로 지어진 건물로 오르세궁이라 불렸으나 불타 버리고, 1900년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파리국립미술학교 건축학 교수였던 빅토르 랄로에 의하여 오르세역으로 다시 지어졌다. 현대적으로 지은 역사(驛舍)였으나 1939년 문을 닫게 된 이후 방치되었다가 1979년에 현재의 미술관 형태로 실내 건축과 박물관 내부가 변경되어 1986년 12월 ‘오르세미술관’으로 개관되었다. [출처] 오르세미술관 | 두산백과"

오르세궁이 불타 버린 후에는 도심의 공원으로 사람들이 이용했다고 합니다. 제대로 갖춰진 공원은 아니었으나, 폐허가 되어버린 궁터와 그 틈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들이 나름 분위기 있는 광경을 제공했다고 해요. 그러다가, 오를레앙 철도공사의 제안으로 철도역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때 만국박람회에 맞추느라 엄청난 공기단축을 감행했다고 하네요. 이후 다시 방치되었다가 미술관으로 바뀝니다. 

19세기의 회화 작품이 주가 되다 보니,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았던 낯익은 그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많은 경우 루브르보다는 오르세에 대한 기억을 더 좋게 가진 사람들이 많더군요. 이번에도 그런 낯익은 그림들을 만나서 반가웠던 반면, 지난번에 갔을 땐 그닥 눈에 보이지 않던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그 감동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정리해 봅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마네, 모네, 고흐, 고갱, 밀레, 세잔, 르느와르, 드가... 등은 skip 입니다. 


#1.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 1845-1924), 카인(Cain)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잘 아는 카인과 아벨의 바로 그 카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두 형제인데, 가인이 질투로 인해 아벨을 죽이고, 쫓겨나게 되죠. 이 그림의 가장 앞에 선 사람이 카인입니다. 카인의 죄악으로 인한 기나긴 고생의 나날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인물 하나하나에 고단한 삶의 흔적들이 보이는 그림인데, 사이즈가 굉장히 커서 보는 순간 바로 압도 되어 버리더군요. 캔버스에 유채 그림이고 사이즈는 308 x 700cm 입니다. 1880년 작품입니다.


#2.

토니 로베르 플뢰리(Tony Robert-Fleury), 코린트의 마지막 날 (기원전 146년) (Le dernier jour de Corinthe (146 avant J.C.))

배경은 전쟁이에요. 코린트면 성경의 고린도인데, 성경 상의 어떤 사건은 좀 아닌 것 같아요. 코린트는 그리스 중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도시입니다. BC 8세기 경에 도시 국가가 완성되었고, 부를 누리며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도 나오듯 물질적인 번영과 함께 타락도 동반했던 것 같네요. 여튼, 중세 후기에 이르면서 쇠퇴하다가 1458년 터키에 정복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로 보면, 아마 터키에 정복될 당시의 모습을 그린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추측을 해봅니다만, 아무리 검색을 해도 이 그림과 관련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네요. 

여튼, 이 그림을 보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군인들이 진군해오는 상태에 여인과 아이들은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입니다. 한쪽 구석에서는 겁탈당하는 장면도 묘사되어 있고,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여인들, 숨어 있는 여인, 그저 괴로워하는 여인, 아이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인, 죽은 것 같은 아이를 올려놓고 망연자실한 여인, 그리고 이미 쓰러진 남자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너무나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눈물이 찡할 정도로요... 이 그림은 리얼한 현장 포착의 보도 사진보다 더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캔버스에 유채 그림이고 사이즈는 400 x 600cm 입니다. 19세기경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3.

레옹 프레데릭(Leon Frederic), 노동자의 시기들(Les âges de l'ouvrier, triptyque)

이 사람은 벨기에의 화가구요, 세쪽으로 나누어져 그려진 그림입니다. 인체의 명암표현이 선명하게 대비되도록 표현을 한 게 특이해요. 제일 왼쪽엔 힘든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그려져 있고, 제일 오른쪽은 아기를 돌보고 있는 엄마들, 그리고 가운데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제목이 노동자의 시기라는 것은 이 세 폭에 주로 등장하는 연령대의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 되어버리나요? 예전엔, 아이들을 그저 '작은 사람'으로만 보았다는 걸 이 그림에서도 알 수 있는 것 같네요. 저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가운데 중앙에 장례식의 행렬이 있어요. 결국 우리 모두는 저 길로 간다는 걸 얘기해주는 것 같아요. 어쨌든, 이 그림 또한 표현 방식의 강렬함과 리얼리즘으로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캔버스에 유채 그림이고 사이즈는 163 x 93.5cm, 1895~1897


#4.

루이스 어니스트 바리아스(Louis Ernest Barrias), 과학의 등장으로 베일을 벗는 자연(Nature Unveiling Herself to Science)

이번엔 조각인데요... 밑의 부분별 확대 사진을 다시 한번 보세요... 정말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돌로 저런 곡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정말 살아 있는 여성 같은 따뜻함과, 색색의 돌들로 이루어진 옷과 장신구. 

와우~~ 정말 환상적입니다... 청록색 보석과 푸른색의 띠까지!

발끝으로 흘러내리는 드레스의 우아한 자연스러움!

금방 나를 쳐다보며 웃어줄 것만 같은 느낌, 스르륵 저 매듭이 풀어지며 사뿐히 걸어 내려올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지 않나요?

제목이 좀 특이하다 했는데, 1889년 보르도의 의학 대학이 생기며, 장식용으로 의뢰된 조각이라고 합니다. 의학과 과학, 자연, 인체... 조각이 은유하는 것이 무엇일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이날 처음 봤는데, 너무나도 유명한 조각이라 장식용으로 굉장히 많은 모조품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멋집니다. 높이 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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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부터는 귀스타프 쿠르베(Gustave Courbet)의 그림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빠져든 화가죠. 사실주의 화가로서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한번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말해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오로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그대로 표현을 하죠. 하지만, 화가의 개인적인 감성이 반영되지 않을 순 없겠죠. 쿠르베 그림의 분위기와 소재, 그리고 그림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들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름 부유하게 태어나 부모님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파리 혁명 당시에는 민중들의 편에서 싸우기도 했던 사람이구요. 


#5.

화가의 작업실(The Painter's Studio; A Real Allegory), 361 x 598cm

1855년 국제박람회에 출품했다가 거절당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도 매우 큰 작품인데, 작품의 사이즈도 거절의 이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쿠르베는 인물을 사실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실제 인물만큼은 커야 한다고 생각했기 대문에 큰 작품을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 속의 화가는 자기 자신입니다. 나체 모델이 하나 서 있고, 어린 아이가 있죠. 그림 해설에서는 모델은 '진실', 아이는 '창조'를 은유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게 쿠르베가 한 말인지 사람들이 갖다 붙인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른쪽에는 지식인들, 상류층 사람들, 화가의 후견인 그룹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매우 밝고 자유스러운 느낌입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현실을 대변하는 민중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배고픔, 가난, 추위 등 곤궁한 현실인 거죠. 사회는 그렇게 양분되어 있었지만, 자신은 중간에서 양쪽을 매개함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6.

폭풍우가 지나간 에트르타 절벽 (La falaise d'Etretat après l'orage), 133 x 162cm

프랑스의 서쪽 노르망디 해변의 에트르타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세번째 날 여행기에서 실제 사진을 첨부하겠지만, 정말 이것과 '똑같습니다'. 모네도 이 해안을 좋아해서 에트르타를 그린 그림이 많이 있는데, 모네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더더욱 쿠르베가 왜 사실주의 화가인 지, 모네는 왜 인상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 너무 좋아요...^^


클로드 모네,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


실제 에트르타 해변의 코끼리 바위


#7.

수원지(The Source), 128 x 97cm

쿠르베의 그림 중에 누드화가 꽤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여인의 몸은 고대로부터 이어진 화법 그대로 절대적 미를 갖춘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 주류였다고 합니다. 매끈한 피부, 완벽한 균형 등으로 대표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런 몸을 가진 여인이 실제로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것은 사실주의에 어긋나는 것이죠. 그래서 쿠르베는 반기를 들고 여인의 나체를 그립니다. 이 작품에서 보듯이 말이죠. 한눈에 봐도 77사이즈 이상은 되어 보이는 저 풍만한 중부지방을 보고 누가 완벽한 여인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까. 특히 전통적인 그림만 보아오던 사람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겠죠. 미술계에서는 이걸 반항적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전시회장을 방문했던 나폴레옹 3세는 이 그림으로 인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들고 있던 승마용 채찍으로 화면을 내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네요. ㅋㅋㅋ


#8.

오르낭의 매장(A Burial at Ornans), 314 x 663cm

1849년에 오르낭에 머물며 그리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위해 실제 마을의 대다수가 모델을 자처했다고 하네요. 사실주의 작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실제 인물을 하나하나를 모델로 하여 그림을 구성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모델이 되었기 때문에 무척 뿌듯해 했으나, 정작 1850-1851 살롱전에서는 무시 당했습니다. 그림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저는 그저 사실적인 묘사 자체가 참 마음에 듭니다. 전체적으로 장례식다운 어둡고 깊은 톤 속에서, 각 인물들의 표정이 다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다 똑같은 감정으로 슬퍼하지 않는 곳이 장례식이쟎아요. 그래서 마음에 듭니다. 사이즈를 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큰 그림이지요. 오르세에서도 벽면 전체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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