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신도림 디큐브시티 지하 2층에 있는 팥빙수/단팥죽 전문점이다.

마침 디큐브시티에서 저녁 먹을 약속이 잡혀서 후식으로 뭘 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그곳에 자주 들르는 후배가 팥빙수 파는 집을 봤다며 한번 가보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들른 곳.

팥빙수 하나와 단팥죽 하나를 시켜서 먹었다.

외양과 맛 모두 홍대 앞의 '경성팥집 옥루몽'과 유사하다.

놋그릇에 담아 나오는 모양새도 그러하고, 단팥죽에 팥 알갱이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단팥죽의 경우 옥루몽에 비해 계피향이 거의 없다.

빙수는 밀탑과 유사하나 역시나 밀탑의 진한 연유맛은 많이 느껴지지 않는다.

밀탑과 다르게 견과류가 올라가 있고, 떡맛은 거의 100% 유사하니 아마 같은 곳에서 가져오는 듯.

단팥죽에 생강절편을 곁들여 주는 것이 차별화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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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핫~하게 떠오르고 있다는 상수동 카페 거리.

원래 가려던 곳은 이리카페였는데, 팥빙수를 팔지 않는다는 비극적인 사실 때문에 대신 갔던 곳.

지나치다 우연히 본, '핸드메이드 팥'이라는 문구 때문에 들어가게 됐는데,  

단순히 팥빙수뿐 아니라 주인장님의 센스와 친절함, 그리고 편안한 분위기 때문에 나의 완소 카페가 되어버렸다.

주말 밤에 1~2시까지 하는 것 때문에 대학 친구들 모임의 아지트가 될 것 같은 느낌~^^

팥은 리필 되고, 견과류와 에스프레소를 별도로 내주는데 

빙수 위에 뿌려 먹어도 되고 따로 먹어도 되고, 왠지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주는 느낌이랄까.

연유를 넣는 것 같진 않다. 통통한 팥이 적당히 졸여져서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는다.

카페 분위기도 프로방스 풍... 옆에는 주인장께서 직접 가꾸시는 허브향 가득한 야외 정원도 있다.


카페 옆, 오른쪽의 옷가게도 쥔장께서 하시는 상점이다. 쥔장의 취향이 느껴진다...


도로쪽으로 내다본 모습... 깔끔하고 편안한 분위기.


벽면에 장식된 각종 병들... 술일까 엑기스일까...


허브향 가득한 야외 정원. 흡연자들을 위한 공간.


삼색 샌드위치...^^


그리고 팥.빙.수. 저 앙증맞은 에스프레소 잔에 가득 담아 나오는 커피를 빙수 위에 부어준다. 보통 흔히 파는 커피빙수와는 차원이 다르다. 얼음 사이로 녹아든 은은한 커피향이 팥과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다. 왼쪽의 견과류는 섞어 먹어도 좋고, 따로 집어 먹어도 좋고... 취향껏~


한구석에 이 성냥이 놓여 있어서 찍어봤다. 아직도 이걸 팔다니... 정말 장수하고 있구나, 너!


그 밖에 꿀토스트, 열무비빔밥, 떡볶이 등 밥이 될 만한 것들도 많이 판다. 음료도 다양하고... 



큰지도보기

케이트 / 커피전문점

주소
서울 마포구 상수동 342-4번지
전화
02-336-3768
설명
안녕하세요.\n저희 케이트에서는 직접 삶은 국내산 통팥으로 만든 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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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창은 이래저래 아무데서나 먹기가 좀 꺼려진다. 사람들이 즐겨먹는 부위가 아니라 부산물인 데다가, 손질이 까다롭고 세척이 쉽지 않고 질기기까지 해서, 다루는 사람들이 편법을 써서 다루고 싶은 유혹에 쉽게 빠지도록 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편법이 무엇인지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젠 많은 사람들이 알 듯... 어쨌든, 사람이 먹는 음식으로 장난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그래도 믿고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꾸 찾게 되고, 소문내고 싶어지는 곳. 섬세한 손질과 과일을 이용한 연육과정, 그래서 맛있을 수밖에 없는 곳.

여기는 홍제동의 '양가곱창'


묵은지. 느끼한 곱창의 맛을 잡아준다.


파와 부추절이... 나는 일단 도착하면 이것부터 반 사발은 들이킨다. 맛도 맛이고, 나름 건강을 위해... ㅋㅋ


양념장 3총사... 카레가루와 소금, 간장소스... 개인적으론 간장소스를 가장 좋아하고, 중간 중간 카레로 입맛을 돋군다. 소금은 거의 찍어본 적 없는 듯...


아... 노릇노릇 구워진 이 곱창이라니...!


곱창의 곱이 보이십니까요?


안 보이는 분들을 위한 클로즈샷!


메뉴판이다... 왕 저렴하다. 강남의 곱창집들과 비교 불가...



완전 강추 음식점! 

테이블이 선술집 같은 드럼통 테이블이라 서넛이 둘러 앉아 도란도란 먹기 딱 좋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갈 경우 미리 연락해서 좀 구워 달라고 하면 좋은데, 

곱창이 익는 속도가 느리다보니, 먹는 속도를 좀처럼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




큰지도보기

양가곱창 / -

주소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306-11번지
전화
02-379-7780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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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에서 맛있는 팥빙수 집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곳.

말차 팥빙수를 먹었다. 그냥 팥빙수도 맛나다.

여기 역시 우유얼음이나 연유 맛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을 한 덩어리 올려주는데, 아이스크림의 종류가 두 가지이다.

말차 아이스크림과 팥 아이스크림. 

팥은 리필 가능. 밀탑에 비해서 깔끔한 맛이나 뭔가 2% 부족한 느낌도 있다. 하지만, 명동 부근에선 상위 클래스.


말차 아이스크림 팥빙수


팥 아이스크림 팥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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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니까~~ 일단 팥빙수 포스팅부터 시작.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팥빙수의 지존, 너무나도 유명한 '밀탑'

내가 주로 가는 곳은 킨텍스점, 그리고 집과 가까운 부천점.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를 흘낏 보니, 우유얼음 위로 연유를 국자로 서너번을 듬뿍 떠 넣으시더라...

그래서 유난히 연유 맛이 많이 느껴지는 편.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 달고 느끼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우유얼음의 시초가 아닐까 싶게 섞어버리면 바로 녹아버리는 세밀함 우유얼음과 적당하게 삶아진 팥이 포인트.

팥은 리필 가능...


단팥죽은 먹다가 찍어서 좀 지저분... 

하지만, 저렇게 살아 있으면서도 입안에 들어가면 저절로 녹아드는 탱글탱글 팥이 밀탑 단팥죽의 매력이다. 

여긴 킨텍스점인데, 이 이후로 그릇이 모두 바뀌었다. 좀 더 작아진 듯...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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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지은이) | 휴(休) | 2013-03-26


나에게는 그리스와 산토리니는 거의 동의어나 다름 없다. TV 속에서 온통 흰색과 푸른빛으로만 이루어진 햇살 가득한 그 마을을 보는 순간, 언젠가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나의 버킷 리스트에 추가되면서, 산토리니는 그리스, 그리스는 산토리니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감히 주장해 본다. 이 책의 표지가 폐허가 된 신전이나 올림푸스산이나 절벽의 수도원이 아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흰 계단인 이유도 산토리니가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처음엔 그냥 여행기려니 했던 책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종교 전문기자로 활동을 하며 불교와 기독교를 넘나드는 공부와 여행을 통해 다져진 저자의 내공은,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서 제목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곳곳의 유적들을 직접 발로 확인하며, 그에 얽힌 그리스 신화와 역사적 사실들을 끄집어 내고, 그것을 다시 삶의 자세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들로 연결 짓는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수도원들을 돌아보며, 옛 수도사들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엄격하게 다스렸는 지,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런 고난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였는 지를 생각해 본다. 3세기 후반 은둔 수도승이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그들은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공간에 수도원을 짓고 하나둘씩 모여 살면서 오로지 신과의 교감만을 추구하며 끊임 없이 자기를 버리고 또 버린다.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게 했던 것일까.

"수도승을 뜻하는 '모나코스(monarchos)'는 그리스어 어근 '하나(monos)'에서 왔다. 수도는 욕망에 따라 헤매는 방랑을 쉬고 본래 신성과 하나가 되어 현존하기 위한 여정이다. (p.63)"

사람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신성을 찾는 끊임없는 행군이 바로 수도원의 생활이었고, 수도사들은 그렇게 자신을 정복함으로써 진정한 해방을 찾고, 이 땅에서 가장 고결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하늘 위의 수도원 메테오라에서 발견한 수도자들의 유골 더미를 통해 과연 죽음과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돌아본다. 수도사들의 유골이 무덤이 아닌 오가는 길목에 쌓인 채 그대로 드러나 있는 낯선 상황은 수도사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에 대한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들이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죽음 그 자체인가, 아니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인가. 산토리니가 에게해의 진주가 될 수 있었던 것 또한, 자연재해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폐허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아닐 뿐, 작은 섬 하나가 완전히 죽고 나서야 산토리니는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이 된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면, 그에 대한 거부는 우리를 괴롭힐 뿐이니 받아들여야 함을 그리스 여행은 지속적으로 깨닫게 해주고 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여행하며 국가와 리더는 어떠해야 하는 지를 생각하고, 소크라테스와 히포크라테스, 피타고라스의 고향을 여행하며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관심 있게 본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인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작성했다고 알려져 있는 파트모스 여행이었다. 과연 사도 요한이 그 섬에서 홀로 지내며 본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세상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은 요한이 무엇을 알리길 원하셨던 걸까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한 지금의 기독교는 초기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순수한 신앙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있는가도...


그리스 여행의 마지막은 터키 트로이에서 끝이 난다. 커다란 목마가 안으로 들어가고 결국엔 트로이를 멸망시키게 되는 과정은 '불안'이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는 지를 보여준다. 전쟁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랬고, 그것이 신의 뜻임을 믿고 싶어했다. 그래서 신이 보낸 선물이라는 헛된 주장에 쉽게 넘어가게 되었고, 결국은 어리석은 믿음이 스스로를 멸망시키게 되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 떠오른다.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영향력 안에 잡아두고자 하는 것은 자본 혹은 권력, 종교가 늘 행해오던 전략이다. 이 물건을 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동질감을 가지지 못할 것 같고, 지금 이것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 같고, 지금 돈을 모으지 못하면 불행한 미래가 당장 현실로 닥칠 것 같은 불안. 이 불안 마케팅이 우리로 하여금 과욕하게 하고, 나만 바라보게 하고, 끝없는 탐욕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답답한 현실. 저자가 묻는 마지막 질문에 우리 모두는 답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선택 속에 숨은 트로이의 목마는 무엇인가?'


[본문 중에서...]

세상이 지겹도록 바뀌지 않는다는 불만의 소리가 높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자신이었다. 그리스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바꾼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우리는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를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인간은 생각을 바꿈으로써 죽음을 부활로, 절망을 희망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뒤바꿀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p.13)


이들은 신체나 계층의 장애가 비록 불편하기는 했지만, 결핍과 시련을 탁월함의 양분으로 삼았다. 인생이 빚어내는 최고의 요술은 이런 약자들이 상처를 아우라로 바꾸는 것이다. (p.14)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욕구를 모르고 이를 외면하고선 기쁨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과 쾌락만 좇다간 건강은 물론 영혼까지 잃어버릴 수 있다. 나는 과연 내가 무엇에 목말라하는 지 정확히 알며, 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가.

플라톤은 말한다. 

"남이 아닌 자신을 정복한 자가 고결한 최상의 승리자다."

성인의 옛 수행처는 벼랑 위 조그만 동굴이다. 40년간 짐을 버리고 버려 마침내 마음을 내려놓은 곳이다. 세상과 운명에 밀려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 전에, 스스로 집착의 무거운 짐을 비워버리고 날아갈 자, 날개는 그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이다. (p.37)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신이 되게 하기 위함이며, 하늘에 올라가 하느님과 함께하게 하기 위함이다." 정교회 초기 교부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성인의 말이다. (p.50)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차별을 거부했다. "그리스어를 못하는 사람이 야만인이 아니라 열린 마음 없이 타인들을 선입견으로 대하는 사람이 야만인이다." (p.73)


현대사회에서 그런 신적인 힘을 지니고 폭력 세상을 이끄는 이들은 누구일까. 아무래도 네오콘이 첫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유대인과 기독교 근본주의 결합쯤으로 볼 수 있는 네오콘은 '힘이 곧 정의'라고 신봉하는 이들이다. 미국에서 레이건 대통령을 거쳐 조지 부시 대통령 때 세력을 얻은 이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 국제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절대선'을 지키겠다고 나서고 있다. 타인이나 타국을 '악'으로 규정해 서슴지 않고 죽이면서 말이다. (p.99)


삶이란 그런 것. 오고 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슬픔과 고독뿐이다. 수도사들이 바위 끝 삶을 산 것은 슬픔과 고독 속에 자기를 가두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해방되기 위함이다. 그러니 나도 좀 더 대범하게 녀석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p.122)


태어난 자는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예외가 없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한 번만 통과하면 될 공포의 문을 수백 번, 수천 번 통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를 정말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병과 죽음 그 자체일까, 아니면 이에 대한 거부에서 오는 걱정과 불안일까.  (p.131)


또한 미신적인 종교일수록 '성직자는 전생에 쌓은 공덕이 많아 대우 받는 게 마땅하고, 천민들은 죄업을 많이 지어 고생을 겪는 것'이라는 운명론을 전파했다. 그러니 백성은 성직자와 왕족, 귀족들을 잘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인과론은 후생을 위해 자신의 삶을 책임 있게 살게 하려는 애초의 의도와 달리 삶의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이나 장애인들을 더한 고통에 빠뜨리는 반인권적 업보론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전후생론은, 돈과 권력과 명예가 타인에게 봉사하라고 주어진 것이라는 도덕적 의무론으로 보완되어야 하지 않을까.  (p.152)


현존하는 인류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빠른 100미터 기록이 9초대다. 치타는 3초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능력이 탁월하다는 데 있지 않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 탁월함을 이기적인 욕망의 추구에만 쓰는 대신 공익을 위해 쓸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p.198)


원만한 관계를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자기 밖에 설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스어 '엑스타시스'는 '밖에 서 있다'는 뜻이다. 자신 속에서 빠져나올 때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다. 그 축복은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자기'란 히스테리(자궁)와 동굴 속에서 나올 때 상태와 공명과 공감이 가능해진다. 미숙과 성숙의 차이는 주관 속에만 빠져 있느냐, '내 생각'에서 나와 객관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느냐의 여부다. (p.244)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들도 싫어하고, 내가 원하는 건 남들도 원한다. 싫어하는 것을 피하고,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만큼 좋은 관계를 지속시키는 비결은 없다.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상대방에게 협조와 사랑을 기대하고 있을 때, 상대방도 당신에게 관심과 배려를 기대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p.246)


그리스 철학은 국가를 위해 개인을 총동원하는 국가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성공이 별개일 수는 없다. 내적인 수행이 우선이냐, 외적인 제도 개혁이 먼저냐는 논의는 불필요하다. 둘 다 중요하다. 아테네는 둘을 함께 성취했다. 그들의 창조력은 놀라웠다. 아이, 이방인, 여성, 해방노예, 노예들을 제외하고 불과 3만 명의 시민이 이룬 정치, 철학, 문학, 예술의 금자탑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광휘로도 덮을 수 없을 만큼 찬란했다. (p.249)


테세우스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아테네 왕국의 후계자가 된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스스로 여는 자만이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 테세우스는 한번 들어가면 누구도 빠져 나오지 못한 채 괴물의 먹이가 되는 미궁 행을 자원하고, 14명의 소년소녀들 속에 섞여 크레타로 떠난다. 그가 헤라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최고의 영웅으로 불리는 것은 진정한 리더인 때문이다. 리더십은 자기만 사는 게 아니고, '더불어 살아가는 기술'이다.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힌 독재자와 달리 위인은 열정과 자기 희생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p.255)


멀리서 검은 돛을 본 아이게네스 왕은 아들이 괴물의 밥이 된 줄 알고 절망한 나머지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만다. 그래서 이 마다가 그의 이름을 따 '에게 해'가 된 것이다. 성급한 왕의 선택이 안타깝다. 지금 내 삶이 불행하다고, 자유롭지 않다고, 장애가 생겼다고 서둘러 세상을 버릴 일이 아니다. 고통의 시간은 클라이맥스를 고조시키기 위한 연극의 서막인지도 모를 일이니, 섣불리 인생을 비극으로 결말 지어서는 안 된다. (p.256)


행복은 무엇이 된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정인 지금 여기에서 좋은 것인데, 사람들은 자기가 꿈꾸는 삶을 사는 이들을 동경만 하고 그렇게 되기를 갈망만 한다. 하지만 자기가 아닌 누군가가 되려는 갈망이 과연 행복을 가져다줄까. 크레타 섬 역사박물관 직원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조르바를 좋아한다는 그에게 조르바의 삶을 동경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한다. 

"조르바를 좋아하긴 하지만, 조르바는 조르바, 나는 나."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면 지금처럼은 살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남보란 듯이, 내 뜻대로 살아보리라고.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 내일이 오면 그때도 타인의 삶이나 바라보며 내일이나 기약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카잔차키스가 붓다만큼 따랐던 니체는 말했다.

"다시 태어나 살고 싶을 그런 삶을 살아라."

내일 말고, 지금 당장 여기서! (p.275)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적인 가피를 비는 것일까. 외지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마치 기도하듯이 신전 주위를 돌고 있다. 자세히 보니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들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노쇠해 가고 병들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반겨지지 않는 사실이다. 허나 이를 거부하면 할수록 더욱 고통스러워지는 것은 '필멸'이 인간의 숙명인 까닭이다. (p.307)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주류 철학자들과 예수의 가르침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모든 인간이 아니라 '그들만'의 해방을 추구했다. 거기에 노예와 장애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방인, 여성 등도 낄 자리가 거의 없었다. 오직 시민들만이 자유와 해당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옹호됐다. 예수는 전혀 달랐다. 예수는 노예와 장애인, 여성처럼 소외되고 버림 받은 자들을 해방과 구원의 주인공으로 세웠다. 그것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성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배타성과 폭력성은 그 위대성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p.332)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로 여겨지는 '메타노이아(Metanoia, 회심)'은 그리스어로 '마음을 바꾼다'는 뜻이다. 의식의 변화를 말한다. 내면에 갇힌 시선을 외부로 돌리는 것, 자기만 챙기던 사람이 주위와 세상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 자기 조직, 자기 국가, 자기와 자기 집단밖에 모르던 사람이 그 밖에도 똑같은 인간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식물도 모두 존귀한 생명이며, 그들과 우리의 삶이 하나라는 진리를 개닫는 것이다. (p.333)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을 낭비하지 마라.

지금 가진 것도 전에는

원하던 것이었음을 잊지 마라. (에피쿠로스, p.357)


두려움에 떨며 강국 리디아의 식민지가 되어 노예의 길을 선택하려는 사모스인 앞에서 노예 이솝은 이렇게 말했다.

"운명은 이 생에서 인간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해주었다. 하나는 자유의 길로, 시작은 고되고 견디기 힘들지만 끝은 아주 평평하고 견디기 쉽다. 또 다른 길은 노예의 길로, 처음은 들판처럼 가볍고 평평하지만 끝은 매우 혹독하고 크나큰 고통 없이는 걸을 수 없다." (p.359)


트로이전의 승리자는 그리스 연합군 총대장 아가멤논 왕이다. 그 또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는 참전에 앞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달래기 위해 자기 딸을 바다에 던졌다. 왕비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딸을 재물로 바친 남편에게 앙심을 품고 칼을 갈고 있다가 트로이 전쟁에서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정부인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살해한다. 아가멤논이 딸을 죽인 그대로 도끼로 세 번을 내리쳐서.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의 복수에 나선 아들의 손에 죽는다. 대체 전쟁의 승리자는 어디에 있는가. (p.370)


기자라는 직업인으로 살면서 내가 새기고 있는 하나의 관점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하는가. 그들이 모두 칭찬하는가. 그러면 의심해 보자. 과연 정말 그런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모두가 비난하는가. 그러면 의심해 보자. 과연 정말 그런가.' 대중의 결정이 내 정당성을 결코 보장해주지 않는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것도 당시의 다수 대중이었다. 유대인 600만명의 학살도 대중의 동조 없이 히틀러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수의 도그마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갈 때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 (p.378)


살만 칸 (지은이) | 김희경 | 김현경 (옮긴이)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04-22 | 원제 The One World Schoolhouse (2012년)


어떤 교실. 몇십명, 혹은 백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한 교실에 있다. 교실 한켠에 컴퓨터나 태블릿들이 놓여 있고 몇몇 아이들이 이어폰을 꼽은 채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또 몇몇의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함께 토론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또 어떤 아이들은 반쯤은 고립된 공간에 들어가 조용히 책을 보고 있다...

과연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교실에서 가능한 일일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정도까지 오전반/오후반 경험을 했다. 학생수가 너무나 많은 나머지 두 개의 반이 하나의 교실을 공유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학교가 늘어나 주거지에 따라 아이들이 단체전학을 가면서 오전반과 오후반 제도는 없어졌다. 그래도 한반에 60명은 족히 되었고, 그 숫자는 고등학교 때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아이들의 예고 없는 전학 같은 게 아니라면 한 반에 60명은 기본이었다. 그 아이들이 일렬로 선생님을 쳐다보고 앉아서 듣는 일방적 강의,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학교였고 우리가 아는 배움의 방식이다. 

살만 칸은 이런 배움에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들마다 배움의 속도가 저마다 다른데 어떻게 한번의 강의를 통해 아이들이 배워야 할 내용을 다 습득하고 따라올 것이라 믿느냐는 것이 기본적인 문제 의식이다. 전적으로 동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아이들은 수학을 좀 더 빨리 배우고, 어떤 아이들은 언어 영역을 좀 더 빨리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빨리 배우는 것과 잊지 않는 것은 또 별개이고, 빨리 배우는 것과 그것을 정말 정확하게 이해했느냐는 또 별개일 수 있다. 그리고 다 이해한 것과 시험 점수 100점 또한 별개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을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 선생님의 강의가 끝나면 나머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된다. 선생님의 강의는 이미 끝이 나서 되풀이해서 들을 수가 없다. 궁금한 게 있다면 선생님께 질문을 해도 되지만, 엉뚱한 질문을 했다가는 왕따가 될 수도 있고 선생님께 구박을 받을 수도 있다. 용기가 있는 아이라면 교무실로 찾아가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냥 말아버린다. 그리고 참고서를 의지해서 혼자 독학을 하거나, 알만한 사람에게 질문을 하거나, 학원 선생님에게 물어보거나, 과외 선생님께 물어보거나. 그런데 학원은 대부분 선행학습의 학원이라 이미 학원에서도 한번 배운 내용일 경우는 자랑스럽게 물어보지도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유일한 대안은 과외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과외라는 것 자체가 정말 비정상적인 사교육 시장인 것이고, 실제로 과외를 시킬 수 있는 가정은 대한민국에서 몇퍼센트나 될까. 요즘은 EBS에서 인터넷 강의를 많이 듣기는 하는데, 그것 또한 입시 준비에 국한이 되어 있다. 이미 기초가 안 된 경우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기이다. 일단 선생님의 수업이 끝나면 나머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맡겨진다. 보통 어릴 때는 엄마에게 맡겨진다고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리고 나면 1년에 몇번 시험을 본다. 그리고 점수가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점수와 향후 학습 커리큘럼은 전혀 상관이 없다. 시험에서 내가 90점을 받을 경우, 우리는 그 점수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곧이 곧대로 해석하자면 100중에서 90을 알고 있다라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10을 실수로 틀린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나 90점이란 점수는 보통 상위권에 해당할 것이다. 80인 아이들, 70인 아이들, 그리고 심지어 50이 안 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을 보고 그 점수를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나면 모든 건 그대로 끝이다. 다음 진도로 진행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가 80점을 계속 받는다고 가정한다면, 그 아이가 이해 못한 그 20은 계속 쌓이게 된다. 그렇게 그렇게 중학교 내내 80으로 버텨오다가, 고등학교 가는 순간 한순간에 무너질 수가 있다. 그 이해 못했던 20으로 인해 그 아이의 머리속 지식에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셈이니까. 저자는 그것을 스위스 치즈 학습이라고 이야기한다. 

"미리 강의를 한 뒤 자전거를 2주간 타보라고 하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2주 뒤에 와서 '자, 한번 보자. 좌회전을 못하는군. 제동도 잘 못해. 80점!'하고 이마에 C학점 도장을 쾅 찍은 뒤 '자, 이번엔 외발자전거 타기를 해볼까?'하고 말합니다."

보통 '치즈'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삼각형 형태의 구멍이 숭숭 뚫린 에멘탈 치즈. 그 치즈처럼 중간 중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근근히 학습하게 되는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요행히 그것이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잘 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 구멍들로 인해 도로에 거대한 씽크홀이 생기듯 확 무너져 버리고 말아 버린다. 그것도 가장 중요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등학교 때에 말이다. 

그래서 저자가 주장하는 건 완전 학습이다. 인터넷에 학습 동영상을 올려서 얼마든지 자기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 학습이 가능하다. 자기 능력에 따라서 진도를 마구 뺄 수도 있고,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좀 더 시간을 투자해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면 된다. 그것도 무료로! 그렇기 때문에 한명의 교사가 30명을 맡는 것보다는 두명의 교사가 60명을, 세명의 교사가 90명을 한번에 맡아서 저마다의 속도로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고 여러명이 함께 협력하는 프로젝트 수업도 진행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에 어울리는 학교라는 것이다. 이미 저자는 일부의 학교에서 이러한 방법이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을 실험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사실 얼마 전부터 나도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우연치 않게 조카를 한두달 가르치게 되면서, 저마다 다른 아이들의 학습속도를 인정해주지 않는 한 대다수의 아이들은 시스템에 의해 강제적으로 도태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것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었던 차에 이 책을 읽고 많은 걸 생각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생각을 다듬기는 해봐야겠지만, 분명히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아이들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일단 살만 칸을 만나봐야 하나? ^^


[본문 중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배우는 방식에 관한 몇 가지 기본적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배운다. 어떤 이는 직관적으로 단번에 이해하지만 다른 이는 끙끙거리고 시간을 오래 끈다. 빠른 사람들이 반드시 더 영리하지도, 느린 사람들이 더 멍청하지도 않다. 더 나아가 빨리 알아듣는다고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속도는 스타일의 문제이지 상대적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거북이는 결국 토끼보다 더 많은 지식, 더 유용하고 '오래 남는' 지식을 얻게 될는지도 모른다. (p.37)


당신은 커리큘럼은 표준화할 수 있지만 배움을 표준화할 수는 없다. 그 어떤 뇌도 똑같지 않다. 지식의 대단히 미묘한 망을 거쳐가는 그 어떤 길도 같지 않다. 가장 철저하게 표준화된 시험조차 생각들의 어떤 부분집합을 학생들이 나름대로 파악한 이해 정도의 근사치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학습의 개인적 책임은 배우는 사람 각각의 독특함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p.72)


교육 분야 바깥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K-12라 부르는 교육과정, 시작될 당시에는 급진적이었던 혁신이 18세기 프러시아에서 처음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지도 모르겠다. 뻣뻣한 수염과 모자, 엄격하게 발맞춰 행군하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프러시아에서 우리의 기본적인 교실모델이 만들어졌다. 세금으로 지원하는 의무적인 공교육은 교육적 수단일 뿐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도 간주됐다. 애초에 공교육은 독립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와 교사, 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왕의 권위에 굴복하는 가치를 배워 충성스럽고 다루기 쉬운 시민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도입됐다. (p.99)


가족들이 그저 같이 보낼 수도 있는 시간을 숙제에 쓰는 게 과연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일까? 연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미시간대학교에서 실시한 대규모 조사의 결론은, 더 나은 성취 점수를 내고 품행상의 문제를 덜 일으킬 가능성을 예견하는 가장 강력한 단독 예측변수는 숙제에 들인 시간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의 빈도와 시간이었다. (p.139)


변화의 확실성은 변화라는 속성의 완전한 불확실성과 함께, 교육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에 심오하고 복잡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내게 가장 기본적인 교육은 아주 명백해 보인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10년이나 20년 뒤에 무엇을 알아야 할지 우리가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가르치는 내용보다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가르치는 법을 배우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p.220)


창조적인 일은 마감시간에 맞출 수 없다. 천재는 시간기록계를 찍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아인슈타인에게 "좋아, 이 상대성 같은 건 그만 접고 이제 유럽 역사를 공부하자"라고 말한다거나 미켈란젤로에게 "천장을 위한 시간은 끝났으니 이제 벽을 칠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창의성과 경계를 확장하는 생각을 완전히 파괴하는 이러한 다른 버전들은 학교에서 늘 일어난다. (p.296)


천재성은 물론이고 창의력을 가르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히 억압할 수는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교육의 공장형 모델은 정확히 그렇게 하도록 완강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p.291)




잭 런던 (지은이) | 이한중 (옮긴이) | 한겨레출판 | 2012-10-08


개인적으로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그 어떤 가상의 이야기들도 슬픔으로 끝나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한껏 양보해서 열린 결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래도 나는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내가 예술 작품으로 얻고 싶은 건 주로 행복한 느낌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리얼리즘은 그닥 내가 선호하는 장르가 아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부조리에 가득 차서 인 지는 모르겠지만, 리얼리즘의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내가 바라는 결말로 끝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내가 도대체 내가 이 책을 왜 샀는 지 모르겠다. 이것은 인터넷으로 책을 살 때 발생하는 부작용 중의 하나이다. 책을 직접 들춰보질 않기 때문에 책에 대한 소개만을 보고 골라잡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보니, 추천하는 사람과 나의 취향이 완전히 다를 경우엔 꼭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책을 소개하는 사람 또한 스포일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내용을 어중간하게 소개해 놓기 마련이다보니, 마지막 결말들이 나를 배신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밖에.

이 사람이 강철군화의 저자라는 것에 나도 모르게 끌렸나보다. 그렇다고 내가 그 책을 감명 깊게 읽은 것도 아니면서, 그냥 왠지 읽고 싶어졌달까. 뭔가 현실을 미화시키거나, 현실로부터 도피시키는 말랑말랑한 이야기 말고 다른 것이 목말랐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제목인 '불을 지피다'에서 뭔가 앞서 나가는 자의 이야기, 혹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현실을 밝혀주는 이야기, 그래서 희망을 지피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나 혼자 커다란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잭 런던의 단편집이다. 잭 런던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1876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온갖 육체노동을 어릴 때부터 경험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버클리에도 입학하지만 결국 졸업하진 못한다. 20대의 시기에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고, 알래스카의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에도 합류하는데, 이 때의 경험이 많은 소설의 소재가 된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는 종군기자로 일본과 만주 및 우리 나라에도 다녀갔다. 이때 펴낸 책이 <잭 런던의 조선 사람 엿보기>이다. 이후 집필에 전념하다가 마흔살의 나이로 요절을 했다. 

제일 첫번째로 등장하는 '스테이크 한장'의 이야기에서부터, 잭 런던이 경험한 밑바닥의 인생들, 곤궁한 생활, 암울한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다. 아동 노동의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는 '배교자'에는 자신의 유년기가 그대로 묻어난다. 읽다보면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그러다가 이주 노동자의 절망적인 삶을 그린 '시나고', 난파당한 배에서 벌어지는 인간성 말살의 현장 '프란시스 스페이트 호', 재물 앞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 '그냥 고기', 극한의 상황에서 과연 어떤 선택이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전쟁'... 아, 계속 가슴 답답하고 우울하고 속쓰린 이야기들만 나열된다. 책의 제목인 '불을 지피다'도 내가 생각했던 불이 아니라, 영하 50도를 넘나드는 혹한에 목적지를 향한 여정 속에서 추위를 달래기 위해 성냥으로 불을 지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경험이 너무나 혹독하여 생생했던 걸까.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묘사라든가, 척박한 환경에 대한 묘사, 그리고 절망 혹은 배신의 바닥에 도달한 사람들의 심리묘사가 굉장히 사실적이고 섬세하다. 마치 죽음의 순간까지도 경험한 사람같은 느낌이랄까. 

정말 좋아하는 류의 소설은 아니지만, 정말 오랜만에 접해본 리얼리즘으로 무장한 소설이었다. 작가가 살았던 그 시대의 사회상이 그대로 묻어나 읽으면서 내내 마음 졸이고, 가슴 아파해야 했다. 부디 아직 죽지 않았던 그 주인공들은, 그 이후로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 행복하게 생을 마무리 했기를...




노엄 촘스키 (지은이) | 노승영 (옮긴이)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11-09 | 원제 Hopes and Prospects


얼마 전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책을 보면서 촘스키가 쓴 책이 생각났다. 한참 전에 사두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읽지 않고 미뤄두었었는데, 촘스키와의 대담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의 가지들을 끄집어낸 덕분인지 빨리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촘스키가 얘기했던 민주주의와 촘스키가 바라는 세상, 그리고 세계의 경찰인 양 행사하는 미국의 세계 정복 의지에 대한 촘스키의 좀 더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예상대로, 이 책의 절반 내용을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이야기이고, 나머지 절반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이야기이다. 팔레스타인과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이야기들을 씨실로 해서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이야기를 엮어서 이른바 서구권에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 고발하고 있다.

촘스키는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 2세이다. 따라서 그의 관심의 영역이 전지구적임은 어쩌면 그의 삶의 배경 측면에서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관심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더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할 수 있다 하겠다. 그는 직접 팔레스타인도 방문을 했었고, 이미 오래 전 이스라엘·팔레스타인·미국과 관련한 책을 통해 세 국가의 실타래처럼 얽힌 갈등의 고리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두 국가 간의 거래와 지원 등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뒤로도 그의 발언은 쉬지 않았으며, 그 결과 유대인이면서도 이스라엘 입국을 거부 당하는 일까지 겪어야 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말하는 '합법적'이란 '불법적이지만 이스라엘 정부가 승인하고 미국이 묵인한'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촘스키의 관점은 이 한 문장에 압축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한쪽에서는 팔레스타인을 테러 집단을 규정하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행위를 정당방위로 주장한다. 그러면서 계속 평화를 파괴하는 건 팔레스타인 쪽이라고 한다. 이 내용은 어쩌면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내용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서구의 언론에 의해서 보여지는 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한다면 과연 누가 침략자인지부터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시오니즘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자기 중심적 세계관이 여전히 서구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은 아닌가? 성경 속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갈리리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광야를 건넜던 고난의 행군을 지금의 세계로 그대로 옮겨온 것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쟁 아닌가.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가당키나 한 일인 것인지. 촘스키는 그렇다고 어떤 해법을 내놓지는 않는다. 다만 누군가의 암묵적 동조 혹은 지원 하에 힘의 균형은 이미 기울었고, 따라서 지금과 같은 역학관계에서는 결국 한쪽은 불리할 수밖에 없는 전쟁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라틴아메리카과 미국과의 관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이제는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에 대한 미국의 정치 개입과 친미 정권 수립을 위한 그들의 비밀스런 지원, 폭력적 강압 또한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이미 로메로 주교의 죽음과 칠레의 아옌데 정권 등에서 대리인을 통한 미국의 지배를 강화하고자 한 미국의 노력은 많이 알려져 있다.

닉슨이 말합니다. "칠레에서 우리의 주 관심사는 (아옌데가) 입지를 다지고 이것이 전세계에 그의 승리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예비 지도자들이 자기들도 칠레처럼 양다리를 걸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남아메리카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이렇게 하고도 무사하리라는 인상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전세계가 우리를 우습게 볼 것이다." 심지어 주류 학계에서도 미국이 민주주의를 지지한 것은 전략적·경제적 이익에 부합할 때뿐이라고 인정합니다. (p.156)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주도권이 약해지게 되면, 이는 곧 세계에 대한 미국의 주도권 약화를 의미 했기에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 그 어떤 정권도 자신들에게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에 아이티 또한 속해 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다. 얼마 전부터 아이티의 어린 소녀 한 명을 후원하고 있는데, 그 아이가 살아가는 나라에 대해서 내가 너무도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미안해졌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가난과 잦은 자연재해로 신음하는 그 나라는 아직도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떨쳐 일어섰던 기억마저도 이젠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그저 한달에 한번, 작은 소녀 하나에게 생활비 보내는 일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다라는 것이 미안하지만, 이제라도 좀 더 그 나라에 대해 알아보고 계속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게 그 아이가 살아가는 나라에 대한 나의 도리이리라.

그는 희망에 대해서도 전망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에서도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그때 한국인들은 잘 조직됐고, 함께 모였고, 열심히 싸웠어요. 매우 용감하게, 매우 효율적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잔혹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자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무너뜨렸죠. 이 땅에 대단한 민주적 혁명이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바람을 불러일으켰죠. 그때 한국인들은 누구에게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고, 오직 그것을 하고 있을 뿐이었고 해냈습니다. 기회는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많아요. 한국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의 독재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잖아요? 할 일이 수없이 많이 있으며, 당신들은 오직 당신의 역사 속만 들여다보면 됩니다. 그 속에 답이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들 모두가 진실을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 일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촘스키도 지속적으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발언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닐까. 가끔씩 느끼는 것이지만, 결국 정치란 멀리 있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정치이고, 일상 곳곳으로 정치의 영역은 이미 들어와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인식하길 바란다. 내가 쓰는 물건 하나가 어디서 오는 지 생각해 보는 것, 뉴스에서 전해오는 소식 하나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고 그 보이지 않는 이면을 떠올려 보는 것, 가만히 있어도 들리는 승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힘에 의해 억눌린 약자의 소리를 듣기 위해 조금만 더 몸을 숙여 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일 게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 곳곳에 퍼져서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날 것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을 등에 업고서 대통령을 납치하고 의회와 대법원을 비롯한 모든 민주주의 기구를 해산했으나 이내 민중 봉기로 무너진 군사 쿠테타 지도부를, 차베스 대통령이 그해 말에 사면한 사실도 좀처럼 주목을 받지 못햇습니다.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서구가 차베스의 모범을 따를 가능성은, 좋게 말해 비관적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문명의 충돌'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던집니다. 이 실마리를 마음속에 간직하기 바랍니다. (p.190)

어쨌든 그렇게 강하게 억누르며 이스라엘과 협공작전을 펼치고 있으나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잘 싸우고 있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는 시간이 흐를수록 쿠바로부터 시작하여,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등등 점점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해왔고, 그것은 점점 거스를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남에게 '악의 축'이라며 함부로 손가락을 치켜올렸던 그들은 과연 '악행'에서 자유로운 역사를 만들어왔는지 진지하게 자문해 보아야 할 때가 오고 있다면 과장일까.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이스라엘 못지 않은 선민사상으로 무장한 그들이 과연 우리의 후손들의 세상에서도 똑같은 위상을 지니게 될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본문 중에서...]

9.11은 잔인무도한 테러였지만, 그보다 더한 만행을 얼마든지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알카에다가 초강대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미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백악관에 폭탄을 떨어뜨려 대통령을 살해하고 사악한 군사 독재 정권을 세우고 5만~10만 명의 국민을 학살하고 70만 명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테러·전복 기지를 건설하여 전세계에서 암살을 자행하고 고문과 살해를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신나치 '안보국가' 수립을 지원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게다가 독재 정권이 경제 자문을 불러들여 몇 해 안에 미국 경제를 사상 최악의 재앙으로 내몰았으며 자문역들은 노벨상을 비롯한 온갖 영예를 받았다고 가정해봅시다. 9.11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 아닙니까? 칠레인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니까요. 1973년 9월 11일에 일어난 '첫 9.11' 말입니다. 다른 점이라고는 인구에 맞추어 수치를 바꾼 것뿐입니다. 하지만 첫 9.11 이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건들이었으니까요. (p.42)


역사를 통해 수없이 입증된 지배적인 운영 원칙이 여기에서도 관찰됩니다. 정책이 (천명된) 이상에 부합하는 것은 이익에 부합할 때뿐이라는 원칙 말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익'이라는 용어는 자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 집단의 이익을 일컫습니다. (p.67)


발언권을 가진 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지금껏 다져진 관행을 보면 그런 자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가장 정확한 지표는 (앞에서 언급한) 정치경제학자 토머스 퍼거슨의 '정치투자이론'으로, 선거는 투자자 집단이 나라를 주무르기 위해 제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p.145) 


이스라엘 카츠 교통부 장관은 "이스라엘 현 정부는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합법적 정착 활동을 동결하는 행위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말하는 '합법적'이란 '불법적이지만 이스라엘 정부가 승인하고 미국이 묵인한'이라는 뜻입니다. (p.248)


부시의 연설문 작가 마이클 거슨은 이렇게 썼습니다. "오바마의 인선에서는 중도뿐 아니라 성숙함이 느껴진다. 결과야 어찌 되든, 오바마는 놀랍도록 옳은 일을 하고 있다." 여기서 '옳은'은 곧 '오른'입니다. (p.296)


레흐 바웬사가 엘살바도르에서 노조 조직 사업을 했다면 '민간인 복장에 중무장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미 실종자 명단에 올랐거나 노조 사무실에 날아든 다이너마이트에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알렉산더 두프체크가 엘살바도르 정치인이었다면 헥토르 오켈리(과테말라에서 엘살바도르 암살단에게 살해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처럼 암살되었을 것이다.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이곳에서 인권운동을 했다면 헤르베르트 아나야(독립 단체인 엘살바도르 인권위원회의 수많은 지도자가 살해당했는데 아나야도 그 중 하나다)와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오타 시크나 바츨라프 하멜이 엘살바도르에서 자신의 책무를 다했다면 어느 운 나쁜 아침에 엘리트 살인 부대의 총탄을 머리에 맞은 채 대학 캠퍼스 뜨락에 누워 있었을 것이다. (p.365, Guardian 인용)


박완서 (지은이) | 현대문학 | 2010-08-02


간헐적으로 전쟁에 대한 작가의 경험을 접하긴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것은 그냥 나에게는 흘러간 역사의 일부였을 뿐이고, 지금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그 연배의 사람들에게 그 정도의 경험은 크게 다르거나 유별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러나 내가 그럴 수 있던 것은, 작가 스스로 그 경험으로부터 많이 걸어나와 담담해진 말투로 그냥 무심결에 한마디 툭 던지듯 얘기하는 것만을 접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절절한 아픔, 절절한 고통을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 그 경험을 접해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작품 자체를 깊게 접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박완서의 작품 중 읽은 것은 도대체 몇권이나 될까. 수필집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도 같다. 작가의 상상이 덧칠해지는 소설에 비해, 수필은 작가의 생각과 경험을 좀 더 날것의 형태로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 책을 읽는 그 시간들이 '박완서'라는 작가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처음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 6월이다. 전쟁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행복한 진로학교'에서 임영신 사모께서 얘기했던 이라크 아줌마가 떠오른다. 전쟁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냥 겪어낼 뿐, 그 고통이 어떠한 지를 알고 있기에 더 두려울 것은 없다고 했던 그 아줌마가 작가의 얼굴에 오버랩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인생을 저 바닥에서부터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던 전쟁. 그 전쟁이 바꾸어 놓은 인생이 어디 작가뿐이랴. 그 전쟁을 피해서 비겁하게 국민을 속이고 도망갔던 소수의 몹쓸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 땅의 민초 중에 그 엄청난 일을 일상처럼 평안하게 넘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또한 그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아직도 사회 곳곳에 음습하게 스며 있는 빨간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바로 그 증거 아닐까.

이 글들은 부끄러웠던 과거를 드러내 놓기를 주저하지 않아서 또한 아름답다. 한국전쟁 직후 미국인 PX 에서 일하며 만났던 박수근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부족할 것 없는 집안에서 귀하게 사랑 받으며 커서, 문학소녀가 되고, 서울대에 입학했고, 그것도 대학 중의 대학이라던 인문학부에 입학했던 상류계층의 처녀가 경험했을 사회의 밑바닥, 하지만 인정할 수 없는 현실, 그 속에서 겪어야 할 괴리들... 애써 나는 '그림쟁이'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그래서 나는 저들과 동등할 수 없다고 되뇌이며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은 많은 사람들을 '김씨, 이씨, 박씨...'로 불러가며 하대했던 일, 그러다가 알게 된 박수근 선생의 존재. 박수근의 그림은 박완서의 '나목'을 잉태했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이 여류작가와 한 시대를 공유했다고 본다면, 전쟁은 그럼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책을 덮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각나는 문장이 하나 있다. 작가가 한끼 밥이 가지는 의미를 이야기하며 아들을 잃었을 때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장례를 어떻게 치루었는 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의 큰 충격이었는데, 장례를 치르는 동안 몸저 누웠던 작가가 장례식때 죽은 아들의 친구들이 많이 왔었다는 이야기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밥이라도 잘 먹여 보냈냐'고 물었다고 한다. 흔히 우리가 하는 말처럼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나는 아직도 삶이 존엄한 지 치사한 지 잘 모르겠다.'

사람의 말년이라는 게 이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평화로울까하는 생각이 들게 작가의 일상과 상념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이 책. 나도 덮으면서 생각해 본다. 나의 삶은 지금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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