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 칸 (지은이) | 김희경 | 김현경 (옮긴이)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04-22 | 원제 The One World Schoolhouse (2012년)


어떤 교실. 몇십명, 혹은 백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한 교실에 있다. 교실 한켠에 컴퓨터나 태블릿들이 놓여 있고 몇몇 아이들이 이어폰을 꼽은 채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또 몇몇의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함께 토론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또 어떤 아이들은 반쯤은 고립된 공간에 들어가 조용히 책을 보고 있다...

과연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교실에서 가능한 일일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정도까지 오전반/오후반 경험을 했다. 학생수가 너무나 많은 나머지 두 개의 반이 하나의 교실을 공유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학교가 늘어나 주거지에 따라 아이들이 단체전학을 가면서 오전반과 오후반 제도는 없어졌다. 그래도 한반에 60명은 족히 되었고, 그 숫자는 고등학교 때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아이들의 예고 없는 전학 같은 게 아니라면 한 반에 60명은 기본이었다. 그 아이들이 일렬로 선생님을 쳐다보고 앉아서 듣는 일방적 강의,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학교였고 우리가 아는 배움의 방식이다. 

살만 칸은 이런 배움에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들마다 배움의 속도가 저마다 다른데 어떻게 한번의 강의를 통해 아이들이 배워야 할 내용을 다 습득하고 따라올 것이라 믿느냐는 것이 기본적인 문제 의식이다. 전적으로 동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아이들은 수학을 좀 더 빨리 배우고, 어떤 아이들은 언어 영역을 좀 더 빨리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빨리 배우는 것과 잊지 않는 것은 또 별개이고, 빨리 배우는 것과 그것을 정말 정확하게 이해했느냐는 또 별개일 수 있다. 그리고 다 이해한 것과 시험 점수 100점 또한 별개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을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 선생님의 강의가 끝나면 나머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된다. 선생님의 강의는 이미 끝이 나서 되풀이해서 들을 수가 없다. 궁금한 게 있다면 선생님께 질문을 해도 되지만, 엉뚱한 질문을 했다가는 왕따가 될 수도 있고 선생님께 구박을 받을 수도 있다. 용기가 있는 아이라면 교무실로 찾아가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냥 말아버린다. 그리고 참고서를 의지해서 혼자 독학을 하거나, 알만한 사람에게 질문을 하거나, 학원 선생님에게 물어보거나, 과외 선생님께 물어보거나. 그런데 학원은 대부분 선행학습의 학원이라 이미 학원에서도 한번 배운 내용일 경우는 자랑스럽게 물어보지도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유일한 대안은 과외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과외라는 것 자체가 정말 비정상적인 사교육 시장인 것이고, 실제로 과외를 시킬 수 있는 가정은 대한민국에서 몇퍼센트나 될까. 요즘은 EBS에서 인터넷 강의를 많이 듣기는 하는데, 그것 또한 입시 준비에 국한이 되어 있다. 이미 기초가 안 된 경우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기이다. 일단 선생님의 수업이 끝나면 나머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맡겨진다. 보통 어릴 때는 엄마에게 맡겨진다고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리고 나면 1년에 몇번 시험을 본다. 그리고 점수가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점수와 향후 학습 커리큘럼은 전혀 상관이 없다. 시험에서 내가 90점을 받을 경우, 우리는 그 점수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곧이 곧대로 해석하자면 100중에서 90을 알고 있다라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10을 실수로 틀린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나 90점이란 점수는 보통 상위권에 해당할 것이다. 80인 아이들, 70인 아이들, 그리고 심지어 50이 안 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을 보고 그 점수를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나면 모든 건 그대로 끝이다. 다음 진도로 진행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가 80점을 계속 받는다고 가정한다면, 그 아이가 이해 못한 그 20은 계속 쌓이게 된다. 그렇게 그렇게 중학교 내내 80으로 버텨오다가, 고등학교 가는 순간 한순간에 무너질 수가 있다. 그 이해 못했던 20으로 인해 그 아이의 머리속 지식에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셈이니까. 저자는 그것을 스위스 치즈 학습이라고 이야기한다. 

"미리 강의를 한 뒤 자전거를 2주간 타보라고 하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2주 뒤에 와서 '자, 한번 보자. 좌회전을 못하는군. 제동도 잘 못해. 80점!'하고 이마에 C학점 도장을 쾅 찍은 뒤 '자, 이번엔 외발자전거 타기를 해볼까?'하고 말합니다."

보통 '치즈'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삼각형 형태의 구멍이 숭숭 뚫린 에멘탈 치즈. 그 치즈처럼 중간 중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근근히 학습하게 되는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요행히 그것이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잘 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 구멍들로 인해 도로에 거대한 씽크홀이 생기듯 확 무너져 버리고 말아 버린다. 그것도 가장 중요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등학교 때에 말이다. 

그래서 저자가 주장하는 건 완전 학습이다. 인터넷에 학습 동영상을 올려서 얼마든지 자기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 학습이 가능하다. 자기 능력에 따라서 진도를 마구 뺄 수도 있고,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좀 더 시간을 투자해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면 된다. 그것도 무료로! 그렇기 때문에 한명의 교사가 30명을 맡는 것보다는 두명의 교사가 60명을, 세명의 교사가 90명을 한번에 맡아서 저마다의 속도로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고 여러명이 함께 협력하는 프로젝트 수업도 진행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에 어울리는 학교라는 것이다. 이미 저자는 일부의 학교에서 이러한 방법이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을 실험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사실 얼마 전부터 나도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우연치 않게 조카를 한두달 가르치게 되면서, 저마다 다른 아이들의 학습속도를 인정해주지 않는 한 대다수의 아이들은 시스템에 의해 강제적으로 도태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것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었던 차에 이 책을 읽고 많은 걸 생각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생각을 다듬기는 해봐야겠지만, 분명히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아이들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일단 살만 칸을 만나봐야 하나? ^^


[본문 중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배우는 방식에 관한 몇 가지 기본적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배운다. 어떤 이는 직관적으로 단번에 이해하지만 다른 이는 끙끙거리고 시간을 오래 끈다. 빠른 사람들이 반드시 더 영리하지도, 느린 사람들이 더 멍청하지도 않다. 더 나아가 빨리 알아듣는다고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속도는 스타일의 문제이지 상대적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거북이는 결국 토끼보다 더 많은 지식, 더 유용하고 '오래 남는' 지식을 얻게 될는지도 모른다. (p.37)


당신은 커리큘럼은 표준화할 수 있지만 배움을 표준화할 수는 없다. 그 어떤 뇌도 똑같지 않다. 지식의 대단히 미묘한 망을 거쳐가는 그 어떤 길도 같지 않다. 가장 철저하게 표준화된 시험조차 생각들의 어떤 부분집합을 학생들이 나름대로 파악한 이해 정도의 근사치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학습의 개인적 책임은 배우는 사람 각각의 독특함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p.72)


교육 분야 바깥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K-12라 부르는 교육과정, 시작될 당시에는 급진적이었던 혁신이 18세기 프러시아에서 처음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지도 모르겠다. 뻣뻣한 수염과 모자, 엄격하게 발맞춰 행군하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프러시아에서 우리의 기본적인 교실모델이 만들어졌다. 세금으로 지원하는 의무적인 공교육은 교육적 수단일 뿐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도 간주됐다. 애초에 공교육은 독립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와 교사, 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왕의 권위에 굴복하는 가치를 배워 충성스럽고 다루기 쉬운 시민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도입됐다. (p.99)


가족들이 그저 같이 보낼 수도 있는 시간을 숙제에 쓰는 게 과연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일까? 연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미시간대학교에서 실시한 대규모 조사의 결론은, 더 나은 성취 점수를 내고 품행상의 문제를 덜 일으킬 가능성을 예견하는 가장 강력한 단독 예측변수는 숙제에 들인 시간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의 빈도와 시간이었다. (p.139)


변화의 확실성은 변화라는 속성의 완전한 불확실성과 함께, 교육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에 심오하고 복잡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내게 가장 기본적인 교육은 아주 명백해 보인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10년이나 20년 뒤에 무엇을 알아야 할지 우리가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가르치는 내용보다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가르치는 법을 배우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p.220)


창조적인 일은 마감시간에 맞출 수 없다. 천재는 시간기록계를 찍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아인슈타인에게 "좋아, 이 상대성 같은 건 그만 접고 이제 유럽 역사를 공부하자"라고 말한다거나 미켈란젤로에게 "천장을 위한 시간은 끝났으니 이제 벽을 칠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창의성과 경계를 확장하는 생각을 완전히 파괴하는 이러한 다른 버전들은 학교에서 늘 일어난다. (p.296)


천재성은 물론이고 창의력을 가르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히 억압할 수는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교육의 공장형 모델은 정확히 그렇게 하도록 완강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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