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 임영신 | 박기태 | 송인수 | 주상완 | 임경수 | 최영우 (지은이) | 시사IN북 | 2011-06-07


가끔씩 내 아이가 크면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까 상상해볼 때가 있다. 어쩌면 상상이라기보단 바램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나도 미욱한 인간이기에,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아이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욕심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러다가 다시 또,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인생이라는 이성이 동작을 하게 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아이의 미래'란 여전히 나에게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보게 만들어주는 하얀 백지 상태와 같게 느껴진다.

몇년 전 어떤 행사에 참석했다가 초대 손님으로 윤도현의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워낙 좋아하는 가수이기도 했고, 마침 임신 중이라 한동안 그 어떤 문화 행사도 참석하기 힘들었던 나에게 그날의 행사는 오랜만에 즐길 수 있는 굉장한 호사였다. 무대에 윤도현이 올라오고 기타를 튜닝하는 동안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고, 노래가 시작되면서 나는 걷잡을 수 없는 흥분상태가 되었다. 임신 7개월의 배만 아니었으면 펄쩍 펄쩍 뛰며 무대 바로 앞까지 뛰쳐나갔을 수도 있었을텐데,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그 짧은 몇곡의 순간들을 한껏 즐겼다. 그러다가 문득 가슴이 먹먹해지며 드는 생각...

"아... 우리가 아이가 커서 윤도현 같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건 굉장히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버무려진 생각이었는데 굳이 애써 정리해보자면 이런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기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 그러면서 그것을 통해 적어도 자신의 생활비를 벌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가능하면 그 일을 통해 남들에게 기쁨 혹은 행복, 즐거움,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기에, 그냥저냥 밥벌이의 수단으로만 기능하기에 더더욱 나는 우리 아이가 그렇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것 같다.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하려면 부모로서 과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이 그날 이후 나의 가장 큰 과제가 되었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누군가 나에게 세상에 이렇게 많은 직업이 있다는 걸 알려줬다면,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일들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 지도 몰라'라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선택을 했을 수는 있겠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우리 아이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직업들, 혹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몇몇 좋은 직업들을 얻기 위해 애쓰지 않고, 정말 자기가 좋아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내 그 분야에서 직업을 찾고, 그렇게 살면서 한발 더 나아가 남들에게 기쁨이나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살았으면 정말 좋겠다.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박원순, 평화 여행가 임영신, 반크의 대표 박기태 등...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2010년에 진행한 '행복한 진로학교'의 강좌를 책으로 엮은 이 책은, 지금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어떻게 다다르게 되었는 지를 일곱명의 사회적 멘토의 체험이 실려 있다. 돈에 가치를 둔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들의 현재 일자리가 좋은 일자리가 아니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이 사람들은 일단 자신의 현재 상태에 행복함을 느끼고 만족하면서, 타인을 위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자기 밥벌이까지 하고 있으니 현대 사회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진정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아닐까?

정답이 실려 있지는 않다. 다만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낼 수 있고, 학교 안에서 배우는 것은 우리 삶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이에게 내가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도록 몰아세우며 '이것이 네가 성공하는 길'이라고 합리화시키고 있지는 않은 지, 나의 기준으로 아이의 행복을 재단해서 아이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할 시간조차 빼앗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보며, 마찬가지로 현재 나의 삶에도 적용해 본다. 지금 내가 행복한 지, 나의 일을 사랑하고 있는 지. 정말 어려운 문제다.


[본문 중에서...]

제게 맞는 삶의 보폭이 있고 제게 맞는 삶의 속도가 있을 텐데, 그것이 시민운동의 속도와 다르다면, 저는 그 안에서 도태되거나 혹은 그 안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포기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직면하게 됐죠.(임영신)


나는 내 인생에 두 번의 전쟁을 겪었고, 세 번째 전쟁을 맞을 참이다. 이라크 사람이 전쟁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전쟁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힘이 있다면 우리는 전쟁을 이겨낼 일상의 경험이 있다. 무섭지 않은 게 아니라, 두렵지 않은 거다. 고통의 크기를 모르기 때문에 무지한 게 아니라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 무심한 거다.(임영신, 수와드 아줌마)


그 사람이 정말 그것을 배웠는 지 증명해줄 수 있는 권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배움은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가르쳐줄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배웠다고 증명해줄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졸업장이나 수료증을 주지 않는다.(송인수, 맨발대학 벙커로이)


가난한 이웃에게 매일 조금씩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주다가 더 이상 나눠줄 것이 없는 상태로 자기 인생을 종결하는 것, 그것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죽음과 십자가를 '미분'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씩 썰어서 나중에는 제로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 그렇게 해서 '적분'하면 나중에 한 번의 죽음과 십자가로 정리되는 삶. 이렇게 사는 것도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송인수)


부모는 교육적 배려를 하면서도 자율을 허용해야 합니다. 부모가 방치하지 않고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아이가 마음껏 시행착오를 할 수 있도록 관용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아이가 잘못하면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울타리도 안 쳐주고 아이의 삶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아이와 싸웁니다. 성적은 몇 점 맞아야 하고, 너의 진로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느니 하면서 시시콜콜하게 간섭하죠. 나중에 보면 아이가 해야 할 것까지 부모가 대신 고민하고 있습니다.(송인수)


자산이 될 만한 경험을 쌓아줄 필요도 있어요.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중학교 이후에는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긍정적이 되느냐 아니냐는 주로 어린 시절에 결정됩니다. 그 이후에 세상과 사람에 대한 관심과 돌봄을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체험을 시키고 부족하면 독서를 하게 하고 말이죠.


인문학적 정신이란 게 꼭 책과 글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평생 시골에서 농사만 지은 농부에게 남을 돕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분을 충분히 인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아이가 좋아하는 영상이나 노래, 운동선수 등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깊이 있는 소양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책을 강요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네요.




안희경 (지은이) | 오마이북 | 2013-01-31



7명의 석학이 들려주는 희망은 어떤 것일까. 그 석학들의 면면이 마음에 들어서 장바구니에 넣어놓고도, 왠지 딱딱하고 재미 없는 원론적인 이야기들만 어설픈 번역체로 나열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책 소개를 자세히 살펴보니, 일단 대담집이었고, 그 인터뷰어가 한국인이었으며, 그 인터뷰이가 직접 정리하는 책이라는 것에 다시 호기심을 느꼈다. 그럼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재미가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에 책을 골랐다.

과연, 노엄 촘스키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로버트 서먼의 쿨한 혁명 이야기를 출근 길 지하철 안에서 읽다가 내리는 역을 놓칠 뻔 했고,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오는 15분 동안 그 여운을 느끼느라 음악도 듣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를 되뇌이기만 했다. 심지어 노엄 촘스키 교수가 크레인 위의 김진숙 지도위원과 나누었던 교감, 그리고 김진숙 지도위원의 답장을 읽으며 코끝이 찡하기까지 했다. 

로버트 서먼의 'Cool Revolution' 역시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분노와 증오가 어우러진 혁명은 유사 이래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그의 말에 대한 진위 여부를 떠나서, 지금 우리가 처한 사회에서의 변혁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Cool Revolution 이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전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더이상 없으며 결국 모두의 파멸만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군대에서 배우는 전쟁 서적에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는 95%가 군인이라고 나오지만, 현대 사회의 전쟁에서는 95%의 사상자가 민간인이라는 그의 지적을 우리 모두 잘 새겨봐야 한다. 그러면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데, 여성이야말로 차가운 영웅이라고 서먼 교수는 이야기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박근혜는...? 서먼 교수의 대답은 이렇다. 여성은 여성을 지지해야 하는데, 그것은 여성성을 가진 지도자를 의미한다. 사라 페일린의 경우는 여성이었지만, 그는 남성성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렇다면 박근혜의 경우에 대해서도 명쾌한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여성인 나는 여전히 과연 여성성이 Cool Revolution 에 도움이 되는 지 잘 모르겠다. 단지 역사적으로 볼 때, 남성에 비해 좀더 평화적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육체적 특성으로 인한 것이지 정말 여성 안에는 내재적인 평화 유전자가 존재하는 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동의하기가 어렵다. 난 여자이지만 여자를 믿을 수가 없다! ^^

그 이후의 대답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조지 레이코프의 '승리하는 프레임'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이후 선거철이면 수도 없이 듣게 되는 '프레임'의 실체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나도 그 책을 읽었기에 프레임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프레임을 선점해야 하고, 상대방의 프레임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것이 현실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된 프레임을 선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는 아무도 알고 있지 못한 듯 했다. 알면서도 맥없이 당하는 상황이랄까. 하지만, 그가 얘기하는 프레임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우리만의 언어들을 다시금 정의해 내야 하는 것, 그러면서 가장 근본이 되는 도덕적 프레임을 고수하는 것, 그렇게 긍정의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외에, 경쟁의 사회에서 행복이 무엇인 지를 고민해 보게 만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자연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피터 싱어, 즐거운 저항을 보여주는 코넬 웨스트, 생명의 숭고함을 웅변하는 반다나 시바...

반다나 시바와의 대담을 읽으면서는 가슴이 참 아팠다. 

우리 나라의 대표 기업 중 하나인 포스코가 인도에 투자를 하고 자원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상사류의 대기업들은 기존의 무역업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의 자원 개발에 뛰어든 지 꽤 오래 되었으니, 포스코도 예외일 수는 없을 터. 그런데 그 와중에 인도의 마을 하나를 도로로 뒤덮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그들에 대한 철거와 이주 과정에서 큰 반발에 부딪혔다. 그들은 시위를 했으나, 국가와 기업이 자행하는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어린 아이와 여자들이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반다나 시바는 이렇게 우리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인도에서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음에 기초한 번영을 얻고 싶은가요? 우리는 하나의 인류입니다. 이는 '나는 오른손의 번영을 돕기 위해 내 왼손을 자를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더불어 강정마을과 밀양, 평택 대추리, 양양댐, 그리고 용산을 떠올리게 된다. 자국민에게도 똑같은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사람들인데 저개발국가의 약자들에게야 오죽하겠는가.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번영은 어떤 것인가?

세계적 석학들이 들려주는 인문학의 향연이랄까. 책을 덮었을 때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발동 걸린 김에, 사둔 지 한참 된 노엄 촘스키의 책을 꺼내서 읽어야겠다.


[본문 중에서...]

미국 헌법제정회의(1787년 5월)에서 이런 말이 오갔어요. "만약 우리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갖는다면 그 속에서 대중의 다수는 그들의 의지를 표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난한 사람이 다수가 될 수밖에 없고, 그들은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는 데 표를 쓸 것이다. 농지를 다시 구획하는 토지개혁 등을 통해 그들은 땅을 나눌 것이다." 헌법 제정자들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고 목청을 높였고 다수가 권력을 누리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죠.(p.40, 노엄 촘스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도 빼고 노예도 빼고 자유를 가진 남자들하고만 토론했습니다. 그는 아테네에서 '다수가 지배하는 일이 생긴다면?'이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아리스토텔레스와 매디슨은 같은 질문을 마주했습니다. 하지만 답은 정반대 방향으로 도출됐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은 불평등을 감소하는 것입니다. 그는 복지국가를 이루는 법이 답이라는 데 도달했어요. 모든 사람들을 본질적으로 중간 계급으로 만들어야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p.40, 노엄 촘스키) 

나는 한국 사람들이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그때 한국인들은 잘 조직됐고, 함께 모였고, 열심히 싸웠어요. 매우 용감하게, 매우 효율적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잔혹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자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무너뜨렸죠. 이 땅에 대단한 민주적 혁명이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바람을 불러일으켰죠. 그때 한국인들은 누구에게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고, 오직 그것을 하고 있을 뿐이었고 해냈습니다. 기회는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많아요. 한국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의 독재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잖아요? 할 일이 수없이 많이 있으며, 당신들은 오직 당신의 역사 속만 들여다보면 됩니다. 그 속에 답이 있습니다. (p.42, 노엄 촘스키)

선거를 포기하면서 그 공간을 그저 폭로의 공간만으로 활용하면 안 됩니다. 이는 권력의 키를 최악의 인간들에게 내주는 겁니다. 우리는 덜 나쁜 악마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며, 완전히 새로운 것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이상주의자가 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이는 롬니 같은 이들의 실체와 또 그네들이 주장하는 경제정책의 파괴성, 그리고 군대에 대한 멍청한 자세를 분별력 있게 보려 하지 않는 태도예요. 차이점을 살펴봐야 합니다.(p.58, 로버트 서먼) 

증오에 사로잡힌 오늘, 증오는 탐욕과 함께 한다. 세상의 탐욕과 증오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탐욕과 증오부터 조절해야 한다. 거대 자본이 못되게 굴더라도 우리 안의 분노를 그들이 떠안을 이유는 없다. (p.67, 로버트 서먼)

전쟁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습니다. 핵무기를 가져도 사용할 수가 없죠. 왜냐하면 그 누구도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쪽 다 파멸하죠. 이렇게 극단으로 치달으면 결국 전쟁을 멈출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이 전쟁이 만들어내는 결말이며, 거대한 힘을 가진 그 어느 편도 상대를 무찌를 수 없다는 진실입니다. (로버트 서먼)

리처드 슈로브 "한 사람이 고요를 발견하면 세상은 그만큼 더 고요해지죠. 한 사람이 조금 더 분명하게 세상을 대하게 되고, 그렇게 맑아지면 세상은 그만큼 더 맑아집니다."

정부가 개입해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곳에 정부의 책임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저 시장이 조절할 것이다 또는 자연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타인이 배를 곯고 있는 것이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거죠.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악에 대항하면 그 악을 막아낼 수 있고, 착한 정의를 이루고자 하면 그 선을 행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p.180, 피터 싱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나는 가난한 나라들에게 주는 도움의 양을 엄청나게 늘릴 겁니다. 지구의 빈곤을 줄일 거예요. 나는 공장식 축사를 없앨 겁니다. 그래서 동물이 비록 도살되어 고깃덩이가 되더라도 죽기 전까지는 짐승다운 생을 살게 하겠어요. 그리고 나는 불필요한 고통을 줄일 겁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게에서 의료 서비스가 이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 삶을 절박하게 이어가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사용되는 것을 볼 겁니다.(p.186, 피터 싱어)

마지막 나무가 죽고, 마침내 온 강이 오염되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다음에야 인간은 돈을 먹고 살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p.  아메리카 인디언)

당신의 목소리를 찾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타인에게 용기를 북돋워줄 수 있는 거죠. 그렇게 힘을 채워주는 자가 진정한 블루스맨, 블루스우먼이에요. 이런 사람들의 노래는, 비록 어둠에 대한 것일지라도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줍니다. 그래서 계속 싸우고 사랑하고 웃음 짓고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거예요. 우리에겐 이와 같은 희망이 필요합니다. 이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블루스는 낙관적이지 않아요.

오늘날 단 10개의 기업이 230억 달러 규모의 상업용 종자 시장의 32퍼센트를 점유하고, 유전공학적으로 조작된 변형종자 시장의 100퍼센트를 통제하고 있답니다. 이런 기업에서 유종한 종자들의 경우 그 종자를 키우기 위해 꽇ㄱ 구비해야 할 살충제가 한 쌍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농약 시장까지 장악하는 셈이죠. (p.241, 반다나 시바)

새로운 교배 종자들은 해충에 취약하기 때문에 살충제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가난한 농민들은 종자와 농약 모두를 같은 회사에서 외상으로 구입해요. 그러다가 해충이 마구 들끓는다든지 불량 종자가 대규모로 섞이면 그 해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그럼 농부들은 빚내서 구입한 그 살충제를 먹고 죽습니다. 인도 와랑갈 지역에서는 1997년에 400명이 자살했어요.(p.242, 반다나 시바)

농사는 땅과 사람을 살리는 순환 활동이 아니라 단순하고 기계적인 노동이 됐습니다. 여성은 공장으로 이동하고, 아이들은 공짜 영양원을 잃었죠. 수출 목표를 달성하여 외환소득을 늘릴 잉여농산물을 얻어내려는 정책은 여성, 어린이, 환경의 조건을 악화시켰어요. 간디가 말하길, 어떤 결정을 하든지 가장 약한 마지막 사람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마지막 어린이를 생각하라고 바꾸고 싶습니다.(p.254, 반다나 시바)

문득 2011년 늦가을에 인터뷰했던 생태학자 조애나 메이시 선생의 호소가 떠올랐다. "내가 만약 밍크라며, 내가 만약 바위라면, 내가 만약 우라늄이라면...... 이렇게 명상해 보세요. 우리 인간은 이런 상황에 스스로를 놓고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게 집중하며 명상하는 동안, 내 가슴은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바위의 호소로 뜯겨나갈 듯했다. 젖이 불어 어기적 서 있는 젖소의 고통 또한 내 아이에게 처음 젖을 물리던 그 때의 진저리 나는 아픔으로 다가왔다.(p.264)




임혜지 (지은이) | 푸른숲 | 2009-09-21 | 초판출간 2009년


보통 사람들이 우리 나라와 선진국을 비교할 때, 비교가 되는 나라들은 뻔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그러다, 요즘엔 북유럽 국가들이 종종 등장한다. 발전된 자본주의, 산업의 발달을 비교할 때는 주로 미국이나 영국이 언급되는 것 같고, 민주주의나 정치 제도, 사회보장제도 등이 주제일 때는 독일과 프랑스가 주로 언급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프랑스나 독일은 비교적 리버럴하고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막연한 동경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 같다. 나에게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어서, 가끔은 내가 그곳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고, 내 아이들이 그런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드는 느낌은 어느 사회나 겉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실제로 겪는 것 사이의 간극은 굉장히 크다는 것이다. 물론, 그 나라들이 알고 보니 정말 후졌더라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어느 나라도 세계사의 흐름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고, 특히 요즘같이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세상에서는 더더욱 사회 내부의 갈등 요인이라는 것이 한 국가에만 국한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족 혹은 인종 간의 갈등, 세대 갈등, 교육 이슈, 빈부 갈등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하나도 없으며, 그 정도와 양상이 다를 뿐 결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여러 갈등과 논쟁, 그리고 크고 작은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를 통해 역사는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보통 과거사 청산 혹은 역사적 잘못에 대한 사죄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일본과 독일을 종종 비교한다. 모든 역사적 잘못을 부인하고 합리화하는 일본과 총리가 폴란드에 가서 무릎을 꿇는 행위까지 해가면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는 독일을 비교하며 일본을 꾸짖곤 한다. 하지만 독일 내부에서도 일본의 우익 못지 않게, 신나치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왜 우리가 이렇게까지 반성해야 하는가, 도대체 언제까지 반성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선조들이 잘못했는데 왜 우리까지 속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와 이웃한 나라가 아니고,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나라여서인지 몰라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국가들이나 유태인들이 들으면 공분을 살 만한 발언들이 종종 공개적으로 표출되거나 일상적인 사람들의 대화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다소 의외였다. 나는 정말 그들이 뛰어난 민족성을 지녔다고 생각했고, 정말 과거에 대해 참회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100%는 아닐지라도 98% 쯤은 말이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결국 우리도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지었고,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속죄를 하고 있는 지 생각해 보게 됐다. 우리는 베트남에게 공식적으로 사죄를 하지도 않으면서, 일본에게만 앙앙대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정말 생각해 볼 일이다.

외국인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나라의 큰 사회적 이슈 중 하나인 다문화 가정과 관련한 문제를 그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겪고 있다. 그들의 경우는 터키인인데, 경기가 상승기조이고 노동력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그들을 필요로 해놓고, 통독 이후 경기가 바닥을 치면서부터는 그들로 인해 국내 고용 상황이 더 나빠지고,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사회적 보장을 똑같이 누리는 바람에 오히려 독일인들이 피해를 본다며 그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모습은 내가 상상하고 있던 독일 사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독일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선민의식이, 그곳에서 반평생이 넘게 살아온 한국인을 이방인 취급하고 차별하는 것으로 표출되는 상황이라니...

전반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결국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인 일들을 가지고 우리 국민들을 탓할 것도 아니요, 괜시리 선진국이라는 데를 갖다 붙여서 비교하며 나무랄 일도 아니다. 물론, 우리보다 조금 더 앞서 나가 있는 나라들을 살펴 배울 것은 배워야 하는 게 맞겠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선망의 대상으로 삼거나, 우리를 비하하는 일은 없어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한국인 여자와 독일인 남자가 만나 이룬 가정은 여러 면에서 특별했다. 늘 환경을 생각하기에 차를 소유하지도 않고, 일상적인 곳에서 양심을 지켜나가며, 아이들에 관한 한 무한 신뢰를 보낸다. 그렇기에 늘 행복할 수 있었고, 늘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며, 아이들은 기대 이상으로 바르게 커주었다. 과연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나도 환경을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내몸 편한 걸 일단 우선으로 삼는다. 그래서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곳도 귀찮다고 차를 몰고 나설 때도 많다. 열심히 기부도 하고 나누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돈 내는 걸로 스스로 만족할 뿐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을 인용한다면,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충분히 가고 있지만, 문제는 가슴에서 발까지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이들에 대해서도 아직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께 가서 "우리 아이들은 성적이 좋진 않지만, 성격이 좋은 아이들이니 괜찮다."고 얘기할 수 있는 당당함이 부럽다. 열두살 된 딸아이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1년 이상 사귀게 되면 내년에 둘이 같이 캠핑을 가서 자고 오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그러라고 대답해줄 수 있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엄마 아빠는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콘돔의 갯수를 알지 못하니, 언제든 필요할 때 쓰라고 고등학생 딸에게 얘기해줄 수 있는 부모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아들에게 단한번도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는 부모는 또 얼마나 될까? 

여러 면에서 내가 본받아야 할 삶을 살고 있는 저자를 보며, 이 책을 읽는 내내 반성하고 또 반성하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에 단순히 환경과 관련한 책이겠거니 생각하고 집어 들었다가,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됐다. 올바른 부모 되기, 환경을 생각하기, 교육제도에 대한 고민, 인종과 민족 문제, 부부 간의 사랑 등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마주하는 저자를 보면서 나는 나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고 있는 지, 어떤 생각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지, 이 땅에서 올바른 지성인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는 지 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저자가 말한 대로 '세상은 앞에서 활약하는 주연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배경을 이루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므로, 든든한 배경이 되기 위해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도록 노력해야겠다.


(본문 중에서...)

세상은 앞에서 활약하는 주연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배경을 이루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주연이 아님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이 '배경'의 위력을 항상 생각하며 '좋은 배경'이 되겠다는 뜻으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씨를 뿌리며 사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기로 했다. 티끌인 나에게 태산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p.71)


무기 수출국인 독일에서 내가 290유로나 빼돌려 피해자 어린이들의 의족을 마련하는 사업에 힘을 보탰으니 얼마나 장한가? 당장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하는 일이 바로 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기쁨 아니겠는가? 사회가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변치 않는 나의 가치를 확인한 것, 이것이 인생의 횡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p.77)


우리 아이들은 학교 성적은 그저 그래도 영재임에 틀림없다. 학교라는 거대한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적성이 비슷한 아빠를 따라 도약하는 아들, 취향이 다른 부모 밑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딸, 자긍심 지수를 학교 점수와 동일시하지 않는 현명함, 이런 점들이 모두 우이아이들이 영재라는 증거다.(p.81)


아이들 나이가 십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우리 부부는 그나마 쥐고 있던 고삐도 늦추고 느긋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어른이라고 우리가 더 잘하느 것도 없으면서,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들을 과소평가하고 참견하는 일이 낯간지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 곁에 친구처럼 있어줄 뿐이다.(p.96)


"그럼 앞으로는 당신만 먹어. 다른 사람들까지 먹을 필요는 없잖아. 바다 생선 안 먹고도 잘 살아온 사람들까지 맛을 들여 엄청나게 먹어대니 씨가 안 마르겠어? 정작 생선에 의지해온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빼앗긴 셈이고 말이야. 그건 변태야."


"공부도 안 끝난 애가 임신하면 어떡해? 그애 인생은 어떻게 되고?""인생이 어떻게 되긴? 우리 아직 건강하겠다, 부모가 힘껏 도와줄만 한데 아기 키우면서 공부하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그런 걸로 사람 인생 안 망쳐. 그런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우울증이나 마약 같은 마음의 병이야. 그건 부모가 암만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잖아."


동독인들은 통일 이후에 자신들도 당연히 누릴 줄 알았던 부와 안정 대신 실업과 상실감만 맛보았고, 자신들의 독일의 이등 국민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피해 의식을 가진 사람일수록 발아래를 살펴 자기도 밟을 자가 없는 지를 찾게 되는 법인지, 이렇게 해서 동독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야만적인 수난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p.177)


나는 모든 사회에는 주류가 있고 지성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류는 '주된 흐름'이란 말 그대로 전통을 이어가며 어제와 다름없이, 이웃과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다수이다. 그리고 지성인은 주류의 방향을 잡아주는 소수이다. 지성인은 개인의 양식에 따라 판단하고 이를 용기 있게 표현해 주류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정치권은 주류의 시녀일 따름이고, 주류의 물길을 조정하는 것은 지성인이다.(p.194)


이것은 국민을 속인 정부의 책임이다. 몇백만 외국인들을 돌려보내는 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고 실리적으로 부당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진작 고백하고 거기에 맞는 정책을 세웠어야 했다. 독일 국민에게는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이 손해가 아니라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보탬이라고 가르쳤어야 했고, 외국인들에게는 출신국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독일 사회와 자발적으로 융화할 수 있도록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었어야 했다.(p.228)


인간이 태고에 집단생활을 시작한 것은 생존의 가능성을 높여 종족 보전을 잘하자는 합리적인 이유에서였다. 한 나라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마치 손과 발처럼 긴밀한 공생관계에 있다는 것, 몸의 가장 약한 부분이 사람의 수명을 결정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의치가 곪아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머리가 좋아야 되는 일이지 마음만 착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p.231)


창조적인 인적자원을 매출하기 위해, 즉 기회의 평등과 재능의 개별적인 계발이 좀 더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학생의 인격이 좀 더 존중받는 학교 풍토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독일 사회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고 (핀란드를 모델 삼아) 교육 제도를 꾸준히 개선하고 있다. 학생들은 인적자원이기에 앞서 그들의 유일한 인생을 값지게 살 권리가 있는 영혼들이기에 더욱 그렇다.(p.239)


사람을 쓸데없이 초조하게 만들어 창조적인 사고를 배워야 할 귀중한 시점을 놓치게 만드는 등수 경쟁을 과연 누구에게 이익이 될까? '분할하라. 그리고 지배하라(divide et impera).' 이것은 기원전부터 서구 사회에 전래하는 널리 알려진 병법이다. 적을 따로따로 경쟁시켜 자기네들끼리 힘을 빼게 만든 후에 효율적으로 잡아먹으란 뜻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끼리 자진해서 경쟁이라니?(p.249)


죽음의 고통이 길어서 나쁘다는 건 우리의 생각일 뿐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죽음을 서서히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 게 메를린의 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p.257)



승효상 (지은이) | 컬처그라퍼 | 2012-10-23


지리란 공간과 인간의 만남이다. 땅이라는 평면 위에 인간이 살면서 서로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저 지형이 있을 뿐, 지리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덧칠하는 삶의 흔적은 공간을 의미 있게 만들고, 그 작용과 역사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학문의 경지로 승화 시킨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승효상에 의하면 건축 또한 땅에 새기는 삶의 기록이다. 건축가가 건물을 하나 지어 놓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건축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의해 완성된다. 그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이 다할 때, 그래서 그 공간이 폐허로 변할 때 그 때야 비로서 건축은 완성된다.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을 의미 있게 해주는 것은 인간들의 삶이란 점에서, 이 공간 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삶들은 다 저마다의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역사가 될 것이므로...

'빈자의 미학'으로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을 처음 듣게 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 설계 때문이었다. 내가 딱히 건축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이름이었지만, 유언이었던 아주 작은 비석을 어떻게 현실로 이끌어낼 지에 대한 궁금증 덕에 건축가의 이름 석자를 처음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저자가 여행 속에서 만난 많은 건축들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빈자의 미학'을 다시금 확인하고,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조근조근 읊조리듯 얘기하는 이 책은 참으로 정겹다. 이 사람의 건축 세계가 지향하고 있는 바 때문일까. 누구나 다 알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는 건축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딘가 구석에 숨어 있을 법한, 그리고 그 어떤 여행 상품에도 포함되지 않을 법한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기에 더욱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나도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이기에 그 대상들이 나에게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한국의 사찰이나, 정원 등 우리의 건축은 자연과의 조화를 우선시 한다는 말을 학창 시절 언젠가 한번쯤을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교과서에서만 한번 읽고 지나간 문장 하나가 지속적으로 나의 사유에 영향을 줄 수는 결코 없는 일.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배운다. 소쇄원의 정원과, 부석사에서 내려다본 산맥들, 병산서원과 선암사. 2년 전쯤 선암사에 갔을 때, 그 때 이런 사실들을 알고 갔다면 고즈넉한 산사에 담겨진 의미를 더욱 음미할 수 있었을텐데 무척이나 아쉽다.

독일의 하르부르크에 있는 기념탑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1미터 사방에 12미터 높이의 아주 단순한 입방체로 이루어진 탑, 사람들은 이 탑에 자신들이 겪은 파시즘의 상처를 기록하였는데, 놀랍게도 이 탑은 매년 2미터씩 땅 밑으로 가라 앉게 설계되어 결국 탑 제일 위까지 사람들이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였을 때 완전히 땅 밑으로 가라 앉았다. 분명히 탑이면서도 탑처럼 솟아 있지 않은 탑. 파시스트에 대한 저항을 기념하는 탑은 점점 가라 앉아 이제 흔적만 남았다. 남은 것은 이제 살아 있는 자들의 몫...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웅장하고 화려해야만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의 건물의 생겨나고 소멸되는 것, 도시가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 없던 길이 생기고, 다시 그 길이 없어지는 것, 결국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다. 그 어떤 건축물도, 그 어떤 인위적인 행위도 그것을 함부로 바꾸고 마음대로 움직여 나갈 순 없다.

"여행이란 공간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얻는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살아간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이지만, 그 흔적들 위에서 흘러간 시간을 되짚어 사람들의 삶을 유추하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진정 여행이 가진 힘일 것이다. 이젠 공간에 방점을 찍는 여행이 아닌, 그 안에서의 '시간'을 찾는 여행을 해봐야겠다.


(이하 본문 중에서 발췌...)

타자화된 이방인은 싫든 좋든 현실에서 비켜서서 그 현실을 끊임없는 비교와 평가를 통해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사유의 세계로 모는 자이다. 자기 스스로를 제도권 밖으로 추방하여 경계속의 현실을 목도하고 때론 비판하며 성찰하는 자, 이를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이라고 했다.


건축은 땅에 새기는 삶의 기록이다. 


지도 속에 나타난 마을 구조를 머리에 넣고도 그 길에 서면, 나는 그들의 삶이 만드는 일상의 예기치 못한 풍경에 새롭게 감동받는다.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이뤄지는 삶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공간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얻는 삶에 대한 성찰임을 다시 알았다.


나에게 건축과 도시는 무생물이 아니다. 건축이란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을 완공함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살게 되는 거주자의 삶으로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나로서는, 도시 역시 태어날 뿐이어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하는 생물적 존재라고 여긴다. 만약에 건축이나 도시가 완성되는 순간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붕괴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극단적이지만 그 완성의 존재체가 폐허인 것이다.


보이는 것은 침묵의 세계였으며 아마도 그게 이 절을 세운 목적이었다. 이 폐허는 쓸모없에 된 사찰이 아니었다. 여전히 우리 삶의 부질없음을 끊임없이 가르치는 '보이지 않는 절'이었던 것이다. 그게 참된 불교 아닌가......많은 파편이 지저분하게 남아 아직도 그 존재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서양의 폐허가 아니라, 건축의 숙명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맑은 수묵화처럼 존재를 비움으로 완결하는 폐허이다. 그게 바른 건축이요, 그로서 진실이었다.


대도시 서울에도 지금 남아 있는 가회동이나 인사동의 골목길은 아직도 아름다운 정취가 만만찮다. 그렇게 오래된 길만이 아니라 근래에도 그런 길을 볼 수 있는 곳이 있긴 하다. 바로 가난한 이들이 사는 달동네의 길들을 보면 우리가 길에 대한 생각을 원래 어떻게 가졌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길은 선이 아니라 공간이며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이고, 눈으로 보는 곳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곳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길들은 여전히 개발이나는 전가의 보도 앞에 맥없이 허물어지고 제거되고 지워지며 직선으로 뭉개지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의 길을 갖지 못하게 된 우리의 삶은 연결되지 못해 파편적이며 가두어진 채 때로는 방황하고 때로는 부유하는 것이다.


선조들이 가진 자연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명료함을 넘어 지혜로움 그 자체였다.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아 인위적으로 과장된 제스처를 가지는 것은 금기였으며, 놀이의 대상으로 자연을 농락하는 일을 경망스러운 것이었다. 자연은 그 자체가 선이요 동반자이며 공존의 대상이어서 함께 어우러지는 우리 자신인 것이다. 무슨 말인가. 그 실증이 소쇄원에 있다.


1986년 이 도시의 중심부 번잡한 길가 한 귀퉁이에 12미터 높이의 탑이 세워졌다. 이 탑은 하르부르크시 정부가 파시즘의 아픈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로, 공모를 통해 조각가 요한 게르츠와 에스터 샬레브 게르츠의 공동작을 선정한 바 있다. 이 부부 작가가 제출한 안은 1미터 사방에 12미터 높이의 단순한 입방체였지만, 이 평범하게 보이는 탑은 놀랍게도 매년 2미터씩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도록 되어 결국에는 모두가 사라지는 안이었다......어느 날 이 탑은 완전히 사라지고, 파시스트에 대한 저항을 기념하기 위한 이 탑이 놓인 장소는 비어 있게 될 것입니다. 불의에 대항하여 일어서야 하는 것은, 결국에는 우리 스스로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모든 도시와 건축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세운 자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아무리 튼튼하게 지었다고 해도, 중력의 힘에 의해 반드시 건축과 도시는 무너지고 만다. 때로는 경제적 이유로 붕괴되기도 하고, 더러는 자연재해로 혹은 테러로 사고로 모두 무너져 결국은 땅의 표면 위에 가라앉아 사라지고 만다. 영원한 것은 우리가 같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 기억만이 진실한 것이다.


손석춘 (지은이) | 철수와영희 | 2013-04-17


얼마 전 조봉암 평전을 읽다가 책의 주인공인 조봉암 이외에 궁금했던 몇몇의 인물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박헌영. 이 이름 석자 역시 수업시간에 얼핏 듣고 넘어간 기억과 함께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사람이란 것 말고는 딱히 아는 지식이 없었다. 조봉암 평전에는 그보다 조금 더 자세한 사항들이 나오긴 하지만, 아무래도 책의 포커스는 조봉암이다 보니 조봉암의 변절에 날선 비판을 하며 일제 말기부터 조봉암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고 나올 뿐 아니라, 조봉암 입장에서 다소 서운한 느낌도 가질 수 있도록 서술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룸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지만, 반대로 그렇다면 박헌영 입장에서는 조봉암을 어떻게 보았을 지에 대핸 궁금함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던 차에 우연치 않게 본 박헌영 트라우마. 이 책은 저자가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스님과 나눈 대화록이다. 원경스님의 기억속에 있는 내용들은 거의 그대로 가감 없이 전달해준다. 사람의 기억이야 윤색되기 나름인 데다가, 워낙 어릴 적의 기억들이고, 그 이후 고종사촌의 손에 의해 키워지며 다시 전해들은 이야기까지 더해져 기억의 신뢰도는 사람마다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으나, 어쨌든 가장 가까이서 접했던 유일한 목격자이자 증언자로서 그의 이야기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고, 독립운동을 쉬지 않고 하기 위해 자신의 똥까지 먹어야 했던 사람, 목숨 바쳐 공산당을 세웠고, 자기가 세웠던 그 공산당에 의해 처형된 사람. 아무리 봐도 조봉암과 오버랩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국내의 독립운동, 거듭되는 투옥과 도피, 지하생활,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등 계속 궤를 같이 하던 두 사람이 일제시대 말기 각자의 선택에 의해 노선을 달리 한다. 하지만 그 이후는 다시 비슷한 운명을 걷는다. 하나는 남쪽에서, 하나는 북쪽에서 자신의 신념에 맞는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을 한다. 농민과 농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것도 똑같다. 사상의 자유, 집회의 자유, 신앙의 자유, 그리고 성 평등,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을 대우하는 것, 친일파의 척결, 민주주의의 원칙 수립 등 나라의 발전을 위해 얻어내고자 했던 것도 완벽하게 똑같다. 하지만 그들은 각각의 나라에서 사법적 살인을 당하고 만다. 조봉암은 이승만에 의해,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 


그들이 꿈꾸었던 나라는 대단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친일파들에 대한 청산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봉건제 시절의 지주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많은 땅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있고, 민주주의의 원칙 따윈 이미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한 지 오래인 나라. 그들이 살아서 지금의 현실을 마주 대하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조선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고, 북조선노동당의 설립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던 2인자 김일성의 치밀한 정치에 의해 조선노동당의 2인자로 내려 앉고, 다시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사형 당하는 과정을 보면서 정치의 비정함, 김일성의 권력욕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지만, 박헌영이 조봉암을 변절자로 내몰고 그와 말한마디 섞지 않으며, 조봉암에 대한 왜곡된 보고를 소련에 했던 걸 생각하면 권력투쟁의 본질은 결국 나 아니면 안 되고, 상대를 누르지 않으면 결국엔 내가 무너지게 되는 약육강식의 정글논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박헌영이 남과 북 모두에서 실패자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건 어찌 보면 역사의 법칙일 게다. 저자는, 이토록 훌륭한 인물이 남과 북 모두에 의해 배척받는 현실이 옳지 않다고 느꼈고, 남에서는 공사주의자이기 때문에, 반대로 북에서는 미제의 간첩이기 때문에 금기시 되는 이름이었던 박헌영을 이제는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독립을 위해 애썼던 과정을 고려할 때, 게다가 그와 함께 했던 주세죽, 김단야 등이 이미 독립유공자로서 복권이 되는 상황이니만큼 박헌영 또한 제대로 평가되어야 함은 맞다. 하지만,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하기에는 박헌영보다 조금 덜 뛰어나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못한 채 묻혀야했던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빨치산들이 너무나 많다. 이 지점에서 원경스님의 지적은 지극히 옳다. "저는 박헌영 선생은 복권하더라도 가장 마지막에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동행자들에 대해 진실이 밝혀지고 또 그분들 한 분 한 분을 복권시켜 주는 것이, 그 자손들한테도 바람직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너무나 명확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조봉암과 박헌영이 여전히 독립유공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진보진영 내부에서마저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란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좀 놀랍다.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지금은 뉴라이트에서 활동하는 김영환에 의해서 그런 인식이 퍼졌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서 저자의 주장에 백프로 동의한다. "1980년대 주체사상을 학생운동에 앞장서서 전파한 김영환이 박헌영을 미제의 간첩으로 규정한 게 섣부른 판단이듯이, 그가 비밀리에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만난 뒤 조직한 이른바 뉴라이트의 반북운동 또한 섣부르다. 박헌영을 간첩으로 몰아세울 만큼 김일성주의에 투철한 김영환과 김일성주의 타도를 외치며 반북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영환은 정반대의 모습이지만 천박한 역사인식이라는 점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짚을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박헌영 트라우마인 것이 절묘하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을 의미한다. 어떤 충격을 겪었을 때 그 충격으로 인한 후유증이 지속적으로, 영구적으로 정신적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부당한 일을 행해놓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거나 덮기 위해 또다른 불의과 압박이 횡행하게 되고, 그것이 사회 전반에 걸쳐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에서 박헌영이라는 존재를 너무나 적절하게 표현해준 말이라고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마지막 말은, 우리 사회가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인물 박헌영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비롯한 이 트라우마는 병명도 모른 채 1953년에서 2013년까지 옹근 60년 동안 남과 북에 만연했다. 이 책은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는 첫 걸음이다. 모든 트라우마의 치료가 그렇듯이 박헌영 트라우마의 치유책 또한 박헌영의 진실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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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단계에 있어서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조선 민족의 완전독립, 토지개혁, 언론·집회·결사·신앙의 자유, 남녀동등의 선거, 피선거권의 확보, 8시간 노동제 실시, 국민개로에 의한 민족생활의 안정, 특히 근로대중 생활의 급진적 향상 등등의 기본적 문제를 해결한 구체적 내용을 가진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습니다." -  방송연설문 중


"오늘 조선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단계에 있다. 이 혁명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완전한 민족적 독립의 달성과 농업혁명의 완수이다. 즉 일본 제국주의 완전한 추방과 토지문제를 해결하는 새 정권 수립이다. 봉건과 자본주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혁명적으로 토지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대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분배하여야 한다. 또한 출판, 언론, 비판, 집회 및 시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도 중요하다. 공산당 및 기나 혁명적(합법적인) 단체들을 합법화하고, 정부 정책에 공산당이 참여권을 획득해야 한다. 일일 8시간 노동의 실현과 인민대중의 생활의 조속한 개조를 위해서도 투쟁해야 한다. 일본 식민주의자들에게서 토지, 산림, 지하자원, 공장 및 제조소, 운수, 우편, 은행을 몰수하고 그들을 국유화하여 국가 관리에 넘겨야 한다. 국가 재원으로 의무 교육을 실현하여야 한다. 정치와 경제부문에서 여성들의 지도적 역할을 강화할 것이다. 소득의 크기에 따른 세제를 실시하며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 - 8월 테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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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신탁/반탁운동에 대해서 명확히 알게 되었다. 국사 시간에는 소련이 반탁, 미국이 찬탁을 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아무 이유없이 소련의 지시에 의해 반탁으로 돌아섰다고 배웠던 것 같다. 그 뒤 대학에 와서 다시 역사 공부를 하면서 어렴풋이 그게 아니라는 걸 배우긴 했는데, 다시 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 이참에 확실하게 기억해둬야겠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무장관 회의. 당시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주둔하고 있던 한국 문제도 논의했다. 신탁통치를 기본으로 하는 미국의 제안과 민주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기본으로 하는 소련의 수정안이 토론되었다. 결국 12월 28일 영국의 동의로 협정이 체결되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표되었다.

1.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 하에 발전시키고, 일본 통치의 잔재를 빨리 청할 조건들을 조성할 목적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2. 연합국이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협력할 방안의 작성은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미소공동위원회가 수행한다.

3.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4대 강국에 의한 신탁통치의 협정은 한국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4개국이 심의한 후 제출한다.

3개국의 합의는 당시 38선으로 나누어진 한반도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할 때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점에서 분단을 해소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합의에 민주주의 임시정부 대목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신탁문제만 부각해 삼상회의를 '반탁'의 명분으로 반대한 세력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파탄시키고 결국 남과 북 양쪽에 국가가 수립된다. 

요컨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핵심 내용은 '찬탁, 반탁'이 아니라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의 문제였고 최장 5년 뒤 완전 독립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10년 '후견'을 받아들였고 오스트리아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10년이 지나 중립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뤘다.



인권운동사랑방 (엮은이) | 오월의봄 | 2013-04-19


나는 살면서 차별이라 할 만한 것을 겪은 적은 없다. 물론 국민학교 시절에는 선생님이 몇몇 친구만 더 좋아한다고 왜 차별대우하냐며 일기장으로 항의하기도 했었고, 가끔 엄마가 맛있는 걸 사놓고는 바로 안 주고 오빠가 오면 먹자고 할 때 왜 차별대우하냐며 엄마에게 앙탈부렸던 것 정도가 내가 겪은 차별이랄까.

그러던 내가 작년에 '차별'이란 것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경험을 했다. 작년에 우리 팀은 나까지 모두 5명이었고, 여자는 나 하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 나를 뺀 나머지 네 명은 골초. 그리고, 우리 상무님까지 골초. 그들은 틈만 나면 우르르 담배를 피러 나갔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그곳에서 많은 역사는 이루어졌다. 어느 순간 보면 자기들끼리 업무 분장이 되어 있다거나, 내가 전혀 듣도 보도 못했던 일을 자기들끼리 하고 있기도 했다. 한번은 팀장에게 어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전혀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냥 워낙 다수이다보니까, 그냥 자기들끼리 얘기한 걸 팀 전체가 얘기한 걸로 착각하기도 했고, 자기들끼리는 배려해준다고 어떤 결정을 내린 것이 나에게는 일방적인 통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너희들과 함께 담배피러 나가지 않는다고 많은 부분에서 난 차별을 당했다라고 그들에게 얘기한다면, 아마 그들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냐며 항변을 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분명히 난 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차별은 당한 사람이 분명한 목소리로 얘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차별을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차별금지법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종교적인 근거를 들이밀며 반대를 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법안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구체적인 차별이 어떤 것인지 증명해 보이라고 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좀 우스웠다. 어이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결국 차별은 당한 사람들이 이것은 차별이라고 알려주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직접적인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별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차별인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자신들이 받은 차별을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사회적인 여건이 조성되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사실 내가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게 차별이거든. 내가 당당하게 나가서 내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사회가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들쟎아. 내가 내 테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회가 그런 테두리를 만들고 있다고...." 라고 얘기하는 이 에이즈 감염인의 말처럼 말이다. 차별 받은 사람들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데, 무언의 힘이 의해 사회의 울타리 밖으로 계속 밀려나고만 있는데, 이들이 스스로 차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해서 이 사회는 평등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가?

"성소수자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거주하거나 일하는 공간에서 누군가 커밍아웃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곳은 아마도 성소수자들에게 무척이나 차별적인 공간일 것입니다.(본문 중에서)" 

이 말에 근거하면, 이미 내가 생활하는 모든 공간은 차별적인 공간이다. 우리가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공간, 또는 매우 개방적이고 평등하다고 생각했던 공간 모두가 차별적인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행했던 나의 배려는 이미 누군가에게 차별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이제는 깨달아야만 한다. 무심결에 지나쳤던 공간들에서 전해오는 신호들을 감지하고, 그들에게 '수신확인'을 통해 힘을 실어주는 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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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거주하거나 일하는 공간에서 누군가 커밍아웃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곳은 아마도 성소수자들에게 무척이나 차별적인 공간일 것입니다.(본문 p.114 중에서)

'도가니'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렇게 분노로 이글대던 사람들이 영화가 끝나자마자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고 우르르 나가서 엥리베이터 앞으로 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다시 간극이 느껴진다.(본문 p.162 중에서)

정상적인 몸의 기준, 아름다운 외모의 기준이 강요되는 문화, 그러한 사회에서 살아갈 때,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자신을 부정하거나 그 기준에 맞도록 나를 바꿔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사람들은 장애인뿐만이 아니다. 장애인을 억압하는 근거와 기준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면, '장애'의 문제는 '장애인만'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장애/비장애의 경계가 가지는 문제에 대해 더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본분 p.163 중에서)

사실 내가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게 차별이거든. 내가 당당하게 나가서 내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사회가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들쟎아. 내가 내 테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회가 그런 테두리를 만들고 있다고.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를 꼭 강압적으로나 법적으로 규제하는 것만 차별이 아니야......그런데 차별이라는 건 보이지 않는 거야.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 같은 거. 목소리를 내려면, 진짜 어떤, 한 사람이 인생을 걸고 해야 되는 거야......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다같이 나서서 얘기하는 건 힘들쟎아. 그게 바로 사회구조에서 나오는 차별이야. 지금 당장 아무런 피해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지나가지. 그대신 그만큼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는 거야.(본문 p.180 중에서)

차별은 성별, 직업, 학벌, 나이 등에 따라 쉽게 분리되어 나열되지만 알고 보면 이렇게 모두 치밀하게 엮여 있다. 어느 한순간, 특정한 누군가에게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차별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구조들이 서로 연결되어 우리 모두의 삶의 궤적 속에 세세하게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서로의 삶을 발견하며.(본문 p.250 중에서)

닥쳐오는 불운이나 억울한 일을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자 했을 때 그것을 목격한 이가 증언자가 되고 그 옆에 자리하는 것. 그리고 그 차별을 정성을 다해 설명하고자 계속 애쓰는 것. 그리고 차별에 대한 법적인 구제의 과정을 사인간의 문제로 한정하지 않고, 법적인 구제 의미가 사회 관행과 권력을 바꾸어나가는 것을 지향하도록 견인하는 것. 이것이 문제를 보편화하는 방향이 아닐까.(본문 p.278 중에서)


김현진 (지은이) | 다산책방 | 2011-12-21


나의 20대가 어땠는 지 가만히 생각해본다. 

운이 좋게 시험 점수를 잘 받아 한번에 원하는 대학엘 갔고, 고등학교까지 짓눌렸던 내 자유를 마음껏 풀어 헤치며 살았다. 방종까지는 아니었을 지라도, 나의 기본적 원칙 중 하나였던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에 맞추어서 대학 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본 것 같다. 단 하나 소개팅 빼고. 아,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시험 때 공부는 했고, 강의도 들었고, 과제도 냈고 8학기만에 무사 졸업했으므로 한 걸로 치자.

졸업 후 잠시 '業'에 대한 방황 후, 기업체 취직으로 방향을 틀었다. 물론 기업체 취업이 쉬웠던 건 아니다. 나의 스펙을 보고 들어오라고 허락해준 곳은 오로지 지금 이 곳,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밖에 없었다. 그래서 뭐하는 회사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입사를 했고 난 무거운 엉덩이로 주저 앉아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운이 좋았다. 몇년 후 수능으로 입시 제도가 바뀌었으니, 비교적 오랜 기간 안정된 입시 제도의 혜택으로 큰 혼란 없이 대학에 들어왔고, 유난히 수학이 어려웠던 시험 탓에 수학 점수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나는 입학하며 등록금을 제하고도 오히려 방학 동안 놀 수 있는 용돈을 학교로부터 받았다. 학교를 졸업할 당시 서울에서 지리교사 TO 가 없었던 것은 정말 운이 나쁜 케이스였고, 결국 지금도 그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졸업하던 그 때까지만 해도 맘만 먹으면 취업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입사하던 그 즈음에는 IT 붐이었고 기업마다 SI 업체를 비대하게 늘려가던 시기였다. 내 입사동기가 500명이 넘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다 몇년 후 바로 IMF 가 터졌고, 그 이후부터 대학생들의 취업은 갈수록 어려워져만 갔다. 나도 한참을 팀의 막내로 살아야만 했다.

이 책을 읽다보니, 나의 20대는 어떠했는 지 돌아보게 됐고 그러다보니 장황한 삶의 궤적이 그려진다. 하지만, 이것은 저자의 파란만장한 20대에 비하면 너무나 우아하고, 고상하고, 편안하고, 그래서 배부르기만 한 20대이다. 나도 치열하게 살았다고 주장하는 20대이지만, 비할 바가 아니다. IMF 이후의 어려워진 경제를 온몸으로 껴안고, 그 때 벌거숭이 상태로 사회를 마주 대해야만 했던 불행한 세대. 더군다나 가진 것 하나 없는 집에서 태어나, 오히려 가정을 돌보아야만 했던 준소녀가장. 자기 몸 뉘일만한 공간이 없어 더부살이를 해야만 했고, 점점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서 살아야만 했던 가난한 청춘. 이땅의 88만원 세대가 어떻게 살아야만 했는 지, 그리고 지금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맨얼굴 그대로 보여주는 바람에 가슴이 아프다.

한없이 당당하고,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이겨내는 눈부신 젊음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슬프다. 그런 젊음에게 이제 난 배때기 부른 기성세대일 뿐... 그러나 이제 내 얘기가 아니라고, 어깨 툭툭 치며 극복하라고 하며 뒤돌아서기에는 이 굴레가 너무나 크고 깊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미래라면 그저 암담할 뿐이다. 청춘이 처한 현실을 청춘에게 해결하라고 해서는 답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저자는 자기의 청춘 자서전을 통해 웅변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자격지심,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불쑥 불쑥 튀어나와 당황하게 만드는 허황된 욕심들, 가진 건 없지만 나눌 줄 아는 소박한 옛동네의 인심들, 가진 것 없어 내 몸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위태롭게 이어지는 사랑, 다양한 삶의 모습과 인간 군상들이 지금은 하나씩 짓밟혀져 간 서울의 뒷골목들을 무대로 이야기 꽃을 피워낸다. 간혹 피식거리며, 간혹 시큰거리는 콧등을 만져가며 휘리릭 책장을 넘기도록 만드는 저자의 필력이 놀랍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들이 이 땅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그나저나 왕십리의 이모네 곱창, 약수동의 나주순대국, 목동 시장의 만두집은 정말 맛있을까? 궁금타...


"세상에는 기억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러나,나는 기억하기 위하여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 기억이 죄다 휘발되기 전에, 글씨를 쓴다." (본문 중에서)

"몸이라는 게, 조금 놀아보면 그 맛을 기가 막히게 알아서 계속 편하게 살려고 그래요. 자꾸자꾸 게으름 피우게 놔두면 막 놀고 자빠지고 싶어 해, 아주 습관이 돼서 놀려고만 드니까 좀 후둘겨 패서라도 움직여줘야 돼요..... 그래야 아 이거 내가 해야 되는구나, 싶어서 하지." (곱창집 아주머니 말씀... 본문 중에서)


이원규 (지은이) | 한길사 | 2013-03-01


대학교 입학하고 나서 한 달이 지났을 즈음이었나. 선배들로부터 4.3 항쟁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4월이라면 4.19 정도밖엔 떠올리지 못했던 나로서는 새로운 현대사 공부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 나라 현대사의 많은 부분을, 1000피스짜리 퍼즐을 끼워 맞추듯 간간히 조합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라고 하면 그저 고조선과 삼국시대, 고려, 조선만을 떠올리게 되는 우리 나라의 역사 교육. 나에게도 그건 예외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근현대사, 특히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직후의 이야기들은 여전히 장님 코끼리 만지듯, 여기저기서 조각조각 떼어와 누더기를 깁듯이 그렇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봉암. 죽산 조봉암. 가만... 내가 이 사람을 알았던가? 뭔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 같았는데, 그게 이승만 때였나 아니면 박정희였나? 박정희 때는 장준하 선생이었으니 이승만이었나? 공산당이었다고도 들었던 것 같은데, 박헌영하고는 또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아, 정말 이런 무지렁이를 봤나. 도대체 아는 게 뭐야? 혼자 이렇게 자학하다가 저자의 이름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깜짝 놀란다. 아니, 이 분은 내 주례 선생님이시쟎아? 흐음... 무조건 장바구니에 넣고 구매 버튼을 누른다.

이전에 쓰셨던 김산 평전, 약산 김원봉 평전과 책의 느낌은 비슷하다. 평전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일생 전반을 마치 소설처럼 강약을 가지고 긴장감 있게 풀어내면서도, 여러 연구자료들을 인용하면서 다양한 측면에서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인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 과정과 국가 수립 과정에서 누구보다 힘을 다해 일했으면서도 후세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이 크신 듯 했다. 그래서 연속해서 평전을 내놓으셨는데, 이를 위해 선생님께서는 중국과 러시아를 수도 없이 답사하셨고, 참고자료 열람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방대한 양의 자료를 모두 읽고 참조하셨다. 그리고 이 세번째 평전의 경우는 세상에 나오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조봉암을 다시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긴장감 있는 구성과, 일제치하에서 독립, 한국전쟁과 2,3대 대선까지의 다이나믹한 대한민국 현대사에 조봉암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어우러져서 한번 잡은 책을 놓기가 어렵다. 절대 얇지 않은 분량임에도 옛날 이야기 읽듯 하다가, 신문의 정치면을 읽듯 하다가, 다시 르포 기사를 읽듯 하면서 만나는 조봉암은 정말 이승만이 두려워할 만한, 또한 우리 역사에서 절대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인물임을 확인했다.

모스크바에서 조선공산당의 대표로 인정받을 정도로 탁월한 식견과 뛰어난 두뇌, 그리고 누구나 감화시킬 수 있는 언변을 지닌 사람이었고, 진보주의자로 방향을 선회한 이후에도 농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제대로 된 발전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최초의 농림부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추진했던 선구자적 인물, 사민주의야말로 조국이 나아가야 할 이상향임을 확신하고 진보주의자로서 두려움 없이 앞으로 전진했던 시대의 등불. 일본에 의해 억압 받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선택했고, 국가를 살리기 위해 가족마저도 뒷전이었던 사람. 그러나 결국 그로 인해 억울하게 갇혀 외롭게 죽어야만 했던 사람.

지금도 사민주의 정도의 이야기만 해도 종북이라는 말도 안 되는 굴레를 씌워대는 상황이니, 이승만이 모든 권력을 휘두르던 한국 전쟁 직후에는 오죽했을까. 그런 상황에도 주변의 협박과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신익희가 급서하지 않았더라면 조봉암은 좀 더 살아서 시대의 소명을 담당할 수 있었을까? 그저 아쉽기만 하다. 게다가, 조봉암이 법살당한 지 9개월만에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군다나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반대로 조봉암의 죽음 또한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중요한 다리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아쉬움이 달래질 듯 하기에... 

다행히 조봉암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재판은 바로잡아졌다. 지난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 합의부는 재심을 열어 죽산 조봉암의 무죄를 선고했는데 이는 유가족에게 큰 보상이 될 수 있었다. 다만, 여전히 독립유공자로서 서훈 수여가 유보된 것은 한가닥 아쉬움이다. 정황 상 일본에 의해 거짓으로 성금 모금 광고가 신문에 실린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광고 하나로 인해 친일 행적이 있기에 신청이 반려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이 사회의 '정의'가 어디에 있는 지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 또한 하루 빨리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언제쯤 아이들은 각자 알아서 하는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 나라의 역사를, 그것도 승자에 관점에서만 기록되고 왜곡된 것이 아닌 약자의 입장에서도 보여지는 역사를 배울 수 있게 될까? 김산평전과 약산 김원봉, 그리고 죽산 조봉암. 이 세권을 책장에 잘 꼽아 놓고 나중에 우리 아이들에게 꼭 읽게 해야겠다. 그리고 말해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 역사 속에 뿌려진 뜨거운 피와 젊음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함을, 그렇기에 우리는 의를 위해서는 더욱 치열하게 싸우고 그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꼭 거두어야 함을...


"우리가 못 한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후배들이 해나갈 것이네.결국 어느 땐가 평화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조봉암 옥중 유언>


전우용 (지은이) | 투비북스 | 2012-10-20


트위터를 하다보면, 온갖 쓰레기같은 잡담 속에서 보석같은 글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Following 하는 사람이라면야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구나 하고 넘어가지만, 누군가 retweet 한 글이 크게 느껴질 때면, 애초의 원 저작자를 찾아보곤 한다. 그러다가 알게 된 사람이 바로 histopian 이었다. 가끔씩 어떤 일이 사회적 이슈가 될 때, 역사의 한 토막을 가져와 그 사안을 비평하고,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어떻게 풀어나가는 것이 현명한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곤 했다.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된 histopian... 역사학자 전우용이다.

서울도시사, 근대의료사 등이 전공 분야라고 하는데, 그렇다 보니 우리에게 멀지 않은 역사적 시대이면서도 역설적이게 우리가 제대로 알기 힘든 근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끌어와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난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역사 말하기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갔던 적도 있다. 그리고 대학 입시를 앞두고는,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세계사를 선택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결국 사회 시간에 뒤에 앉아서 혼자 공부하고, 얼마 되지 않는 애들만 따로 모여 선생님께 특강을 듣고 그랬다. 그래서 역사 이야기는 나에게 언제나 즐거움이다.

우리가 역사를 충분히 공부했다면, 그리고 그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을 충분히 새겨 보았다면 지금 이 사회의 수많은 부조리들도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FTA 문제도 그렇다. 그 약속이 어떤 것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막연한 희망과 근거 없는 낙관을 가지고 대응했다가 강대국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일들을 분명히 겪었음에도 마찬가지의 막연한 기대만으로 FTA 를 추진하고, 찬성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왠지 더 잘 살게 될 것이란 희망을 사람들이 갖도록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학교에서 배우던 따분한 역사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는 역사. 그 역사를 사람들이 만나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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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에 명동에서는 깡패들이 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당시 한국 깡패는 1930년대 미국 마피아와 방불했지만, 경찰은 FBI 보다 훨씬 무능했습니다. '쌍팔년도'는 이 무법천지의 1955년을 말합니다. 단기 4288년이었습니다. 이후로 "지금이 쌍팔년도냐"는 터무니없는 일을 겪을 때 쓰는 속어가 됐습니다.(본문 '쌍팔년도' 중에서)

지금의 통장을 조선시대에는 통수라고 했습니다. 조선시대 통수의 의무 중에는 혼자 사는 과부 집 굴뚝을 살피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안 하는 사람 없다지만, 홀로 된 과부 중에는 체면 때문에 차마 밥 빌러 다니지 못하고 버티다 굶어 죽는 사례가 간혹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체면까지 배려해 가며 은정恩政을 베푸는 것이 인정仁政이었습니다. 복지가 뭔지 모르던 시대에도, '찾아가는 복지'가 있었습니다.(본문 '통수와 과부 집 굴뚝' 중에서)

울타리와 같은 말이 '우리'입니다. '나'는 한 우리 한에 모여 있는 집단 속의 개체, 즉 '낱'에서 온 말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남은' 자들이 '남'입니다. 그러니 '남'의 반대말은 '나'가 아니라 '우리'입니다.나는 6척짜리 몸뚱이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우리는 가족, 직장, 나라, 인류, 우주로 무한히 확대할 수 있습니다...저 한 몸 겨우 들어갈 작은 우리를 짓고 그 밖에 남은 사람들을 다 적대시하는 것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일입니다.(본분 '나, 우리 그리고 남' 중에서)

지금의 서대문 독립공원이 문을 연 것은 1992년이었습니다...그러나 뜻밖에도 광복회에서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곳에 '위안부'를 기념하는 시설을 두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반대했습니다. 순국선열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나요...좋은 일, 즐거운 일은 자랑거리가 되지만, 아픈 일, 괴로운 일은 교훈거리가 됩니다. 자랑은 현재에 속하나 교훈은 미래에 속합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합니다.(본문 '순국선열의 명예' 중에서)


김재호 (지은이) | 서해문집 | 2013-01-19


느즈막한 결혼과 귀한 딸, 세상에 둘도 없는 딸바보...

금은방을 꾸리며 풍족하진 않지만, 그래도 세 식구 행복하게 살던 가족에게 닥친 '도심 재개발'의 소용돌이. 어떻게든 투자한 돈은 건지고 싶어서, 다른 데로 행여 이사를 가더라도 지금 하던 가게 정도는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했기에 아빠는 힘겹게 곧 철거될 건물의 옥상, 망루에 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 함께 있던 동료들은 화마에 휩싸인 컨테이너 속에서 죽었거나, 살기 위해  뛰어 내리다가 다쳤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함께 망루에 올랐던 이웃들을 죽인 살인자가 되어 법정에 서게 되고 그렇게 3년의 시간을 차가운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 3년의 기간 동안 이 딸바보 아빠는 사무치게 가족을 그리워 했다. 그러나 매주 먼 곳까지 와야 하는 10분짜리 접견에 딸은 자주 올 수 없었고, 자신을 누구보다 아껴주던 아빠를 순식간에 잃게 된 아이는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빠가 감옥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한 통신 수단인 편지마저 길다고 읽지 않는 딸을 위해 아빠가 생각해낸 것은 바로 그림.

아빠는 그렇게 하루하루 구할 수 있는 모든 종이와 필기 도구를 동원해, 종이 위에 사랑을 새겨 나갔다. 비록 능숙한 솜씨는 아니지만, 어릴 적 어딘가에 멈추어서 더이상 꿈꾸지 못했던 '그림'에 대한 소망도 함께 키워나갔다. 

프로다운 멋진 그림은 아니지만, 그림 한장 한장에서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지지 못한 절망과 미안함, 그렇게 만든 현실에 대한 분노, 그래서 더욱 커져만 가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커가는 아이 옆에 있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어딘가 어색하고 부족한 듯한 그림으로 가득 채워진 책 한권을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본다. 도대체 무엇이 이 가족을 이리도 힘들게한 것인지,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이 사람들을 도심의 테러리스트로 만들었는 지, 아빠와 함께 하는 즐거움을 이 아이에게서 뺏어간 사람들은 누구인지, 그들은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 지...

우리 아이들에게 정의가 바로 서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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