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 (지은이) | 휴(休) | 2013-03-26


나에게는 그리스와 산토리니는 거의 동의어나 다름 없다. TV 속에서 온통 흰색과 푸른빛으로만 이루어진 햇살 가득한 그 마을을 보는 순간, 언젠가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나의 버킷 리스트에 추가되면서, 산토리니는 그리스, 그리스는 산토리니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감히 주장해 본다. 이 책의 표지가 폐허가 된 신전이나 올림푸스산이나 절벽의 수도원이 아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흰 계단인 이유도 산토리니가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처음엔 그냥 여행기려니 했던 책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종교 전문기자로 활동을 하며 불교와 기독교를 넘나드는 공부와 여행을 통해 다져진 저자의 내공은,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서 제목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곳곳의 유적들을 직접 발로 확인하며, 그에 얽힌 그리스 신화와 역사적 사실들을 끄집어 내고, 그것을 다시 삶의 자세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들로 연결 짓는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수도원들을 돌아보며, 옛 수도사들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엄격하게 다스렸는 지,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런 고난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였는 지를 생각해 본다. 3세기 후반 은둔 수도승이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그들은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공간에 수도원을 짓고 하나둘씩 모여 살면서 오로지 신과의 교감만을 추구하며 끊임 없이 자기를 버리고 또 버린다.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게 했던 것일까.

"수도승을 뜻하는 '모나코스(monarchos)'는 그리스어 어근 '하나(monos)'에서 왔다. 수도는 욕망에 따라 헤매는 방랑을 쉬고 본래 신성과 하나가 되어 현존하기 위한 여정이다. (p.63)"

사람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신성을 찾는 끊임없는 행군이 바로 수도원의 생활이었고, 수도사들은 그렇게 자신을 정복함으로써 진정한 해방을 찾고, 이 땅에서 가장 고결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하늘 위의 수도원 메테오라에서 발견한 수도자들의 유골 더미를 통해 과연 죽음과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돌아본다. 수도사들의 유골이 무덤이 아닌 오가는 길목에 쌓인 채 그대로 드러나 있는 낯선 상황은 수도사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에 대한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들이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죽음 그 자체인가, 아니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인가. 산토리니가 에게해의 진주가 될 수 있었던 것 또한, 자연재해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폐허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아닐 뿐, 작은 섬 하나가 완전히 죽고 나서야 산토리니는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이 된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면, 그에 대한 거부는 우리를 괴롭힐 뿐이니 받아들여야 함을 그리스 여행은 지속적으로 깨닫게 해주고 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여행하며 국가와 리더는 어떠해야 하는 지를 생각하고, 소크라테스와 히포크라테스, 피타고라스의 고향을 여행하며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관심 있게 본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인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작성했다고 알려져 있는 파트모스 여행이었다. 과연 사도 요한이 그 섬에서 홀로 지내며 본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세상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은 요한이 무엇을 알리길 원하셨던 걸까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한 지금의 기독교는 초기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순수한 신앙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있는가도...


그리스 여행의 마지막은 터키 트로이에서 끝이 난다. 커다란 목마가 안으로 들어가고 결국엔 트로이를 멸망시키게 되는 과정은 '불안'이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는 지를 보여준다. 전쟁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랬고, 그것이 신의 뜻임을 믿고 싶어했다. 그래서 신이 보낸 선물이라는 헛된 주장에 쉽게 넘어가게 되었고, 결국은 어리석은 믿음이 스스로를 멸망시키게 되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 떠오른다.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영향력 안에 잡아두고자 하는 것은 자본 혹은 권력, 종교가 늘 행해오던 전략이다. 이 물건을 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동질감을 가지지 못할 것 같고, 지금 이것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 같고, 지금 돈을 모으지 못하면 불행한 미래가 당장 현실로 닥칠 것 같은 불안. 이 불안 마케팅이 우리로 하여금 과욕하게 하고, 나만 바라보게 하고, 끝없는 탐욕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답답한 현실. 저자가 묻는 마지막 질문에 우리 모두는 답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선택 속에 숨은 트로이의 목마는 무엇인가?'


[본문 중에서...]

세상이 지겹도록 바뀌지 않는다는 불만의 소리가 높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자신이었다. 그리스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바꾼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우리는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를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인간은 생각을 바꿈으로써 죽음을 부활로, 절망을 희망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뒤바꿀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p.13)


이들은 신체나 계층의 장애가 비록 불편하기는 했지만, 결핍과 시련을 탁월함의 양분으로 삼았다. 인생이 빚어내는 최고의 요술은 이런 약자들이 상처를 아우라로 바꾸는 것이다. (p.14)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욕구를 모르고 이를 외면하고선 기쁨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과 쾌락만 좇다간 건강은 물론 영혼까지 잃어버릴 수 있다. 나는 과연 내가 무엇에 목말라하는 지 정확히 알며, 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가.

플라톤은 말한다. 

"남이 아닌 자신을 정복한 자가 고결한 최상의 승리자다."

성인의 옛 수행처는 벼랑 위 조그만 동굴이다. 40년간 짐을 버리고 버려 마침내 마음을 내려놓은 곳이다. 세상과 운명에 밀려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 전에, 스스로 집착의 무거운 짐을 비워버리고 날아갈 자, 날개는 그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이다. (p.37)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신이 되게 하기 위함이며, 하늘에 올라가 하느님과 함께하게 하기 위함이다." 정교회 초기 교부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성인의 말이다. (p.50)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차별을 거부했다. "그리스어를 못하는 사람이 야만인이 아니라 열린 마음 없이 타인들을 선입견으로 대하는 사람이 야만인이다." (p.73)


현대사회에서 그런 신적인 힘을 지니고 폭력 세상을 이끄는 이들은 누구일까. 아무래도 네오콘이 첫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유대인과 기독교 근본주의 결합쯤으로 볼 수 있는 네오콘은 '힘이 곧 정의'라고 신봉하는 이들이다. 미국에서 레이건 대통령을 거쳐 조지 부시 대통령 때 세력을 얻은 이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 국제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절대선'을 지키겠다고 나서고 있다. 타인이나 타국을 '악'으로 규정해 서슴지 않고 죽이면서 말이다. (p.99)


삶이란 그런 것. 오고 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슬픔과 고독뿐이다. 수도사들이 바위 끝 삶을 산 것은 슬픔과 고독 속에 자기를 가두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해방되기 위함이다. 그러니 나도 좀 더 대범하게 녀석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p.122)


태어난 자는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예외가 없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한 번만 통과하면 될 공포의 문을 수백 번, 수천 번 통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를 정말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병과 죽음 그 자체일까, 아니면 이에 대한 거부에서 오는 걱정과 불안일까.  (p.131)


또한 미신적인 종교일수록 '성직자는 전생에 쌓은 공덕이 많아 대우 받는 게 마땅하고, 천민들은 죄업을 많이 지어 고생을 겪는 것'이라는 운명론을 전파했다. 그러니 백성은 성직자와 왕족, 귀족들을 잘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인과론은 후생을 위해 자신의 삶을 책임 있게 살게 하려는 애초의 의도와 달리 삶의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이나 장애인들을 더한 고통에 빠뜨리는 반인권적 업보론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전후생론은, 돈과 권력과 명예가 타인에게 봉사하라고 주어진 것이라는 도덕적 의무론으로 보완되어야 하지 않을까.  (p.152)


현존하는 인류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빠른 100미터 기록이 9초대다. 치타는 3초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능력이 탁월하다는 데 있지 않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 탁월함을 이기적인 욕망의 추구에만 쓰는 대신 공익을 위해 쓸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p.198)


원만한 관계를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자기 밖에 설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스어 '엑스타시스'는 '밖에 서 있다'는 뜻이다. 자신 속에서 빠져나올 때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다. 그 축복은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자기'란 히스테리(자궁)와 동굴 속에서 나올 때 상태와 공명과 공감이 가능해진다. 미숙과 성숙의 차이는 주관 속에만 빠져 있느냐, '내 생각'에서 나와 객관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느냐의 여부다. (p.244)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들도 싫어하고, 내가 원하는 건 남들도 원한다. 싫어하는 것을 피하고,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만큼 좋은 관계를 지속시키는 비결은 없다.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상대방에게 협조와 사랑을 기대하고 있을 때, 상대방도 당신에게 관심과 배려를 기대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p.246)


그리스 철학은 국가를 위해 개인을 총동원하는 국가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성공이 별개일 수는 없다. 내적인 수행이 우선이냐, 외적인 제도 개혁이 먼저냐는 논의는 불필요하다. 둘 다 중요하다. 아테네는 둘을 함께 성취했다. 그들의 창조력은 놀라웠다. 아이, 이방인, 여성, 해방노예, 노예들을 제외하고 불과 3만 명의 시민이 이룬 정치, 철학, 문학, 예술의 금자탑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광휘로도 덮을 수 없을 만큼 찬란했다. (p.249)


테세우스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아테네 왕국의 후계자가 된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스스로 여는 자만이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 테세우스는 한번 들어가면 누구도 빠져 나오지 못한 채 괴물의 먹이가 되는 미궁 행을 자원하고, 14명의 소년소녀들 속에 섞여 크레타로 떠난다. 그가 헤라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최고의 영웅으로 불리는 것은 진정한 리더인 때문이다. 리더십은 자기만 사는 게 아니고, '더불어 살아가는 기술'이다.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힌 독재자와 달리 위인은 열정과 자기 희생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p.255)


멀리서 검은 돛을 본 아이게네스 왕은 아들이 괴물의 밥이 된 줄 알고 절망한 나머지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만다. 그래서 이 마다가 그의 이름을 따 '에게 해'가 된 것이다. 성급한 왕의 선택이 안타깝다. 지금 내 삶이 불행하다고, 자유롭지 않다고, 장애가 생겼다고 서둘러 세상을 버릴 일이 아니다. 고통의 시간은 클라이맥스를 고조시키기 위한 연극의 서막인지도 모를 일이니, 섣불리 인생을 비극으로 결말 지어서는 안 된다. (p.256)


행복은 무엇이 된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정인 지금 여기에서 좋은 것인데, 사람들은 자기가 꿈꾸는 삶을 사는 이들을 동경만 하고 그렇게 되기를 갈망만 한다. 하지만 자기가 아닌 누군가가 되려는 갈망이 과연 행복을 가져다줄까. 크레타 섬 역사박물관 직원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조르바를 좋아한다는 그에게 조르바의 삶을 동경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한다. 

"조르바를 좋아하긴 하지만, 조르바는 조르바, 나는 나."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면 지금처럼은 살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남보란 듯이, 내 뜻대로 살아보리라고.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 내일이 오면 그때도 타인의 삶이나 바라보며 내일이나 기약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카잔차키스가 붓다만큼 따랐던 니체는 말했다.

"다시 태어나 살고 싶을 그런 삶을 살아라."

내일 말고, 지금 당장 여기서! (p.275)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적인 가피를 비는 것일까. 외지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마치 기도하듯이 신전 주위를 돌고 있다. 자세히 보니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들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노쇠해 가고 병들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반겨지지 않는 사실이다. 허나 이를 거부하면 할수록 더욱 고통스러워지는 것은 '필멸'이 인간의 숙명인 까닭이다. (p.307)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주류 철학자들과 예수의 가르침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모든 인간이 아니라 '그들만'의 해방을 추구했다. 거기에 노예와 장애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방인, 여성 등도 낄 자리가 거의 없었다. 오직 시민들만이 자유와 해당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옹호됐다. 예수는 전혀 달랐다. 예수는 노예와 장애인, 여성처럼 소외되고 버림 받은 자들을 해방과 구원의 주인공으로 세웠다. 그것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성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배타성과 폭력성은 그 위대성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p.332)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로 여겨지는 '메타노이아(Metanoia, 회심)'은 그리스어로 '마음을 바꾼다'는 뜻이다. 의식의 변화를 말한다. 내면에 갇힌 시선을 외부로 돌리는 것, 자기만 챙기던 사람이 주위와 세상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 자기 조직, 자기 국가, 자기와 자기 집단밖에 모르던 사람이 그 밖에도 똑같은 인간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식물도 모두 존귀한 생명이며, 그들과 우리의 삶이 하나라는 진리를 개닫는 것이다. (p.333)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을 낭비하지 마라.

지금 가진 것도 전에는

원하던 것이었음을 잊지 마라. (에피쿠로스, p.357)


두려움에 떨며 강국 리디아의 식민지가 되어 노예의 길을 선택하려는 사모스인 앞에서 노예 이솝은 이렇게 말했다.

"운명은 이 생에서 인간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해주었다. 하나는 자유의 길로, 시작은 고되고 견디기 힘들지만 끝은 아주 평평하고 견디기 쉽다. 또 다른 길은 노예의 길로, 처음은 들판처럼 가볍고 평평하지만 끝은 매우 혹독하고 크나큰 고통 없이는 걸을 수 없다." (p.359)


트로이전의 승리자는 그리스 연합군 총대장 아가멤논 왕이다. 그 또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는 참전에 앞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달래기 위해 자기 딸을 바다에 던졌다. 왕비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딸을 재물로 바친 남편에게 앙심을 품고 칼을 갈고 있다가 트로이 전쟁에서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정부인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살해한다. 아가멤논이 딸을 죽인 그대로 도끼로 세 번을 내리쳐서.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의 복수에 나선 아들의 손에 죽는다. 대체 전쟁의 승리자는 어디에 있는가. (p.370)


기자라는 직업인으로 살면서 내가 새기고 있는 하나의 관점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하는가. 그들이 모두 칭찬하는가. 그러면 의심해 보자. 과연 정말 그런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모두가 비난하는가. 그러면 의심해 보자. 과연 정말 그런가.' 대중의 결정이 내 정당성을 결코 보장해주지 않는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것도 당시의 다수 대중이었다. 유대인 600만명의 학살도 대중의 동조 없이 히틀러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수의 도그마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갈 때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 (p.378)


살만 칸 (지은이) | 김희경 | 김현경 (옮긴이)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04-22 | 원제 The One World Schoolhouse (2012년)


어떤 교실. 몇십명, 혹은 백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한 교실에 있다. 교실 한켠에 컴퓨터나 태블릿들이 놓여 있고 몇몇 아이들이 이어폰을 꼽은 채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또 몇몇의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함께 토론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또 어떤 아이들은 반쯤은 고립된 공간에 들어가 조용히 책을 보고 있다...

과연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교실에서 가능한 일일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정도까지 오전반/오후반 경험을 했다. 학생수가 너무나 많은 나머지 두 개의 반이 하나의 교실을 공유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학교가 늘어나 주거지에 따라 아이들이 단체전학을 가면서 오전반과 오후반 제도는 없어졌다. 그래도 한반에 60명은 족히 되었고, 그 숫자는 고등학교 때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아이들의 예고 없는 전학 같은 게 아니라면 한 반에 60명은 기본이었다. 그 아이들이 일렬로 선생님을 쳐다보고 앉아서 듣는 일방적 강의,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학교였고 우리가 아는 배움의 방식이다. 

살만 칸은 이런 배움에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들마다 배움의 속도가 저마다 다른데 어떻게 한번의 강의를 통해 아이들이 배워야 할 내용을 다 습득하고 따라올 것이라 믿느냐는 것이 기본적인 문제 의식이다. 전적으로 동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아이들은 수학을 좀 더 빨리 배우고, 어떤 아이들은 언어 영역을 좀 더 빨리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빨리 배우는 것과 잊지 않는 것은 또 별개이고, 빨리 배우는 것과 그것을 정말 정확하게 이해했느냐는 또 별개일 수 있다. 그리고 다 이해한 것과 시험 점수 100점 또한 별개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을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 선생님의 강의가 끝나면 나머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된다. 선생님의 강의는 이미 끝이 나서 되풀이해서 들을 수가 없다. 궁금한 게 있다면 선생님께 질문을 해도 되지만, 엉뚱한 질문을 했다가는 왕따가 될 수도 있고 선생님께 구박을 받을 수도 있다. 용기가 있는 아이라면 교무실로 찾아가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냥 말아버린다. 그리고 참고서를 의지해서 혼자 독학을 하거나, 알만한 사람에게 질문을 하거나, 학원 선생님에게 물어보거나, 과외 선생님께 물어보거나. 그런데 학원은 대부분 선행학습의 학원이라 이미 학원에서도 한번 배운 내용일 경우는 자랑스럽게 물어보지도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유일한 대안은 과외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과외라는 것 자체가 정말 비정상적인 사교육 시장인 것이고, 실제로 과외를 시킬 수 있는 가정은 대한민국에서 몇퍼센트나 될까. 요즘은 EBS에서 인터넷 강의를 많이 듣기는 하는데, 그것 또한 입시 준비에 국한이 되어 있다. 이미 기초가 안 된 경우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기이다. 일단 선생님의 수업이 끝나면 나머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맡겨진다. 보통 어릴 때는 엄마에게 맡겨진다고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리고 나면 1년에 몇번 시험을 본다. 그리고 점수가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점수와 향후 학습 커리큘럼은 전혀 상관이 없다. 시험에서 내가 90점을 받을 경우, 우리는 그 점수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곧이 곧대로 해석하자면 100중에서 90을 알고 있다라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10을 실수로 틀린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나 90점이란 점수는 보통 상위권에 해당할 것이다. 80인 아이들, 70인 아이들, 그리고 심지어 50이 안 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을 보고 그 점수를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나면 모든 건 그대로 끝이다. 다음 진도로 진행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가 80점을 계속 받는다고 가정한다면, 그 아이가 이해 못한 그 20은 계속 쌓이게 된다. 그렇게 그렇게 중학교 내내 80으로 버텨오다가, 고등학교 가는 순간 한순간에 무너질 수가 있다. 그 이해 못했던 20으로 인해 그 아이의 머리속 지식에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셈이니까. 저자는 그것을 스위스 치즈 학습이라고 이야기한다. 

"미리 강의를 한 뒤 자전거를 2주간 타보라고 하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2주 뒤에 와서 '자, 한번 보자. 좌회전을 못하는군. 제동도 잘 못해. 80점!'하고 이마에 C학점 도장을 쾅 찍은 뒤 '자, 이번엔 외발자전거 타기를 해볼까?'하고 말합니다."

보통 '치즈'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삼각형 형태의 구멍이 숭숭 뚫린 에멘탈 치즈. 그 치즈처럼 중간 중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근근히 학습하게 되는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요행히 그것이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잘 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 구멍들로 인해 도로에 거대한 씽크홀이 생기듯 확 무너져 버리고 말아 버린다. 그것도 가장 중요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등학교 때에 말이다. 

그래서 저자가 주장하는 건 완전 학습이다. 인터넷에 학습 동영상을 올려서 얼마든지 자기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 학습이 가능하다. 자기 능력에 따라서 진도를 마구 뺄 수도 있고,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좀 더 시간을 투자해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면 된다. 그것도 무료로! 그렇기 때문에 한명의 교사가 30명을 맡는 것보다는 두명의 교사가 60명을, 세명의 교사가 90명을 한번에 맡아서 저마다의 속도로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고 여러명이 함께 협력하는 프로젝트 수업도 진행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에 어울리는 학교라는 것이다. 이미 저자는 일부의 학교에서 이러한 방법이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을 실험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사실 얼마 전부터 나도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우연치 않게 조카를 한두달 가르치게 되면서, 저마다 다른 아이들의 학습속도를 인정해주지 않는 한 대다수의 아이들은 시스템에 의해 강제적으로 도태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것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었던 차에 이 책을 읽고 많은 걸 생각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생각을 다듬기는 해봐야겠지만, 분명히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아이들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일단 살만 칸을 만나봐야 하나? ^^


[본문 중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배우는 방식에 관한 몇 가지 기본적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배운다. 어떤 이는 직관적으로 단번에 이해하지만 다른 이는 끙끙거리고 시간을 오래 끈다. 빠른 사람들이 반드시 더 영리하지도, 느린 사람들이 더 멍청하지도 않다. 더 나아가 빨리 알아듣는다고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속도는 스타일의 문제이지 상대적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거북이는 결국 토끼보다 더 많은 지식, 더 유용하고 '오래 남는' 지식을 얻게 될는지도 모른다. (p.37)


당신은 커리큘럼은 표준화할 수 있지만 배움을 표준화할 수는 없다. 그 어떤 뇌도 똑같지 않다. 지식의 대단히 미묘한 망을 거쳐가는 그 어떤 길도 같지 않다. 가장 철저하게 표준화된 시험조차 생각들의 어떤 부분집합을 학생들이 나름대로 파악한 이해 정도의 근사치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학습의 개인적 책임은 배우는 사람 각각의 독특함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p.72)


교육 분야 바깥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K-12라 부르는 교육과정, 시작될 당시에는 급진적이었던 혁신이 18세기 프러시아에서 처음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지도 모르겠다. 뻣뻣한 수염과 모자, 엄격하게 발맞춰 행군하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프러시아에서 우리의 기본적인 교실모델이 만들어졌다. 세금으로 지원하는 의무적인 공교육은 교육적 수단일 뿐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도 간주됐다. 애초에 공교육은 독립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와 교사, 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왕의 권위에 굴복하는 가치를 배워 충성스럽고 다루기 쉬운 시민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도입됐다. (p.99)


가족들이 그저 같이 보낼 수도 있는 시간을 숙제에 쓰는 게 과연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일까? 연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미시간대학교에서 실시한 대규모 조사의 결론은, 더 나은 성취 점수를 내고 품행상의 문제를 덜 일으킬 가능성을 예견하는 가장 강력한 단독 예측변수는 숙제에 들인 시간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의 빈도와 시간이었다. (p.139)


변화의 확실성은 변화라는 속성의 완전한 불확실성과 함께, 교육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에 심오하고 복잡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내게 가장 기본적인 교육은 아주 명백해 보인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10년이나 20년 뒤에 무엇을 알아야 할지 우리가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가르치는 내용보다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가르치는 법을 배우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p.220)


창조적인 일은 마감시간에 맞출 수 없다. 천재는 시간기록계를 찍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아인슈타인에게 "좋아, 이 상대성 같은 건 그만 접고 이제 유럽 역사를 공부하자"라고 말한다거나 미켈란젤로에게 "천장을 위한 시간은 끝났으니 이제 벽을 칠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창의성과 경계를 확장하는 생각을 완전히 파괴하는 이러한 다른 버전들은 학교에서 늘 일어난다. (p.296)


천재성은 물론이고 창의력을 가르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히 억압할 수는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교육의 공장형 모델은 정확히 그렇게 하도록 완강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p.291)




잭 런던 (지은이) | 이한중 (옮긴이) | 한겨레출판 | 2012-10-08


개인적으로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그 어떤 가상의 이야기들도 슬픔으로 끝나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한껏 양보해서 열린 결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래도 나는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내가 예술 작품으로 얻고 싶은 건 주로 행복한 느낌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리얼리즘은 그닥 내가 선호하는 장르가 아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부조리에 가득 차서 인 지는 모르겠지만, 리얼리즘의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내가 바라는 결말로 끝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내가 도대체 내가 이 책을 왜 샀는 지 모르겠다. 이것은 인터넷으로 책을 살 때 발생하는 부작용 중의 하나이다. 책을 직접 들춰보질 않기 때문에 책에 대한 소개만을 보고 골라잡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보니, 추천하는 사람과 나의 취향이 완전히 다를 경우엔 꼭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책을 소개하는 사람 또한 스포일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내용을 어중간하게 소개해 놓기 마련이다보니, 마지막 결말들이 나를 배신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밖에.

이 사람이 강철군화의 저자라는 것에 나도 모르게 끌렸나보다. 그렇다고 내가 그 책을 감명 깊게 읽은 것도 아니면서, 그냥 왠지 읽고 싶어졌달까. 뭔가 현실을 미화시키거나, 현실로부터 도피시키는 말랑말랑한 이야기 말고 다른 것이 목말랐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제목인 '불을 지피다'에서 뭔가 앞서 나가는 자의 이야기, 혹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현실을 밝혀주는 이야기, 그래서 희망을 지피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나 혼자 커다란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잭 런던의 단편집이다. 잭 런던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1876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온갖 육체노동을 어릴 때부터 경험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버클리에도 입학하지만 결국 졸업하진 못한다. 20대의 시기에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고, 알래스카의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에도 합류하는데, 이 때의 경험이 많은 소설의 소재가 된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는 종군기자로 일본과 만주 및 우리 나라에도 다녀갔다. 이때 펴낸 책이 <잭 런던의 조선 사람 엿보기>이다. 이후 집필에 전념하다가 마흔살의 나이로 요절을 했다. 

제일 첫번째로 등장하는 '스테이크 한장'의 이야기에서부터, 잭 런던이 경험한 밑바닥의 인생들, 곤궁한 생활, 암울한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다. 아동 노동의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는 '배교자'에는 자신의 유년기가 그대로 묻어난다. 읽다보면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그러다가 이주 노동자의 절망적인 삶을 그린 '시나고', 난파당한 배에서 벌어지는 인간성 말살의 현장 '프란시스 스페이트 호', 재물 앞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 '그냥 고기', 극한의 상황에서 과연 어떤 선택이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전쟁'... 아, 계속 가슴 답답하고 우울하고 속쓰린 이야기들만 나열된다. 책의 제목인 '불을 지피다'도 내가 생각했던 불이 아니라, 영하 50도를 넘나드는 혹한에 목적지를 향한 여정 속에서 추위를 달래기 위해 성냥으로 불을 지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경험이 너무나 혹독하여 생생했던 걸까.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묘사라든가, 척박한 환경에 대한 묘사, 그리고 절망 혹은 배신의 바닥에 도달한 사람들의 심리묘사가 굉장히 사실적이고 섬세하다. 마치 죽음의 순간까지도 경험한 사람같은 느낌이랄까. 

정말 좋아하는 류의 소설은 아니지만, 정말 오랜만에 접해본 리얼리즘으로 무장한 소설이었다. 작가가 살았던 그 시대의 사회상이 그대로 묻어나 읽으면서 내내 마음 졸이고, 가슴 아파해야 했다. 부디 아직 죽지 않았던 그 주인공들은, 그 이후로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 행복하게 생을 마무리 했기를...




노엄 촘스키 (지은이) | 노승영 (옮긴이)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11-09 | 원제 Hopes and Prospects


얼마 전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책을 보면서 촘스키가 쓴 책이 생각났다. 한참 전에 사두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읽지 않고 미뤄두었었는데, 촘스키와의 대담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의 가지들을 끄집어낸 덕분인지 빨리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촘스키가 얘기했던 민주주의와 촘스키가 바라는 세상, 그리고 세계의 경찰인 양 행사하는 미국의 세계 정복 의지에 대한 촘스키의 좀 더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예상대로, 이 책의 절반 내용을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이야기이고, 나머지 절반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이야기이다. 팔레스타인과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이야기들을 씨실로 해서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이야기를 엮어서 이른바 서구권에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 고발하고 있다.

촘스키는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 2세이다. 따라서 그의 관심의 영역이 전지구적임은 어쩌면 그의 삶의 배경 측면에서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관심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더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할 수 있다 하겠다. 그는 직접 팔레스타인도 방문을 했었고, 이미 오래 전 이스라엘·팔레스타인·미국과 관련한 책을 통해 세 국가의 실타래처럼 얽힌 갈등의 고리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두 국가 간의 거래와 지원 등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뒤로도 그의 발언은 쉬지 않았으며, 그 결과 유대인이면서도 이스라엘 입국을 거부 당하는 일까지 겪어야 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말하는 '합법적'이란 '불법적이지만 이스라엘 정부가 승인하고 미국이 묵인한'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촘스키의 관점은 이 한 문장에 압축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한쪽에서는 팔레스타인을 테러 집단을 규정하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행위를 정당방위로 주장한다. 그러면서 계속 평화를 파괴하는 건 팔레스타인 쪽이라고 한다. 이 내용은 어쩌면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내용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서구의 언론에 의해서 보여지는 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한다면 과연 누가 침략자인지부터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시오니즘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자기 중심적 세계관이 여전히 서구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은 아닌가? 성경 속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갈리리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광야를 건넜던 고난의 행군을 지금의 세계로 그대로 옮겨온 것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쟁 아닌가.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가당키나 한 일인 것인지. 촘스키는 그렇다고 어떤 해법을 내놓지는 않는다. 다만 누군가의 암묵적 동조 혹은 지원 하에 힘의 균형은 이미 기울었고, 따라서 지금과 같은 역학관계에서는 결국 한쪽은 불리할 수밖에 없는 전쟁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라틴아메리카과 미국과의 관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이제는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에 대한 미국의 정치 개입과 친미 정권 수립을 위한 그들의 비밀스런 지원, 폭력적 강압 또한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이미 로메로 주교의 죽음과 칠레의 아옌데 정권 등에서 대리인을 통한 미국의 지배를 강화하고자 한 미국의 노력은 많이 알려져 있다.

닉슨이 말합니다. "칠레에서 우리의 주 관심사는 (아옌데가) 입지를 다지고 이것이 전세계에 그의 승리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예비 지도자들이 자기들도 칠레처럼 양다리를 걸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남아메리카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이렇게 하고도 무사하리라는 인상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전세계가 우리를 우습게 볼 것이다." 심지어 주류 학계에서도 미국이 민주주의를 지지한 것은 전략적·경제적 이익에 부합할 때뿐이라고 인정합니다. (p.156)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주도권이 약해지게 되면, 이는 곧 세계에 대한 미국의 주도권 약화를 의미 했기에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 그 어떤 정권도 자신들에게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에 아이티 또한 속해 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다. 얼마 전부터 아이티의 어린 소녀 한 명을 후원하고 있는데, 그 아이가 살아가는 나라에 대해서 내가 너무도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미안해졌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가난과 잦은 자연재해로 신음하는 그 나라는 아직도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떨쳐 일어섰던 기억마저도 이젠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그저 한달에 한번, 작은 소녀 하나에게 생활비 보내는 일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다라는 것이 미안하지만, 이제라도 좀 더 그 나라에 대해 알아보고 계속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게 그 아이가 살아가는 나라에 대한 나의 도리이리라.

그는 희망에 대해서도 전망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에서도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그때 한국인들은 잘 조직됐고, 함께 모였고, 열심히 싸웠어요. 매우 용감하게, 매우 효율적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잔혹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자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무너뜨렸죠. 이 땅에 대단한 민주적 혁명이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바람을 불러일으켰죠. 그때 한국인들은 누구에게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고, 오직 그것을 하고 있을 뿐이었고 해냈습니다. 기회는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많아요. 한국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의 독재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잖아요? 할 일이 수없이 많이 있으며, 당신들은 오직 당신의 역사 속만 들여다보면 됩니다. 그 속에 답이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들 모두가 진실을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 일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촘스키도 지속적으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발언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닐까. 가끔씩 느끼는 것이지만, 결국 정치란 멀리 있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정치이고, 일상 곳곳으로 정치의 영역은 이미 들어와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인식하길 바란다. 내가 쓰는 물건 하나가 어디서 오는 지 생각해 보는 것, 뉴스에서 전해오는 소식 하나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고 그 보이지 않는 이면을 떠올려 보는 것, 가만히 있어도 들리는 승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힘에 의해 억눌린 약자의 소리를 듣기 위해 조금만 더 몸을 숙여 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일 게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 곳곳에 퍼져서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날 것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을 등에 업고서 대통령을 납치하고 의회와 대법원을 비롯한 모든 민주주의 기구를 해산했으나 이내 민중 봉기로 무너진 군사 쿠테타 지도부를, 차베스 대통령이 그해 말에 사면한 사실도 좀처럼 주목을 받지 못햇습니다.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서구가 차베스의 모범을 따를 가능성은, 좋게 말해 비관적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문명의 충돌'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던집니다. 이 실마리를 마음속에 간직하기 바랍니다. (p.190)

어쨌든 그렇게 강하게 억누르며 이스라엘과 협공작전을 펼치고 있으나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잘 싸우고 있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는 시간이 흐를수록 쿠바로부터 시작하여,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등등 점점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해왔고, 그것은 점점 거스를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남에게 '악의 축'이라며 함부로 손가락을 치켜올렸던 그들은 과연 '악행'에서 자유로운 역사를 만들어왔는지 진지하게 자문해 보아야 할 때가 오고 있다면 과장일까.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이스라엘 못지 않은 선민사상으로 무장한 그들이 과연 우리의 후손들의 세상에서도 똑같은 위상을 지니게 될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본문 중에서...]

9.11은 잔인무도한 테러였지만, 그보다 더한 만행을 얼마든지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알카에다가 초강대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미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백악관에 폭탄을 떨어뜨려 대통령을 살해하고 사악한 군사 독재 정권을 세우고 5만~10만 명의 국민을 학살하고 70만 명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테러·전복 기지를 건설하여 전세계에서 암살을 자행하고 고문과 살해를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신나치 '안보국가' 수립을 지원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게다가 독재 정권이 경제 자문을 불러들여 몇 해 안에 미국 경제를 사상 최악의 재앙으로 내몰았으며 자문역들은 노벨상을 비롯한 온갖 영예를 받았다고 가정해봅시다. 9.11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 아닙니까? 칠레인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니까요. 1973년 9월 11일에 일어난 '첫 9.11' 말입니다. 다른 점이라고는 인구에 맞추어 수치를 바꾼 것뿐입니다. 하지만 첫 9.11 이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건들이었으니까요. (p.42)


역사를 통해 수없이 입증된 지배적인 운영 원칙이 여기에서도 관찰됩니다. 정책이 (천명된) 이상에 부합하는 것은 이익에 부합할 때뿐이라는 원칙 말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익'이라는 용어는 자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 집단의 이익을 일컫습니다. (p.67)


발언권을 가진 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지금껏 다져진 관행을 보면 그런 자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가장 정확한 지표는 (앞에서 언급한) 정치경제학자 토머스 퍼거슨의 '정치투자이론'으로, 선거는 투자자 집단이 나라를 주무르기 위해 제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p.145) 


이스라엘 카츠 교통부 장관은 "이스라엘 현 정부는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합법적 정착 활동을 동결하는 행위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말하는 '합법적'이란 '불법적이지만 이스라엘 정부가 승인하고 미국이 묵인한'이라는 뜻입니다. (p.248)


부시의 연설문 작가 마이클 거슨은 이렇게 썼습니다. "오바마의 인선에서는 중도뿐 아니라 성숙함이 느껴진다. 결과야 어찌 되든, 오바마는 놀랍도록 옳은 일을 하고 있다." 여기서 '옳은'은 곧 '오른'입니다. (p.296)


레흐 바웬사가 엘살바도르에서 노조 조직 사업을 했다면 '민간인 복장에 중무장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미 실종자 명단에 올랐거나 노조 사무실에 날아든 다이너마이트에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알렉산더 두프체크가 엘살바도르 정치인이었다면 헥토르 오켈리(과테말라에서 엘살바도르 암살단에게 살해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처럼 암살되었을 것이다.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이곳에서 인권운동을 했다면 헤르베르트 아나야(독립 단체인 엘살바도르 인권위원회의 수많은 지도자가 살해당했는데 아나야도 그 중 하나다)와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오타 시크나 바츨라프 하멜이 엘살바도르에서 자신의 책무를 다했다면 어느 운 나쁜 아침에 엘리트 살인 부대의 총탄을 머리에 맞은 채 대학 캠퍼스 뜨락에 누워 있었을 것이다. (p.365, Guardian 인용)


박완서 (지은이) | 현대문학 | 2010-08-02


간헐적으로 전쟁에 대한 작가의 경험을 접하긴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것은 그냥 나에게는 흘러간 역사의 일부였을 뿐이고, 지금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그 연배의 사람들에게 그 정도의 경험은 크게 다르거나 유별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러나 내가 그럴 수 있던 것은, 작가 스스로 그 경험으로부터 많이 걸어나와 담담해진 말투로 그냥 무심결에 한마디 툭 던지듯 얘기하는 것만을 접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절절한 아픔, 절절한 고통을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 그 경험을 접해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작품 자체를 깊게 접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박완서의 작품 중 읽은 것은 도대체 몇권이나 될까. 수필집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도 같다. 작가의 상상이 덧칠해지는 소설에 비해, 수필은 작가의 생각과 경험을 좀 더 날것의 형태로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 책을 읽는 그 시간들이 '박완서'라는 작가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처음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 6월이다. 전쟁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행복한 진로학교'에서 임영신 사모께서 얘기했던 이라크 아줌마가 떠오른다. 전쟁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냥 겪어낼 뿐, 그 고통이 어떠한 지를 알고 있기에 더 두려울 것은 없다고 했던 그 아줌마가 작가의 얼굴에 오버랩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인생을 저 바닥에서부터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던 전쟁. 그 전쟁이 바꾸어 놓은 인생이 어디 작가뿐이랴. 그 전쟁을 피해서 비겁하게 국민을 속이고 도망갔던 소수의 몹쓸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 땅의 민초 중에 그 엄청난 일을 일상처럼 평안하게 넘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또한 그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아직도 사회 곳곳에 음습하게 스며 있는 빨간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바로 그 증거 아닐까.

이 글들은 부끄러웠던 과거를 드러내 놓기를 주저하지 않아서 또한 아름답다. 한국전쟁 직후 미국인 PX 에서 일하며 만났던 박수근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부족할 것 없는 집안에서 귀하게 사랑 받으며 커서, 문학소녀가 되고, 서울대에 입학했고, 그것도 대학 중의 대학이라던 인문학부에 입학했던 상류계층의 처녀가 경험했을 사회의 밑바닥, 하지만 인정할 수 없는 현실, 그 속에서 겪어야 할 괴리들... 애써 나는 '그림쟁이'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그래서 나는 저들과 동등할 수 없다고 되뇌이며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은 많은 사람들을 '김씨, 이씨, 박씨...'로 불러가며 하대했던 일, 그러다가 알게 된 박수근 선생의 존재. 박수근의 그림은 박완서의 '나목'을 잉태했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이 여류작가와 한 시대를 공유했다고 본다면, 전쟁은 그럼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책을 덮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각나는 문장이 하나 있다. 작가가 한끼 밥이 가지는 의미를 이야기하며 아들을 잃었을 때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장례를 어떻게 치루었는 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의 큰 충격이었는데, 장례를 치르는 동안 몸저 누웠던 작가가 장례식때 죽은 아들의 친구들이 많이 왔었다는 이야기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밥이라도 잘 먹여 보냈냐'고 물었다고 한다. 흔히 우리가 하는 말처럼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나는 아직도 삶이 존엄한 지 치사한 지 잘 모르겠다.'

사람의 말년이라는 게 이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평화로울까하는 생각이 들게 작가의 일상과 상념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이 책. 나도 덮으면서 생각해 본다. 나의 삶은 지금 어떠한가...




박원순 | 임영신 | 박기태 | 송인수 | 주상완 | 임경수 | 최영우 (지은이) | 시사IN북 | 2011-06-07


가끔씩 내 아이가 크면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까 상상해볼 때가 있다. 어쩌면 상상이라기보단 바램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나도 미욱한 인간이기에,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아이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욕심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러다가 다시 또,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인생이라는 이성이 동작을 하게 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아이의 미래'란 여전히 나에게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보게 만들어주는 하얀 백지 상태와 같게 느껴진다.

몇년 전 어떤 행사에 참석했다가 초대 손님으로 윤도현의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워낙 좋아하는 가수이기도 했고, 마침 임신 중이라 한동안 그 어떤 문화 행사도 참석하기 힘들었던 나에게 그날의 행사는 오랜만에 즐길 수 있는 굉장한 호사였다. 무대에 윤도현이 올라오고 기타를 튜닝하는 동안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고, 노래가 시작되면서 나는 걷잡을 수 없는 흥분상태가 되었다. 임신 7개월의 배만 아니었으면 펄쩍 펄쩍 뛰며 무대 바로 앞까지 뛰쳐나갔을 수도 있었을텐데,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그 짧은 몇곡의 순간들을 한껏 즐겼다. 그러다가 문득 가슴이 먹먹해지며 드는 생각...

"아... 우리가 아이가 커서 윤도현 같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건 굉장히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버무려진 생각이었는데 굳이 애써 정리해보자면 이런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기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 그러면서 그것을 통해 적어도 자신의 생활비를 벌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가능하면 그 일을 통해 남들에게 기쁨 혹은 행복, 즐거움,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기에, 그냥저냥 밥벌이의 수단으로만 기능하기에 더더욱 나는 우리 아이가 그렇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것 같다.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하려면 부모로서 과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이 그날 이후 나의 가장 큰 과제가 되었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누군가 나에게 세상에 이렇게 많은 직업이 있다는 걸 알려줬다면,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일들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 지도 몰라'라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선택을 했을 수는 있겠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우리 아이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직업들, 혹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몇몇 좋은 직업들을 얻기 위해 애쓰지 않고, 정말 자기가 좋아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내 그 분야에서 직업을 찾고, 그렇게 살면서 한발 더 나아가 남들에게 기쁨이나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살았으면 정말 좋겠다.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박원순, 평화 여행가 임영신, 반크의 대표 박기태 등...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2010년에 진행한 '행복한 진로학교'의 강좌를 책으로 엮은 이 책은, 지금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어떻게 다다르게 되었는 지를 일곱명의 사회적 멘토의 체험이 실려 있다. 돈에 가치를 둔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들의 현재 일자리가 좋은 일자리가 아니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이 사람들은 일단 자신의 현재 상태에 행복함을 느끼고 만족하면서, 타인을 위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자기 밥벌이까지 하고 있으니 현대 사회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진정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아닐까?

정답이 실려 있지는 않다. 다만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낼 수 있고, 학교 안에서 배우는 것은 우리 삶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이에게 내가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도록 몰아세우며 '이것이 네가 성공하는 길'이라고 합리화시키고 있지는 않은 지, 나의 기준으로 아이의 행복을 재단해서 아이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할 시간조차 빼앗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보며, 마찬가지로 현재 나의 삶에도 적용해 본다. 지금 내가 행복한 지, 나의 일을 사랑하고 있는 지. 정말 어려운 문제다.


[본문 중에서...]

제게 맞는 삶의 보폭이 있고 제게 맞는 삶의 속도가 있을 텐데, 그것이 시민운동의 속도와 다르다면, 저는 그 안에서 도태되거나 혹은 그 안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포기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직면하게 됐죠.(임영신)


나는 내 인생에 두 번의 전쟁을 겪었고, 세 번째 전쟁을 맞을 참이다. 이라크 사람이 전쟁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전쟁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힘이 있다면 우리는 전쟁을 이겨낼 일상의 경험이 있다. 무섭지 않은 게 아니라, 두렵지 않은 거다. 고통의 크기를 모르기 때문에 무지한 게 아니라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 무심한 거다.(임영신, 수와드 아줌마)


그 사람이 정말 그것을 배웠는 지 증명해줄 수 있는 권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배움은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가르쳐줄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배웠다고 증명해줄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졸업장이나 수료증을 주지 않는다.(송인수, 맨발대학 벙커로이)


가난한 이웃에게 매일 조금씩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주다가 더 이상 나눠줄 것이 없는 상태로 자기 인생을 종결하는 것, 그것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죽음과 십자가를 '미분'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씩 썰어서 나중에는 제로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 그렇게 해서 '적분'하면 나중에 한 번의 죽음과 십자가로 정리되는 삶. 이렇게 사는 것도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송인수)


부모는 교육적 배려를 하면서도 자율을 허용해야 합니다. 부모가 방치하지 않고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아이가 마음껏 시행착오를 할 수 있도록 관용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아이가 잘못하면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울타리도 안 쳐주고 아이의 삶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아이와 싸웁니다. 성적은 몇 점 맞아야 하고, 너의 진로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느니 하면서 시시콜콜하게 간섭하죠. 나중에 보면 아이가 해야 할 것까지 부모가 대신 고민하고 있습니다.(송인수)


자산이 될 만한 경험을 쌓아줄 필요도 있어요.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중학교 이후에는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긍정적이 되느냐 아니냐는 주로 어린 시절에 결정됩니다. 그 이후에 세상과 사람에 대한 관심과 돌봄을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체험을 시키고 부족하면 독서를 하게 하고 말이죠.


인문학적 정신이란 게 꼭 책과 글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평생 시골에서 농사만 지은 농부에게 남을 돕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분을 충분히 인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아이가 좋아하는 영상이나 노래, 운동선수 등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깊이 있는 소양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책을 강요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네요.




안희경 (지은이) | 오마이북 | 2013-01-31



7명의 석학이 들려주는 희망은 어떤 것일까. 그 석학들의 면면이 마음에 들어서 장바구니에 넣어놓고도, 왠지 딱딱하고 재미 없는 원론적인 이야기들만 어설픈 번역체로 나열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책 소개를 자세히 살펴보니, 일단 대담집이었고, 그 인터뷰어가 한국인이었으며, 그 인터뷰이가 직접 정리하는 책이라는 것에 다시 호기심을 느꼈다. 그럼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재미가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에 책을 골랐다.

과연, 노엄 촘스키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로버트 서먼의 쿨한 혁명 이야기를 출근 길 지하철 안에서 읽다가 내리는 역을 놓칠 뻔 했고,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오는 15분 동안 그 여운을 느끼느라 음악도 듣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를 되뇌이기만 했다. 심지어 노엄 촘스키 교수가 크레인 위의 김진숙 지도위원과 나누었던 교감, 그리고 김진숙 지도위원의 답장을 읽으며 코끝이 찡하기까지 했다. 

로버트 서먼의 'Cool Revolution' 역시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분노와 증오가 어우러진 혁명은 유사 이래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그의 말에 대한 진위 여부를 떠나서, 지금 우리가 처한 사회에서의 변혁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Cool Revolution 이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전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더이상 없으며 결국 모두의 파멸만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군대에서 배우는 전쟁 서적에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는 95%가 군인이라고 나오지만, 현대 사회의 전쟁에서는 95%의 사상자가 민간인이라는 그의 지적을 우리 모두 잘 새겨봐야 한다. 그러면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데, 여성이야말로 차가운 영웅이라고 서먼 교수는 이야기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박근혜는...? 서먼 교수의 대답은 이렇다. 여성은 여성을 지지해야 하는데, 그것은 여성성을 가진 지도자를 의미한다. 사라 페일린의 경우는 여성이었지만, 그는 남성성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렇다면 박근혜의 경우에 대해서도 명쾌한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여성인 나는 여전히 과연 여성성이 Cool Revolution 에 도움이 되는 지 잘 모르겠다. 단지 역사적으로 볼 때, 남성에 비해 좀더 평화적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육체적 특성으로 인한 것이지 정말 여성 안에는 내재적인 평화 유전자가 존재하는 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동의하기가 어렵다. 난 여자이지만 여자를 믿을 수가 없다! ^^

그 이후의 대답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조지 레이코프의 '승리하는 프레임'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이후 선거철이면 수도 없이 듣게 되는 '프레임'의 실체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나도 그 책을 읽었기에 프레임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프레임을 선점해야 하고, 상대방의 프레임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것이 현실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된 프레임을 선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는 아무도 알고 있지 못한 듯 했다. 알면서도 맥없이 당하는 상황이랄까. 하지만, 그가 얘기하는 프레임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우리만의 언어들을 다시금 정의해 내야 하는 것, 그러면서 가장 근본이 되는 도덕적 프레임을 고수하는 것, 그렇게 긍정의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외에, 경쟁의 사회에서 행복이 무엇인 지를 고민해 보게 만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자연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피터 싱어, 즐거운 저항을 보여주는 코넬 웨스트, 생명의 숭고함을 웅변하는 반다나 시바...

반다나 시바와의 대담을 읽으면서는 가슴이 참 아팠다. 

우리 나라의 대표 기업 중 하나인 포스코가 인도에 투자를 하고 자원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상사류의 대기업들은 기존의 무역업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의 자원 개발에 뛰어든 지 꽤 오래 되었으니, 포스코도 예외일 수는 없을 터. 그런데 그 와중에 인도의 마을 하나를 도로로 뒤덮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그들에 대한 철거와 이주 과정에서 큰 반발에 부딪혔다. 그들은 시위를 했으나, 국가와 기업이 자행하는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어린 아이와 여자들이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반다나 시바는 이렇게 우리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인도에서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음에 기초한 번영을 얻고 싶은가요? 우리는 하나의 인류입니다. 이는 '나는 오른손의 번영을 돕기 위해 내 왼손을 자를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더불어 강정마을과 밀양, 평택 대추리, 양양댐, 그리고 용산을 떠올리게 된다. 자국민에게도 똑같은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사람들인데 저개발국가의 약자들에게야 오죽하겠는가.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번영은 어떤 것인가?

세계적 석학들이 들려주는 인문학의 향연이랄까. 책을 덮었을 때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발동 걸린 김에, 사둔 지 한참 된 노엄 촘스키의 책을 꺼내서 읽어야겠다.


[본문 중에서...]

미국 헌법제정회의(1787년 5월)에서 이런 말이 오갔어요. "만약 우리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갖는다면 그 속에서 대중의 다수는 그들의 의지를 표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난한 사람이 다수가 될 수밖에 없고, 그들은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는 데 표를 쓸 것이다. 농지를 다시 구획하는 토지개혁 등을 통해 그들은 땅을 나눌 것이다." 헌법 제정자들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고 목청을 높였고 다수가 권력을 누리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죠.(p.40, 노엄 촘스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도 빼고 노예도 빼고 자유를 가진 남자들하고만 토론했습니다. 그는 아테네에서 '다수가 지배하는 일이 생긴다면?'이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아리스토텔레스와 매디슨은 같은 질문을 마주했습니다. 하지만 답은 정반대 방향으로 도출됐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은 불평등을 감소하는 것입니다. 그는 복지국가를 이루는 법이 답이라는 데 도달했어요. 모든 사람들을 본질적으로 중간 계급으로 만들어야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p.40, 노엄 촘스키) 

나는 한국 사람들이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그때 한국인들은 잘 조직됐고, 함께 모였고, 열심히 싸웠어요. 매우 용감하게, 매우 효율적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잔혹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자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무너뜨렸죠. 이 땅에 대단한 민주적 혁명이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바람을 불러일으켰죠. 그때 한국인들은 누구에게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고, 오직 그것을 하고 있을 뿐이었고 해냈습니다. 기회는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많아요. 한국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의 독재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잖아요? 할 일이 수없이 많이 있으며, 당신들은 오직 당신의 역사 속만 들여다보면 됩니다. 그 속에 답이 있습니다. (p.42, 노엄 촘스키)

선거를 포기하면서 그 공간을 그저 폭로의 공간만으로 활용하면 안 됩니다. 이는 권력의 키를 최악의 인간들에게 내주는 겁니다. 우리는 덜 나쁜 악마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며, 완전히 새로운 것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이상주의자가 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이는 롬니 같은 이들의 실체와 또 그네들이 주장하는 경제정책의 파괴성, 그리고 군대에 대한 멍청한 자세를 분별력 있게 보려 하지 않는 태도예요. 차이점을 살펴봐야 합니다.(p.58, 로버트 서먼) 

증오에 사로잡힌 오늘, 증오는 탐욕과 함께 한다. 세상의 탐욕과 증오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탐욕과 증오부터 조절해야 한다. 거대 자본이 못되게 굴더라도 우리 안의 분노를 그들이 떠안을 이유는 없다. (p.67, 로버트 서먼)

전쟁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습니다. 핵무기를 가져도 사용할 수가 없죠. 왜냐하면 그 누구도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쪽 다 파멸하죠. 이렇게 극단으로 치달으면 결국 전쟁을 멈출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이 전쟁이 만들어내는 결말이며, 거대한 힘을 가진 그 어느 편도 상대를 무찌를 수 없다는 진실입니다. (로버트 서먼)

리처드 슈로브 "한 사람이 고요를 발견하면 세상은 그만큼 더 고요해지죠. 한 사람이 조금 더 분명하게 세상을 대하게 되고, 그렇게 맑아지면 세상은 그만큼 더 맑아집니다."

정부가 개입해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곳에 정부의 책임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저 시장이 조절할 것이다 또는 자연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타인이 배를 곯고 있는 것이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거죠.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악에 대항하면 그 악을 막아낼 수 있고, 착한 정의를 이루고자 하면 그 선을 행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p.180, 피터 싱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나는 가난한 나라들에게 주는 도움의 양을 엄청나게 늘릴 겁니다. 지구의 빈곤을 줄일 거예요. 나는 공장식 축사를 없앨 겁니다. 그래서 동물이 비록 도살되어 고깃덩이가 되더라도 죽기 전까지는 짐승다운 생을 살게 하겠어요. 그리고 나는 불필요한 고통을 줄일 겁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게에서 의료 서비스가 이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 삶을 절박하게 이어가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사용되는 것을 볼 겁니다.(p.186, 피터 싱어)

마지막 나무가 죽고, 마침내 온 강이 오염되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다음에야 인간은 돈을 먹고 살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p.  아메리카 인디언)

당신의 목소리를 찾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타인에게 용기를 북돋워줄 수 있는 거죠. 그렇게 힘을 채워주는 자가 진정한 블루스맨, 블루스우먼이에요. 이런 사람들의 노래는, 비록 어둠에 대한 것일지라도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줍니다. 그래서 계속 싸우고 사랑하고 웃음 짓고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거예요. 우리에겐 이와 같은 희망이 필요합니다. 이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블루스는 낙관적이지 않아요.

오늘날 단 10개의 기업이 230억 달러 규모의 상업용 종자 시장의 32퍼센트를 점유하고, 유전공학적으로 조작된 변형종자 시장의 100퍼센트를 통제하고 있답니다. 이런 기업에서 유종한 종자들의 경우 그 종자를 키우기 위해 꽇ㄱ 구비해야 할 살충제가 한 쌍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농약 시장까지 장악하는 셈이죠. (p.241, 반다나 시바)

새로운 교배 종자들은 해충에 취약하기 때문에 살충제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가난한 농민들은 종자와 농약 모두를 같은 회사에서 외상으로 구입해요. 그러다가 해충이 마구 들끓는다든지 불량 종자가 대규모로 섞이면 그 해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그럼 농부들은 빚내서 구입한 그 살충제를 먹고 죽습니다. 인도 와랑갈 지역에서는 1997년에 400명이 자살했어요.(p.242, 반다나 시바)

농사는 땅과 사람을 살리는 순환 활동이 아니라 단순하고 기계적인 노동이 됐습니다. 여성은 공장으로 이동하고, 아이들은 공짜 영양원을 잃었죠. 수출 목표를 달성하여 외환소득을 늘릴 잉여농산물을 얻어내려는 정책은 여성, 어린이, 환경의 조건을 악화시켰어요. 간디가 말하길, 어떤 결정을 하든지 가장 약한 마지막 사람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마지막 어린이를 생각하라고 바꾸고 싶습니다.(p.254, 반다나 시바)

문득 2011년 늦가을에 인터뷰했던 생태학자 조애나 메이시 선생의 호소가 떠올랐다. "내가 만약 밍크라며, 내가 만약 바위라면, 내가 만약 우라늄이라면...... 이렇게 명상해 보세요. 우리 인간은 이런 상황에 스스로를 놓고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게 집중하며 명상하는 동안, 내 가슴은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바위의 호소로 뜯겨나갈 듯했다. 젖이 불어 어기적 서 있는 젖소의 고통 또한 내 아이에게 처음 젖을 물리던 그 때의 진저리 나는 아픔으로 다가왔다.(p.264)




임혜지 (지은이) | 푸른숲 | 2009-09-21 | 초판출간 2009년


보통 사람들이 우리 나라와 선진국을 비교할 때, 비교가 되는 나라들은 뻔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그러다, 요즘엔 북유럽 국가들이 종종 등장한다. 발전된 자본주의, 산업의 발달을 비교할 때는 주로 미국이나 영국이 언급되는 것 같고, 민주주의나 정치 제도, 사회보장제도 등이 주제일 때는 독일과 프랑스가 주로 언급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프랑스나 독일은 비교적 리버럴하고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막연한 동경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 같다. 나에게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어서, 가끔은 내가 그곳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고, 내 아이들이 그런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드는 느낌은 어느 사회나 겉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실제로 겪는 것 사이의 간극은 굉장히 크다는 것이다. 물론, 그 나라들이 알고 보니 정말 후졌더라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어느 나라도 세계사의 흐름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고, 특히 요즘같이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세상에서는 더더욱 사회 내부의 갈등 요인이라는 것이 한 국가에만 국한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족 혹은 인종 간의 갈등, 세대 갈등, 교육 이슈, 빈부 갈등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하나도 없으며, 그 정도와 양상이 다를 뿐 결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여러 갈등과 논쟁, 그리고 크고 작은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를 통해 역사는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보통 과거사 청산 혹은 역사적 잘못에 대한 사죄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일본과 독일을 종종 비교한다. 모든 역사적 잘못을 부인하고 합리화하는 일본과 총리가 폴란드에 가서 무릎을 꿇는 행위까지 해가면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는 독일을 비교하며 일본을 꾸짖곤 한다. 하지만 독일 내부에서도 일본의 우익 못지 않게, 신나치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왜 우리가 이렇게까지 반성해야 하는가, 도대체 언제까지 반성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선조들이 잘못했는데 왜 우리까지 속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와 이웃한 나라가 아니고,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나라여서인지 몰라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국가들이나 유태인들이 들으면 공분을 살 만한 발언들이 종종 공개적으로 표출되거나 일상적인 사람들의 대화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다소 의외였다. 나는 정말 그들이 뛰어난 민족성을 지녔다고 생각했고, 정말 과거에 대해 참회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100%는 아닐지라도 98% 쯤은 말이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결국 우리도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지었고,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속죄를 하고 있는 지 생각해 보게 됐다. 우리는 베트남에게 공식적으로 사죄를 하지도 않으면서, 일본에게만 앙앙대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정말 생각해 볼 일이다.

외국인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나라의 큰 사회적 이슈 중 하나인 다문화 가정과 관련한 문제를 그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겪고 있다. 그들의 경우는 터키인인데, 경기가 상승기조이고 노동력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그들을 필요로 해놓고, 통독 이후 경기가 바닥을 치면서부터는 그들로 인해 국내 고용 상황이 더 나빠지고,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사회적 보장을 똑같이 누리는 바람에 오히려 독일인들이 피해를 본다며 그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모습은 내가 상상하고 있던 독일 사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독일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선민의식이, 그곳에서 반평생이 넘게 살아온 한국인을 이방인 취급하고 차별하는 것으로 표출되는 상황이라니...

전반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결국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인 일들을 가지고 우리 국민들을 탓할 것도 아니요, 괜시리 선진국이라는 데를 갖다 붙여서 비교하며 나무랄 일도 아니다. 물론, 우리보다 조금 더 앞서 나가 있는 나라들을 살펴 배울 것은 배워야 하는 게 맞겠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선망의 대상으로 삼거나, 우리를 비하하는 일은 없어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한국인 여자와 독일인 남자가 만나 이룬 가정은 여러 면에서 특별했다. 늘 환경을 생각하기에 차를 소유하지도 않고, 일상적인 곳에서 양심을 지켜나가며, 아이들에 관한 한 무한 신뢰를 보낸다. 그렇기에 늘 행복할 수 있었고, 늘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며, 아이들은 기대 이상으로 바르게 커주었다. 과연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나도 환경을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내몸 편한 걸 일단 우선으로 삼는다. 그래서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곳도 귀찮다고 차를 몰고 나설 때도 많다. 열심히 기부도 하고 나누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돈 내는 걸로 스스로 만족할 뿐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을 인용한다면,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충분히 가고 있지만, 문제는 가슴에서 발까지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이들에 대해서도 아직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께 가서 "우리 아이들은 성적이 좋진 않지만, 성격이 좋은 아이들이니 괜찮다."고 얘기할 수 있는 당당함이 부럽다. 열두살 된 딸아이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1년 이상 사귀게 되면 내년에 둘이 같이 캠핑을 가서 자고 오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그러라고 대답해줄 수 있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엄마 아빠는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콘돔의 갯수를 알지 못하니, 언제든 필요할 때 쓰라고 고등학생 딸에게 얘기해줄 수 있는 부모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아들에게 단한번도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는 부모는 또 얼마나 될까? 

여러 면에서 내가 본받아야 할 삶을 살고 있는 저자를 보며, 이 책을 읽는 내내 반성하고 또 반성하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에 단순히 환경과 관련한 책이겠거니 생각하고 집어 들었다가,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됐다. 올바른 부모 되기, 환경을 생각하기, 교육제도에 대한 고민, 인종과 민족 문제, 부부 간의 사랑 등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마주하는 저자를 보면서 나는 나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고 있는 지, 어떤 생각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지, 이 땅에서 올바른 지성인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는 지 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저자가 말한 대로 '세상은 앞에서 활약하는 주연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배경을 이루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므로, 든든한 배경이 되기 위해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도록 노력해야겠다.


(본문 중에서...)

세상은 앞에서 활약하는 주연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배경을 이루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주연이 아님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이 '배경'의 위력을 항상 생각하며 '좋은 배경'이 되겠다는 뜻으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씨를 뿌리며 사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기로 했다. 티끌인 나에게 태산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p.71)


무기 수출국인 독일에서 내가 290유로나 빼돌려 피해자 어린이들의 의족을 마련하는 사업에 힘을 보탰으니 얼마나 장한가? 당장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하는 일이 바로 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기쁨 아니겠는가? 사회가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변치 않는 나의 가치를 확인한 것, 이것이 인생의 횡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p.77)


우리 아이들은 학교 성적은 그저 그래도 영재임에 틀림없다. 학교라는 거대한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적성이 비슷한 아빠를 따라 도약하는 아들, 취향이 다른 부모 밑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딸, 자긍심 지수를 학교 점수와 동일시하지 않는 현명함, 이런 점들이 모두 우이아이들이 영재라는 증거다.(p.81)


아이들 나이가 십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우리 부부는 그나마 쥐고 있던 고삐도 늦추고 느긋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어른이라고 우리가 더 잘하느 것도 없으면서,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들을 과소평가하고 참견하는 일이 낯간지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 곁에 친구처럼 있어줄 뿐이다.(p.96)


"그럼 앞으로는 당신만 먹어. 다른 사람들까지 먹을 필요는 없잖아. 바다 생선 안 먹고도 잘 살아온 사람들까지 맛을 들여 엄청나게 먹어대니 씨가 안 마르겠어? 정작 생선에 의지해온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빼앗긴 셈이고 말이야. 그건 변태야."


"공부도 안 끝난 애가 임신하면 어떡해? 그애 인생은 어떻게 되고?""인생이 어떻게 되긴? 우리 아직 건강하겠다, 부모가 힘껏 도와줄만 한데 아기 키우면서 공부하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그런 걸로 사람 인생 안 망쳐. 그런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우울증이나 마약 같은 마음의 병이야. 그건 부모가 암만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잖아."


동독인들은 통일 이후에 자신들도 당연히 누릴 줄 알았던 부와 안정 대신 실업과 상실감만 맛보았고, 자신들의 독일의 이등 국민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피해 의식을 가진 사람일수록 발아래를 살펴 자기도 밟을 자가 없는 지를 찾게 되는 법인지, 이렇게 해서 동독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야만적인 수난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p.177)


나는 모든 사회에는 주류가 있고 지성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류는 '주된 흐름'이란 말 그대로 전통을 이어가며 어제와 다름없이, 이웃과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다수이다. 그리고 지성인은 주류의 방향을 잡아주는 소수이다. 지성인은 개인의 양식에 따라 판단하고 이를 용기 있게 표현해 주류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정치권은 주류의 시녀일 따름이고, 주류의 물길을 조정하는 것은 지성인이다.(p.194)


이것은 국민을 속인 정부의 책임이다. 몇백만 외국인들을 돌려보내는 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고 실리적으로 부당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진작 고백하고 거기에 맞는 정책을 세웠어야 했다. 독일 국민에게는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이 손해가 아니라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보탬이라고 가르쳤어야 했고, 외국인들에게는 출신국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독일 사회와 자발적으로 융화할 수 있도록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었어야 했다.(p.228)


인간이 태고에 집단생활을 시작한 것은 생존의 가능성을 높여 종족 보전을 잘하자는 합리적인 이유에서였다. 한 나라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마치 손과 발처럼 긴밀한 공생관계에 있다는 것, 몸의 가장 약한 부분이 사람의 수명을 결정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의치가 곪아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머리가 좋아야 되는 일이지 마음만 착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p.231)


창조적인 인적자원을 매출하기 위해, 즉 기회의 평등과 재능의 개별적인 계발이 좀 더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학생의 인격이 좀 더 존중받는 학교 풍토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독일 사회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고 (핀란드를 모델 삼아) 교육 제도를 꾸준히 개선하고 있다. 학생들은 인적자원이기에 앞서 그들의 유일한 인생을 값지게 살 권리가 있는 영혼들이기에 더욱 그렇다.(p.239)


사람을 쓸데없이 초조하게 만들어 창조적인 사고를 배워야 할 귀중한 시점을 놓치게 만드는 등수 경쟁을 과연 누구에게 이익이 될까? '분할하라. 그리고 지배하라(divide et impera).' 이것은 기원전부터 서구 사회에 전래하는 널리 알려진 병법이다. 적을 따로따로 경쟁시켜 자기네들끼리 힘을 빼게 만든 후에 효율적으로 잡아먹으란 뜻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끼리 자진해서 경쟁이라니?(p.249)


죽음의 고통이 길어서 나쁘다는 건 우리의 생각일 뿐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죽음을 서서히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 게 메를린의 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p.257)



승효상 (지은이) | 컬처그라퍼 | 2012-10-23


지리란 공간과 인간의 만남이다. 땅이라는 평면 위에 인간이 살면서 서로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저 지형이 있을 뿐, 지리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덧칠하는 삶의 흔적은 공간을 의미 있게 만들고, 그 작용과 역사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학문의 경지로 승화 시킨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승효상에 의하면 건축 또한 땅에 새기는 삶의 기록이다. 건축가가 건물을 하나 지어 놓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건축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의해 완성된다. 그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이 다할 때, 그래서 그 공간이 폐허로 변할 때 그 때야 비로서 건축은 완성된다.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을 의미 있게 해주는 것은 인간들의 삶이란 점에서, 이 공간 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삶들은 다 저마다의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역사가 될 것이므로...

'빈자의 미학'으로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을 처음 듣게 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 설계 때문이었다. 내가 딱히 건축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이름이었지만, 유언이었던 아주 작은 비석을 어떻게 현실로 이끌어낼 지에 대한 궁금증 덕에 건축가의 이름 석자를 처음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저자가 여행 속에서 만난 많은 건축들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빈자의 미학'을 다시금 확인하고,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조근조근 읊조리듯 얘기하는 이 책은 참으로 정겹다. 이 사람의 건축 세계가 지향하고 있는 바 때문일까. 누구나 다 알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는 건축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딘가 구석에 숨어 있을 법한, 그리고 그 어떤 여행 상품에도 포함되지 않을 법한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기에 더욱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나도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이기에 그 대상들이 나에게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한국의 사찰이나, 정원 등 우리의 건축은 자연과의 조화를 우선시 한다는 말을 학창 시절 언젠가 한번쯤을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교과서에서만 한번 읽고 지나간 문장 하나가 지속적으로 나의 사유에 영향을 줄 수는 결코 없는 일.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배운다. 소쇄원의 정원과, 부석사에서 내려다본 산맥들, 병산서원과 선암사. 2년 전쯤 선암사에 갔을 때, 그 때 이런 사실들을 알고 갔다면 고즈넉한 산사에 담겨진 의미를 더욱 음미할 수 있었을텐데 무척이나 아쉽다.

독일의 하르부르크에 있는 기념탑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1미터 사방에 12미터 높이의 아주 단순한 입방체로 이루어진 탑, 사람들은 이 탑에 자신들이 겪은 파시즘의 상처를 기록하였는데, 놀랍게도 이 탑은 매년 2미터씩 땅 밑으로 가라 앉게 설계되어 결국 탑 제일 위까지 사람들이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였을 때 완전히 땅 밑으로 가라 앉았다. 분명히 탑이면서도 탑처럼 솟아 있지 않은 탑. 파시스트에 대한 저항을 기념하는 탑은 점점 가라 앉아 이제 흔적만 남았다. 남은 것은 이제 살아 있는 자들의 몫...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웅장하고 화려해야만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의 건물의 생겨나고 소멸되는 것, 도시가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 없던 길이 생기고, 다시 그 길이 없어지는 것, 결국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다. 그 어떤 건축물도, 그 어떤 인위적인 행위도 그것을 함부로 바꾸고 마음대로 움직여 나갈 순 없다.

"여행이란 공간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얻는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살아간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이지만, 그 흔적들 위에서 흘러간 시간을 되짚어 사람들의 삶을 유추하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진정 여행이 가진 힘일 것이다. 이젠 공간에 방점을 찍는 여행이 아닌, 그 안에서의 '시간'을 찾는 여행을 해봐야겠다.


(이하 본문 중에서 발췌...)

타자화된 이방인은 싫든 좋든 현실에서 비켜서서 그 현실을 끊임없는 비교와 평가를 통해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사유의 세계로 모는 자이다. 자기 스스로를 제도권 밖으로 추방하여 경계속의 현실을 목도하고 때론 비판하며 성찰하는 자, 이를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이라고 했다.


건축은 땅에 새기는 삶의 기록이다. 


지도 속에 나타난 마을 구조를 머리에 넣고도 그 길에 서면, 나는 그들의 삶이 만드는 일상의 예기치 못한 풍경에 새롭게 감동받는다.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이뤄지는 삶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공간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얻는 삶에 대한 성찰임을 다시 알았다.


나에게 건축과 도시는 무생물이 아니다. 건축이란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을 완공함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살게 되는 거주자의 삶으로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나로서는, 도시 역시 태어날 뿐이어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하는 생물적 존재라고 여긴다. 만약에 건축이나 도시가 완성되는 순간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붕괴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극단적이지만 그 완성의 존재체가 폐허인 것이다.


보이는 것은 침묵의 세계였으며 아마도 그게 이 절을 세운 목적이었다. 이 폐허는 쓸모없에 된 사찰이 아니었다. 여전히 우리 삶의 부질없음을 끊임없이 가르치는 '보이지 않는 절'이었던 것이다. 그게 참된 불교 아닌가......많은 파편이 지저분하게 남아 아직도 그 존재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서양의 폐허가 아니라, 건축의 숙명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맑은 수묵화처럼 존재를 비움으로 완결하는 폐허이다. 그게 바른 건축이요, 그로서 진실이었다.


대도시 서울에도 지금 남아 있는 가회동이나 인사동의 골목길은 아직도 아름다운 정취가 만만찮다. 그렇게 오래된 길만이 아니라 근래에도 그런 길을 볼 수 있는 곳이 있긴 하다. 바로 가난한 이들이 사는 달동네의 길들을 보면 우리가 길에 대한 생각을 원래 어떻게 가졌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길은 선이 아니라 공간이며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이고, 눈으로 보는 곳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곳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길들은 여전히 개발이나는 전가의 보도 앞에 맥없이 허물어지고 제거되고 지워지며 직선으로 뭉개지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의 길을 갖지 못하게 된 우리의 삶은 연결되지 못해 파편적이며 가두어진 채 때로는 방황하고 때로는 부유하는 것이다.


선조들이 가진 자연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명료함을 넘어 지혜로움 그 자체였다.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아 인위적으로 과장된 제스처를 가지는 것은 금기였으며, 놀이의 대상으로 자연을 농락하는 일을 경망스러운 것이었다. 자연은 그 자체가 선이요 동반자이며 공존의 대상이어서 함께 어우러지는 우리 자신인 것이다. 무슨 말인가. 그 실증이 소쇄원에 있다.


1986년 이 도시의 중심부 번잡한 길가 한 귀퉁이에 12미터 높이의 탑이 세워졌다. 이 탑은 하르부르크시 정부가 파시즘의 아픈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로, 공모를 통해 조각가 요한 게르츠와 에스터 샬레브 게르츠의 공동작을 선정한 바 있다. 이 부부 작가가 제출한 안은 1미터 사방에 12미터 높이의 단순한 입방체였지만, 이 평범하게 보이는 탑은 놀랍게도 매년 2미터씩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도록 되어 결국에는 모두가 사라지는 안이었다......어느 날 이 탑은 완전히 사라지고, 파시스트에 대한 저항을 기념하기 위한 이 탑이 놓인 장소는 비어 있게 될 것입니다. 불의에 대항하여 일어서야 하는 것은, 결국에는 우리 스스로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모든 도시와 건축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세운 자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아무리 튼튼하게 지었다고 해도, 중력의 힘에 의해 반드시 건축과 도시는 무너지고 만다. 때로는 경제적 이유로 붕괴되기도 하고, 더러는 자연재해로 혹은 테러로 사고로 모두 무너져 결국은 땅의 표면 위에 가라앉아 사라지고 만다. 영원한 것은 우리가 같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 기억만이 진실한 것이다.


손석춘 (지은이) | 철수와영희 | 2013-04-17


얼마 전 조봉암 평전을 읽다가 책의 주인공인 조봉암 이외에 궁금했던 몇몇의 인물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박헌영. 이 이름 석자 역시 수업시간에 얼핏 듣고 넘어간 기억과 함께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사람이란 것 말고는 딱히 아는 지식이 없었다. 조봉암 평전에는 그보다 조금 더 자세한 사항들이 나오긴 하지만, 아무래도 책의 포커스는 조봉암이다 보니 조봉암의 변절에 날선 비판을 하며 일제 말기부터 조봉암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고 나올 뿐 아니라, 조봉암 입장에서 다소 서운한 느낌도 가질 수 있도록 서술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룸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지만, 반대로 그렇다면 박헌영 입장에서는 조봉암을 어떻게 보았을 지에 대핸 궁금함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던 차에 우연치 않게 본 박헌영 트라우마. 이 책은 저자가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스님과 나눈 대화록이다. 원경스님의 기억속에 있는 내용들은 거의 그대로 가감 없이 전달해준다. 사람의 기억이야 윤색되기 나름인 데다가, 워낙 어릴 적의 기억들이고, 그 이후 고종사촌의 손에 의해 키워지며 다시 전해들은 이야기까지 더해져 기억의 신뢰도는 사람마다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으나, 어쨌든 가장 가까이서 접했던 유일한 목격자이자 증언자로서 그의 이야기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고, 독립운동을 쉬지 않고 하기 위해 자신의 똥까지 먹어야 했던 사람, 목숨 바쳐 공산당을 세웠고, 자기가 세웠던 그 공산당에 의해 처형된 사람. 아무리 봐도 조봉암과 오버랩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국내의 독립운동, 거듭되는 투옥과 도피, 지하생활,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등 계속 궤를 같이 하던 두 사람이 일제시대 말기 각자의 선택에 의해 노선을 달리 한다. 하지만 그 이후는 다시 비슷한 운명을 걷는다. 하나는 남쪽에서, 하나는 북쪽에서 자신의 신념에 맞는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을 한다. 농민과 농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것도 똑같다. 사상의 자유, 집회의 자유, 신앙의 자유, 그리고 성 평등,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을 대우하는 것, 친일파의 척결, 민주주의의 원칙 수립 등 나라의 발전을 위해 얻어내고자 했던 것도 완벽하게 똑같다. 하지만 그들은 각각의 나라에서 사법적 살인을 당하고 만다. 조봉암은 이승만에 의해,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 


그들이 꿈꾸었던 나라는 대단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친일파들에 대한 청산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봉건제 시절의 지주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많은 땅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있고, 민주주의의 원칙 따윈 이미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한 지 오래인 나라. 그들이 살아서 지금의 현실을 마주 대하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조선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고, 북조선노동당의 설립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던 2인자 김일성의 치밀한 정치에 의해 조선노동당의 2인자로 내려 앉고, 다시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사형 당하는 과정을 보면서 정치의 비정함, 김일성의 권력욕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지만, 박헌영이 조봉암을 변절자로 내몰고 그와 말한마디 섞지 않으며, 조봉암에 대한 왜곡된 보고를 소련에 했던 걸 생각하면 권력투쟁의 본질은 결국 나 아니면 안 되고, 상대를 누르지 않으면 결국엔 내가 무너지게 되는 약육강식의 정글논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박헌영이 남과 북 모두에서 실패자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건 어찌 보면 역사의 법칙일 게다. 저자는, 이토록 훌륭한 인물이 남과 북 모두에 의해 배척받는 현실이 옳지 않다고 느꼈고, 남에서는 공사주의자이기 때문에, 반대로 북에서는 미제의 간첩이기 때문에 금기시 되는 이름이었던 박헌영을 이제는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독립을 위해 애썼던 과정을 고려할 때, 게다가 그와 함께 했던 주세죽, 김단야 등이 이미 독립유공자로서 복권이 되는 상황이니만큼 박헌영 또한 제대로 평가되어야 함은 맞다. 하지만,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하기에는 박헌영보다 조금 덜 뛰어나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못한 채 묻혀야했던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빨치산들이 너무나 많다. 이 지점에서 원경스님의 지적은 지극히 옳다. "저는 박헌영 선생은 복권하더라도 가장 마지막에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동행자들에 대해 진실이 밝혀지고 또 그분들 한 분 한 분을 복권시켜 주는 것이, 그 자손들한테도 바람직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너무나 명확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조봉암과 박헌영이 여전히 독립유공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진보진영 내부에서마저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란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좀 놀랍다.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지금은 뉴라이트에서 활동하는 김영환에 의해서 그런 인식이 퍼졌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서 저자의 주장에 백프로 동의한다. "1980년대 주체사상을 학생운동에 앞장서서 전파한 김영환이 박헌영을 미제의 간첩으로 규정한 게 섣부른 판단이듯이, 그가 비밀리에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만난 뒤 조직한 이른바 뉴라이트의 반북운동 또한 섣부르다. 박헌영을 간첩으로 몰아세울 만큼 김일성주의에 투철한 김영환과 김일성주의 타도를 외치며 반북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영환은 정반대의 모습이지만 천박한 역사인식이라는 점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짚을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박헌영 트라우마인 것이 절묘하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을 의미한다. 어떤 충격을 겪었을 때 그 충격으로 인한 후유증이 지속적으로, 영구적으로 정신적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부당한 일을 행해놓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거나 덮기 위해 또다른 불의과 압박이 횡행하게 되고, 그것이 사회 전반에 걸쳐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에서 박헌영이라는 존재를 너무나 적절하게 표현해준 말이라고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마지막 말은, 우리 사회가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인물 박헌영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비롯한 이 트라우마는 병명도 모른 채 1953년에서 2013년까지 옹근 60년 동안 남과 북에 만연했다. 이 책은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는 첫 걸음이다. 모든 트라우마의 치료가 그렇듯이 박헌영 트라우마의 치유책 또한 박헌영의 진실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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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단계에 있어서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조선 민족의 완전독립, 토지개혁, 언론·집회·결사·신앙의 자유, 남녀동등의 선거, 피선거권의 확보, 8시간 노동제 실시, 국민개로에 의한 민족생활의 안정, 특히 근로대중 생활의 급진적 향상 등등의 기본적 문제를 해결한 구체적 내용을 가진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습니다." -  방송연설문 중


"오늘 조선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단계에 있다. 이 혁명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완전한 민족적 독립의 달성과 농업혁명의 완수이다. 즉 일본 제국주의 완전한 추방과 토지문제를 해결하는 새 정권 수립이다. 봉건과 자본주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혁명적으로 토지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대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분배하여야 한다. 또한 출판, 언론, 비판, 집회 및 시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도 중요하다. 공산당 및 기나 혁명적(합법적인) 단체들을 합법화하고, 정부 정책에 공산당이 참여권을 획득해야 한다. 일일 8시간 노동의 실현과 인민대중의 생활의 조속한 개조를 위해서도 투쟁해야 한다. 일본 식민주의자들에게서 토지, 산림, 지하자원, 공장 및 제조소, 운수, 우편, 은행을 몰수하고 그들을 국유화하여 국가 관리에 넘겨야 한다. 국가 재원으로 의무 교육을 실현하여야 한다. 정치와 경제부문에서 여성들의 지도적 역할을 강화할 것이다. 소득의 크기에 따른 세제를 실시하며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 - 8월 테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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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신탁/반탁운동에 대해서 명확히 알게 되었다. 국사 시간에는 소련이 반탁, 미국이 찬탁을 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아무 이유없이 소련의 지시에 의해 반탁으로 돌아섰다고 배웠던 것 같다. 그 뒤 대학에 와서 다시 역사 공부를 하면서 어렴풋이 그게 아니라는 걸 배우긴 했는데, 다시 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 이참에 확실하게 기억해둬야겠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무장관 회의. 당시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주둔하고 있던 한국 문제도 논의했다. 신탁통치를 기본으로 하는 미국의 제안과 민주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기본으로 하는 소련의 수정안이 토론되었다. 결국 12월 28일 영국의 동의로 협정이 체결되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표되었다.

1.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 하에 발전시키고, 일본 통치의 잔재를 빨리 청할 조건들을 조성할 목적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2. 연합국이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협력할 방안의 작성은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미소공동위원회가 수행한다.

3.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4대 강국에 의한 신탁통치의 협정은 한국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4개국이 심의한 후 제출한다.

3개국의 합의는 당시 38선으로 나누어진 한반도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할 때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점에서 분단을 해소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합의에 민주주의 임시정부 대목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신탁문제만 부각해 삼상회의를 '반탁'의 명분으로 반대한 세력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파탄시키고 결국 남과 북 양쪽에 국가가 수립된다. 

요컨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핵심 내용은 '찬탁, 반탁'이 아니라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의 문제였고 최장 5년 뒤 완전 독립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10년 '후견'을 받아들였고 오스트리아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10년이 지나 중립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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