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은이) | 이은선 (옮긴이) | 문학동네 | 2011-08-17 | 원제 Sarah's Key (2007년)


책을 읽은 지 한달이 지나가는 지금도, 여전히 이 책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하다. 우연치 않게 '누구나 홀로 죽는다' 이후 집어든 책이 또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이라니... 아마,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저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알고 있던 그 사건을 좀 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나치에 외롭게 저항하다 처형된 부부의 이야기를 읽고 우울하던 차에, 왠지 제목이 말랑말랑한 듯 느껴져서 골랐던 이 책이 오히려 나를 더 바닥으로 바닥으로 침잠하게 만들 줄 누가 알았을까. 
배경은 1942년 7월 16일 벨디브 사건. 프랑스의 유대인들이 일제 검거를 당해 벨디브 스테디움으로 끌려갔던 사건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이 사건이 더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건, 독일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프랑스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 프랑스계 유대인을 프랑스 경찰이 나치에 협조하기 위해 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자발적으로 색출해서 아우슈비츠로 보냈다는 점에서, 또한 나치가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학살이 '인종청소'라는 것을 인지한 프랑스 경찰이 많은 수의 아이들을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이것은 독일에서 자행된 홀로코스트보다도 더 비극적일 수밖에 없고, 프랑스로서는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더운 여름날, 어린 네살짜리 동생만 남겨두고 사라는 부모님과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끌려가는 순간에도 그것이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길임을 알지 못한 사라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따라오지 않으려는 동생을 몰래 벽장에 가둬둔다. 누나가 곧 와서 열어주겠다고, 잠깐만 기다리면 된다고 하면서. 늘 거기서 숨바꼭질을 했던 동생은 장난감 몇개와 함께 기꺼이 안에 들어갔고, 그렇게 사라는 부모님과 수용소로 향했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누구나 다 상상할 수 있는 일. 수용소에 가두어진 그들은 음식도 물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한 채, 제대로 된 인간대접도 받지 못한 채, 차에 실려, 열차에 실려 수용소를 전전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빠가 어디론가 끌려가고, 그 다음엔 아이와 엄마를 억지로 떼어놓은 채 엄마들만 다시 열차에 태워진 채 끌려가게 된다. 그 열차의 종착지는 바로 아우슈비츠. 천신만고 끝에 그 수용소를 탈출하게 된 사라와 동생을 구출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 그 힘든 수용소 생활 속에서도 동생이 숨어 있는 벽장의 청동 열쇠를 손에서 놓치 못한 사라의 애타는 사랑은 보는 내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한다. 더군다가, 그 동생의 나이가 바로 우리 아이들이 또래이다보니 여러가지를 상상하게 되고, 그 이쁜 모습을 떠올리다보면 사라가 느꼈을 그 안타까움이 바로 나에게 전해져와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이 들었다.
그 당시에 흔히 있었을 한 유대인 가족의 비극적인 사건이 다시 되살아나게 된 건 바로 미국계 프랑스인인 기자에 의해서였다. 우연치 않게 벨디브 사건을 취재하면서, 남편의 가족이 그 사건과 얽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그녀의 노력 또한 눈물 겹다. 한편으로는 그 기자는 그 사건과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녀의 남편 또한 전혀 상관이 없고, 다만 그녀의 시부모님과 시조부모님이 무언가 관계가 있다는 심증에서 시작된 일이기에, 그리고 그것을 더이상 캐묻지 않기를 바라는 무언의 압력이 있었기에, 그 기자는 굳이 그것을 캐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진실을 파헤치게 만든 것은 바로 역사에 대한 기억이었다.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에 내가 간접적으로라도 얽히게 되는 한,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고 그래서 '사과'해야만 한다는 어떤 무거운 책임감을 그 사람이 느꼈기 때문이다.
수많은 역사의 비극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프랑스조차도 그 벨디브 사건에 대해서는 꺼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유대인들이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며, 어떤 이들은 외면했고, 어떤 이들은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관심, 방관... 그것이 바로 그런 비극적인 사건을 만들어냈고, 그 비극적인 사건은 아직도 프랑스의 민주주의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90년대가 되어서야 좌파 대통령이었던 시라크 대통령이 그 사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도 그 사과에 대해서 대내외적으로 논란이 많았다는 사실은 자유/민주/평등이라는 자신들의 국가 이념을 자랑스러워하는 프랑스인들조차도 여전히 그 사건의 본질과 책임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 
주인공이 끝까지 원했던 것은 오로지 '내가, 그리고 우리가 잊지 않고 있다는 것. 우리가 너무 미안해 하고 있다는 것'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그 수 많은 목숨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니었을까. 우리가 잊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때의 무관심과 방조를 미안해 하는 것.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마르틴 뉘밀러 목사의 '그들이 내게 왔을 때'라는 시가 떠올랐나보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
First they came

나찌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Kommunist.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가둘 때,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Sozialdemokraten einsperr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Sozialdemokrat.


그들이 노조에게 왔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조가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Gewerkschafter holten,
habe ich nicht protestiert.
ich war ja kein Gewerkschafter.


그들이 유태인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Jud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Jude.


그들이 내게 왔을 때,
아무도 항의해 줄 이가 남아있지 않았다.
Als sie mich holten,
gab es keinen mehr, der protestieren konnte


[본문 중에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뭐하러 기억하겠어? 이 나라의 가장 어두운 과거인걸. (p.119)

일제 검거 때 붙잡혀간 유대인인 줄 이미 알고 계셨다고. 그런데 모르는 척했다고. 그 끔찍했던 1942년에 수많은 파리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냥 모르는 척했다고. 일제검거 때 그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실려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려가는데 모르는 척했다고. 아버지는 심지어 집이 왜 비어 있느냐고, 그 집 식구들이 쓰던 세간은 어떻게 됐느냐고 묻지도 않았다고 하셨지. 다른 사람들처럼 더 넓고 좋은 집으로 옮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거다. 모르는 척하면서. (p.255)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모르고 지내서 미안하다고요. 마흔다섯이나 먹을 때까지 모르고 지내서 미안하다고요." (p.296)

"언니는 한심한 짓을 저지른 거에요. 과거를, 특히 전쟁 중에 벌어졌던 일을 끄집어 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그 때 일을 다시 떠올리고 싶이하는 사람은, 그 때 일을 생각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요." (p.404)

기억할지어다. 절대 잊지 말지어다.

Zakhor. Al Tichk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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