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팔라다 (지은이) | 이수연 (옮긴이) | 씨네21북스 | 2013-01-18 | 원제 Jeder Stirbt Fur Sich Allein (1947년)


나치 치하의 독일. 그저 우리는 교과서에서만 몇줄로 배웠을 뿐이고, 간혹 그 시기를 안네의 일기나 홀로코스트 같은 책이나 영화로 그냥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안네의 일기나 홀로코스트 역시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잔혹한 범죄를 대변해줄 뿐, 그 당시를 살아갔던 수많은 독일인들의 삶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독일인'이라는 커다란 집합체로 인식하여 히틀러 정권과 다르지 않은 가해자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여전히 민족감정이란 것이 남아 있어서 독일의 침공을 받았던 주변국들이 스포츠 경기 때 독일에게 보이는 모습이, 우리가 일본에게 보이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닐까. 

이 책은 소설이지만, 실화에 기반을 둔 소설이다. 물론 그 '사실'이라는 것이 공소장에 나온 몇줄의 사건 기록이라 결국에는 작가의 상상력으로부터 만들어진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주인공은 실존 인물이고, 공소장이 나치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면 그 뒤에 숨어 있을 수많은 이야기들은 작가의 상상력보다 더 드라마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쟁에 의해 자식을 잃게 된 두 부부가, 나치를 향한 자기들만의 외롭고도 위험한 투쟁을 시작한다. 그것을 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며 비웃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방에 감시의 눈길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그 정도조차도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는 건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멀지 않은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술 먹고 술 집에서 정권을 욕했다는 이유로, 택시 기사에게 시국의 암담함을 토로했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야만 했던 사람들도 있지 않았는가. 

그 투쟁을 시작하게 된 애초의 동기는 아들의 죽음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알게된 부인이 남편에게 외쳤다. '당신의 총통이 내 아들을 죽였다' 라고. 이 말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 놓았다. 분명히 그들은 총통을 직접 뽑았다. 그들의 손을 뽑은 총통이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리고 자기를 뽑아준 국민들을 감시했고, 그들을 당원이냐 아니냐에 따라 차별하기 시작했으며, 이웃 간에도 서로를 의심하도록, 그리고 서로 무관심하도록 강요했다. 그들은 총통이 그런 방식으로 국가를 지배할 줄 모르고 뽑았지만, 결국 총통은 독재를 통해 수많은 죽음을 불러오고 있었다. 그들은 부자가 될 줄 알았고, 유럽의 강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희망을 가지고 총통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는 공포에 질려서 충성을 다하는 척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총통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지지하였으나 그들의 잘못된 선택을 뒤늦게라도 깨달은 사람들 중에 총통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후일에 발견된 공소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직화되지 않은 투쟁으로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의 투쟁은 과연 헛된 것이었을까? 그 부부가 뿌린 200통이 넘는 엽서는 대다수가 게슈타포에 신고가 되었고, 오직 스무통 정도만 회수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스무통이 나치 독일을 멸망시키는 씨앗이 되었을까? 절대 그럴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 스무통도 안 되는 엽서마저 겁먹은 누군가에 의해 불에 태워지거나 화장실 변기에 쓸려갔거나 그랬을 테니까. 결국 수년에 걸친 그 사람의 투쟁은 아무런 결실 없이 끝나버리게 된 것이다. 그의 투쟁은 과연 무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감옥에서 만난 박사의 입을 빌어서 이렇게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자신에게요.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의로운 인간이었다고 느끼게 될 거니까요. 크방엘 씨는 최소한 악에 저항했습니다. 같이 약해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야만적인 폭력에 맞서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우리가 승자가 될 겁니다."

"우리는 각자 행동했고, 따로 잡혀왔고, 홀로 죽을 겁니다. 하지만 헛된 죽음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괜히, 헛되이 일어나는 일은 없어요."


하지만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런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가, 더이상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불의와 맞닥뜨렸을 때, 자신들의 무지가 불의가 횡행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라면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되는 걸까. 그래도 살아서 그들의 멸망을 지켜보는 것이 더 확실한 저항이 되지 않을까. 그들의 본 낱낱의 사실들을 후세에 알리고 그렇게 해서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무도 읽지 않는 엽서를 만들고 그래서 공소장 몇줄로 기록에 남는 것보다 더 가치 있지 않을까. 그들의 투쟁의 결실이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저자 또한 가상의 경감을 만들어 그나마 그의 투쟁이 완전히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더더욱, 정말 겨우 한 인간의 참회가 그 투쟁이 불러온 유일한 결실이란 말인가...

나는 그 투쟁이 어떤 결실을 맺었고, 어떤 파급효과를 불러왔는 지, 그래서 그들의 투쟁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가치 판단도 내릴 수 없다. 다만, 그들은 분명히 저항했으며, 그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선택을 했을 뿐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 남들이 뭐라든 나는 괴물이 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하나, 최근 두번의 커다란 선거를 오버랩 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히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원했고,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보다는, 조금 더 잘 살게 되기를 바랬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 지는 분명히 역사가 증명해줄 것이다. 당신의 손으로 뽑은 총통이 당신의 아들을 죽인 사회, 그게 바로 나치 독일이었다. 우리라고 그러지 않을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게다가 요즘 같이 공권력이 하찮은 게시판 댓글에까지 지극한 관심을 보이고, 교수나 친구가 빨갱이이인 것 같다고 신고하는 레드컴플렉스가 여전히 만연한 이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과연 우리의 사회는 나치의 독일처럼 되지 않을 꺼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어서 나는 가끔 두렵다.


[본문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는 거예요. 설사 그들이 온 세상을 다 무릎 꿇게 만든다 해도 우리는 나치가 되지 말아야죠!"

"총통이 정말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라면 이런 전쟁은 일으키지 말았어야 했다. 수백만 명을 매일 사지로 몰아넣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위대한 사람일 리가 없다. 그녀는 자신만은 자존심을 지킬 거라고 결심했다. 그러면 바른 처신으로 자존심은 지켰다는 한 가지 성과는 인생에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저에게는 복종해야 할 주인이 있습니다. 그 주인은 저와 부인과 이 세상, 그리고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세상까지도 지배하는 분입니다. 그 주인은 바로 정의입니다.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의를 믿습니다. 그리고 정의만을 제 행동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은 폭력으로 우리를 그들과 같은 생각으로 전향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의 지배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비, 사랑, 정의를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행동해야 했고, 모두 따로따로 잡혀 들어왔고, 모두 혼자 죽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혼자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헛되이 죽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크방엘씨! 그러면 당신은 정의를 위해 죽는 것보다 불의를 위해 살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에게나 나에게나 선태의 여지가 없어요. 우리는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이 길을 걸어야 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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