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 (지은이) | 휴(休) | 2013-03-26


나에게는 그리스와 산토리니는 거의 동의어나 다름 없다. TV 속에서 온통 흰색과 푸른빛으로만 이루어진 햇살 가득한 그 마을을 보는 순간, 언젠가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나의 버킷 리스트에 추가되면서, 산토리니는 그리스, 그리스는 산토리니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감히 주장해 본다. 이 책의 표지가 폐허가 된 신전이나 올림푸스산이나 절벽의 수도원이 아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흰 계단인 이유도 산토리니가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처음엔 그냥 여행기려니 했던 책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종교 전문기자로 활동을 하며 불교와 기독교를 넘나드는 공부와 여행을 통해 다져진 저자의 내공은,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서 제목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곳곳의 유적들을 직접 발로 확인하며, 그에 얽힌 그리스 신화와 역사적 사실들을 끄집어 내고, 그것을 다시 삶의 자세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들로 연결 짓는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수도원들을 돌아보며, 옛 수도사들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엄격하게 다스렸는 지,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런 고난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였는 지를 생각해 본다. 3세기 후반 은둔 수도승이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그들은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공간에 수도원을 짓고 하나둘씩 모여 살면서 오로지 신과의 교감만을 추구하며 끊임 없이 자기를 버리고 또 버린다.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게 했던 것일까.

"수도승을 뜻하는 '모나코스(monarchos)'는 그리스어 어근 '하나(monos)'에서 왔다. 수도는 욕망에 따라 헤매는 방랑을 쉬고 본래 신성과 하나가 되어 현존하기 위한 여정이다. (p.63)"

사람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신성을 찾는 끊임없는 행군이 바로 수도원의 생활이었고, 수도사들은 그렇게 자신을 정복함으로써 진정한 해방을 찾고, 이 땅에서 가장 고결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하늘 위의 수도원 메테오라에서 발견한 수도자들의 유골 더미를 통해 과연 죽음과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돌아본다. 수도사들의 유골이 무덤이 아닌 오가는 길목에 쌓인 채 그대로 드러나 있는 낯선 상황은 수도사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에 대한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들이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죽음 그 자체인가, 아니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인가. 산토리니가 에게해의 진주가 될 수 있었던 것 또한, 자연재해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폐허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아닐 뿐, 작은 섬 하나가 완전히 죽고 나서야 산토리니는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이 된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면, 그에 대한 거부는 우리를 괴롭힐 뿐이니 받아들여야 함을 그리스 여행은 지속적으로 깨닫게 해주고 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여행하며 국가와 리더는 어떠해야 하는 지를 생각하고, 소크라테스와 히포크라테스, 피타고라스의 고향을 여행하며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관심 있게 본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인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작성했다고 알려져 있는 파트모스 여행이었다. 과연 사도 요한이 그 섬에서 홀로 지내며 본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세상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은 요한이 무엇을 알리길 원하셨던 걸까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한 지금의 기독교는 초기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순수한 신앙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있는가도...


그리스 여행의 마지막은 터키 트로이에서 끝이 난다. 커다란 목마가 안으로 들어가고 결국엔 트로이를 멸망시키게 되는 과정은 '불안'이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는 지를 보여준다. 전쟁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랬고, 그것이 신의 뜻임을 믿고 싶어했다. 그래서 신이 보낸 선물이라는 헛된 주장에 쉽게 넘어가게 되었고, 결국은 어리석은 믿음이 스스로를 멸망시키게 되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 떠오른다.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영향력 안에 잡아두고자 하는 것은 자본 혹은 권력, 종교가 늘 행해오던 전략이다. 이 물건을 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동질감을 가지지 못할 것 같고, 지금 이것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 같고, 지금 돈을 모으지 못하면 불행한 미래가 당장 현실로 닥칠 것 같은 불안. 이 불안 마케팅이 우리로 하여금 과욕하게 하고, 나만 바라보게 하고, 끝없는 탐욕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답답한 현실. 저자가 묻는 마지막 질문에 우리 모두는 답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선택 속에 숨은 트로이의 목마는 무엇인가?'


[본문 중에서...]

세상이 지겹도록 바뀌지 않는다는 불만의 소리가 높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자신이었다. 그리스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바꾼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우리는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를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인간은 생각을 바꿈으로써 죽음을 부활로, 절망을 희망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뒤바꿀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p.13)


이들은 신체나 계층의 장애가 비록 불편하기는 했지만, 결핍과 시련을 탁월함의 양분으로 삼았다. 인생이 빚어내는 최고의 요술은 이런 약자들이 상처를 아우라로 바꾸는 것이다. (p.14)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욕구를 모르고 이를 외면하고선 기쁨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과 쾌락만 좇다간 건강은 물론 영혼까지 잃어버릴 수 있다. 나는 과연 내가 무엇에 목말라하는 지 정확히 알며, 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가.

플라톤은 말한다. 

"남이 아닌 자신을 정복한 자가 고결한 최상의 승리자다."

성인의 옛 수행처는 벼랑 위 조그만 동굴이다. 40년간 짐을 버리고 버려 마침내 마음을 내려놓은 곳이다. 세상과 운명에 밀려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 전에, 스스로 집착의 무거운 짐을 비워버리고 날아갈 자, 날개는 그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이다. (p.37)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신이 되게 하기 위함이며, 하늘에 올라가 하느님과 함께하게 하기 위함이다." 정교회 초기 교부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성인의 말이다. (p.50)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차별을 거부했다. "그리스어를 못하는 사람이 야만인이 아니라 열린 마음 없이 타인들을 선입견으로 대하는 사람이 야만인이다." (p.73)


현대사회에서 그런 신적인 힘을 지니고 폭력 세상을 이끄는 이들은 누구일까. 아무래도 네오콘이 첫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유대인과 기독교 근본주의 결합쯤으로 볼 수 있는 네오콘은 '힘이 곧 정의'라고 신봉하는 이들이다. 미국에서 레이건 대통령을 거쳐 조지 부시 대통령 때 세력을 얻은 이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 국제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절대선'을 지키겠다고 나서고 있다. 타인이나 타국을 '악'으로 규정해 서슴지 않고 죽이면서 말이다. (p.99)


삶이란 그런 것. 오고 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슬픔과 고독뿐이다. 수도사들이 바위 끝 삶을 산 것은 슬픔과 고독 속에 자기를 가두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해방되기 위함이다. 그러니 나도 좀 더 대범하게 녀석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p.122)


태어난 자는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예외가 없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한 번만 통과하면 될 공포의 문을 수백 번, 수천 번 통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를 정말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병과 죽음 그 자체일까, 아니면 이에 대한 거부에서 오는 걱정과 불안일까.  (p.131)


또한 미신적인 종교일수록 '성직자는 전생에 쌓은 공덕이 많아 대우 받는 게 마땅하고, 천민들은 죄업을 많이 지어 고생을 겪는 것'이라는 운명론을 전파했다. 그러니 백성은 성직자와 왕족, 귀족들을 잘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인과론은 후생을 위해 자신의 삶을 책임 있게 살게 하려는 애초의 의도와 달리 삶의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이나 장애인들을 더한 고통에 빠뜨리는 반인권적 업보론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전후생론은, 돈과 권력과 명예가 타인에게 봉사하라고 주어진 것이라는 도덕적 의무론으로 보완되어야 하지 않을까.  (p.152)


현존하는 인류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빠른 100미터 기록이 9초대다. 치타는 3초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능력이 탁월하다는 데 있지 않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 탁월함을 이기적인 욕망의 추구에만 쓰는 대신 공익을 위해 쓸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p.198)


원만한 관계를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자기 밖에 설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스어 '엑스타시스'는 '밖에 서 있다'는 뜻이다. 자신 속에서 빠져나올 때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다. 그 축복은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자기'란 히스테리(자궁)와 동굴 속에서 나올 때 상태와 공명과 공감이 가능해진다. 미숙과 성숙의 차이는 주관 속에만 빠져 있느냐, '내 생각'에서 나와 객관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느냐의 여부다. (p.244)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들도 싫어하고, 내가 원하는 건 남들도 원한다. 싫어하는 것을 피하고,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만큼 좋은 관계를 지속시키는 비결은 없다.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상대방에게 협조와 사랑을 기대하고 있을 때, 상대방도 당신에게 관심과 배려를 기대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p.246)


그리스 철학은 국가를 위해 개인을 총동원하는 국가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성공이 별개일 수는 없다. 내적인 수행이 우선이냐, 외적인 제도 개혁이 먼저냐는 논의는 불필요하다. 둘 다 중요하다. 아테네는 둘을 함께 성취했다. 그들의 창조력은 놀라웠다. 아이, 이방인, 여성, 해방노예, 노예들을 제외하고 불과 3만 명의 시민이 이룬 정치, 철학, 문학, 예술의 금자탑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광휘로도 덮을 수 없을 만큼 찬란했다. (p.249)


테세우스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아테네 왕국의 후계자가 된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스스로 여는 자만이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 테세우스는 한번 들어가면 누구도 빠져 나오지 못한 채 괴물의 먹이가 되는 미궁 행을 자원하고, 14명의 소년소녀들 속에 섞여 크레타로 떠난다. 그가 헤라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최고의 영웅으로 불리는 것은 진정한 리더인 때문이다. 리더십은 자기만 사는 게 아니고, '더불어 살아가는 기술'이다.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힌 독재자와 달리 위인은 열정과 자기 희생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p.255)


멀리서 검은 돛을 본 아이게네스 왕은 아들이 괴물의 밥이 된 줄 알고 절망한 나머지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만다. 그래서 이 마다가 그의 이름을 따 '에게 해'가 된 것이다. 성급한 왕의 선택이 안타깝다. 지금 내 삶이 불행하다고, 자유롭지 않다고, 장애가 생겼다고 서둘러 세상을 버릴 일이 아니다. 고통의 시간은 클라이맥스를 고조시키기 위한 연극의 서막인지도 모를 일이니, 섣불리 인생을 비극으로 결말 지어서는 안 된다. (p.256)


행복은 무엇이 된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정인 지금 여기에서 좋은 것인데, 사람들은 자기가 꿈꾸는 삶을 사는 이들을 동경만 하고 그렇게 되기를 갈망만 한다. 하지만 자기가 아닌 누군가가 되려는 갈망이 과연 행복을 가져다줄까. 크레타 섬 역사박물관 직원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조르바를 좋아한다는 그에게 조르바의 삶을 동경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한다. 

"조르바를 좋아하긴 하지만, 조르바는 조르바, 나는 나."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면 지금처럼은 살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남보란 듯이, 내 뜻대로 살아보리라고.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 내일이 오면 그때도 타인의 삶이나 바라보며 내일이나 기약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카잔차키스가 붓다만큼 따랐던 니체는 말했다.

"다시 태어나 살고 싶을 그런 삶을 살아라."

내일 말고, 지금 당장 여기서! (p.275)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적인 가피를 비는 것일까. 외지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마치 기도하듯이 신전 주위를 돌고 있다. 자세히 보니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들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노쇠해 가고 병들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반겨지지 않는 사실이다. 허나 이를 거부하면 할수록 더욱 고통스러워지는 것은 '필멸'이 인간의 숙명인 까닭이다. (p.307)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주류 철학자들과 예수의 가르침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모든 인간이 아니라 '그들만'의 해방을 추구했다. 거기에 노예와 장애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방인, 여성 등도 낄 자리가 거의 없었다. 오직 시민들만이 자유와 해당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옹호됐다. 예수는 전혀 달랐다. 예수는 노예와 장애인, 여성처럼 소외되고 버림 받은 자들을 해방과 구원의 주인공으로 세웠다. 그것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성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배타성과 폭력성은 그 위대성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p.332)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로 여겨지는 '메타노이아(Metanoia, 회심)'은 그리스어로 '마음을 바꾼다'는 뜻이다. 의식의 변화를 말한다. 내면에 갇힌 시선을 외부로 돌리는 것, 자기만 챙기던 사람이 주위와 세상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 자기 조직, 자기 국가, 자기와 자기 집단밖에 모르던 사람이 그 밖에도 똑같은 인간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식물도 모두 존귀한 생명이며, 그들과 우리의 삶이 하나라는 진리를 개닫는 것이다. (p.333)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을 낭비하지 마라.

지금 가진 것도 전에는

원하던 것이었음을 잊지 마라. (에피쿠로스, p.357)


두려움에 떨며 강국 리디아의 식민지가 되어 노예의 길을 선택하려는 사모스인 앞에서 노예 이솝은 이렇게 말했다.

"운명은 이 생에서 인간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해주었다. 하나는 자유의 길로, 시작은 고되고 견디기 힘들지만 끝은 아주 평평하고 견디기 쉽다. 또 다른 길은 노예의 길로, 처음은 들판처럼 가볍고 평평하지만 끝은 매우 혹독하고 크나큰 고통 없이는 걸을 수 없다." (p.359)


트로이전의 승리자는 그리스 연합군 총대장 아가멤논 왕이다. 그 또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는 참전에 앞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달래기 위해 자기 딸을 바다에 던졌다. 왕비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딸을 재물로 바친 남편에게 앙심을 품고 칼을 갈고 있다가 트로이 전쟁에서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정부인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살해한다. 아가멤논이 딸을 죽인 그대로 도끼로 세 번을 내리쳐서.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의 복수에 나선 아들의 손에 죽는다. 대체 전쟁의 승리자는 어디에 있는가. (p.370)


기자라는 직업인으로 살면서 내가 새기고 있는 하나의 관점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하는가. 그들이 모두 칭찬하는가. 그러면 의심해 보자. 과연 정말 그런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모두가 비난하는가. 그러면 의심해 보자. 과연 정말 그런가.' 대중의 결정이 내 정당성을 결코 보장해주지 않는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것도 당시의 다수 대중이었다. 유대인 600만명의 학살도 대중의 동조 없이 히틀러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수의 도그마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갈 때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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