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런던 (지은이) | 이한중 (옮긴이) | 한겨레출판 | 2012-10-08


개인적으로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그 어떤 가상의 이야기들도 슬픔으로 끝나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한껏 양보해서 열린 결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래도 나는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내가 예술 작품으로 얻고 싶은 건 주로 행복한 느낌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리얼리즘은 그닥 내가 선호하는 장르가 아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부조리에 가득 차서 인 지는 모르겠지만, 리얼리즘의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내가 바라는 결말로 끝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내가 도대체 내가 이 책을 왜 샀는 지 모르겠다. 이것은 인터넷으로 책을 살 때 발생하는 부작용 중의 하나이다. 책을 직접 들춰보질 않기 때문에 책에 대한 소개만을 보고 골라잡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보니, 추천하는 사람과 나의 취향이 완전히 다를 경우엔 꼭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책을 소개하는 사람 또한 스포일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내용을 어중간하게 소개해 놓기 마련이다보니, 마지막 결말들이 나를 배신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밖에.

이 사람이 강철군화의 저자라는 것에 나도 모르게 끌렸나보다. 그렇다고 내가 그 책을 감명 깊게 읽은 것도 아니면서, 그냥 왠지 읽고 싶어졌달까. 뭔가 현실을 미화시키거나, 현실로부터 도피시키는 말랑말랑한 이야기 말고 다른 것이 목말랐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제목인 '불을 지피다'에서 뭔가 앞서 나가는 자의 이야기, 혹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현실을 밝혀주는 이야기, 그래서 희망을 지피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나 혼자 커다란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잭 런던의 단편집이다. 잭 런던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1876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온갖 육체노동을 어릴 때부터 경험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버클리에도 입학하지만 결국 졸업하진 못한다. 20대의 시기에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고, 알래스카의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에도 합류하는데, 이 때의 경험이 많은 소설의 소재가 된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는 종군기자로 일본과 만주 및 우리 나라에도 다녀갔다. 이때 펴낸 책이 <잭 런던의 조선 사람 엿보기>이다. 이후 집필에 전념하다가 마흔살의 나이로 요절을 했다. 

제일 첫번째로 등장하는 '스테이크 한장'의 이야기에서부터, 잭 런던이 경험한 밑바닥의 인생들, 곤궁한 생활, 암울한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다. 아동 노동의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는 '배교자'에는 자신의 유년기가 그대로 묻어난다. 읽다보면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그러다가 이주 노동자의 절망적인 삶을 그린 '시나고', 난파당한 배에서 벌어지는 인간성 말살의 현장 '프란시스 스페이트 호', 재물 앞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 '그냥 고기', 극한의 상황에서 과연 어떤 선택이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전쟁'... 아, 계속 가슴 답답하고 우울하고 속쓰린 이야기들만 나열된다. 책의 제목인 '불을 지피다'도 내가 생각했던 불이 아니라, 영하 50도를 넘나드는 혹한에 목적지를 향한 여정 속에서 추위를 달래기 위해 성냥으로 불을 지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경험이 너무나 혹독하여 생생했던 걸까.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묘사라든가, 척박한 환경에 대한 묘사, 그리고 절망 혹은 배신의 바닥에 도달한 사람들의 심리묘사가 굉장히 사실적이고 섬세하다. 마치 죽음의 순간까지도 경험한 사람같은 느낌이랄까. 

정말 좋아하는 류의 소설은 아니지만, 정말 오랜만에 접해본 리얼리즘으로 무장한 소설이었다. 작가가 살았던 그 시대의 사회상이 그대로 묻어나 읽으면서 내내 마음 졸이고, 가슴 아파해야 했다. 부디 아직 죽지 않았던 그 주인공들은, 그 이후로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 행복하게 생을 마무리 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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