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승효상의 건축여행
승효상 (지은이) | 컬처그라퍼 | 2012-10-23
지리란 공간과 인간의 만남이다. 땅이라는 평면 위에 인간이 살면서 서로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저 지형이 있을 뿐, 지리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덧칠하는 삶의 흔적은 공간을 의미 있게 만들고, 그 작용과 역사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학문의 경지로 승화 시킨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승효상에 의하면 건축 또한 땅에 새기는 삶의 기록이다. 건축가가 건물을 하나 지어 놓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건축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의해 완성된다. 그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이 다할 때, 그래서 그 공간이 폐허로 변할 때 그 때야 비로서 건축은 완성된다.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을 의미 있게 해주는 것은 인간들의 삶이란 점에서, 이 공간 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삶들은 다 저마다의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역사가 될 것이므로...
'빈자의 미학'으로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을 처음 듣게 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 설계 때문이었다. 내가 딱히 건축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이름이었지만, 유언이었던 아주 작은 비석을 어떻게 현실로 이끌어낼 지에 대한 궁금증 덕에 건축가의 이름 석자를 처음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저자가 여행 속에서 만난 많은 건축들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빈자의 미학'을 다시금 확인하고,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조근조근 읊조리듯 얘기하는 이 책은 참으로 정겹다. 이 사람의 건축 세계가 지향하고 있는 바 때문일까. 누구나 다 알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는 건축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딘가 구석에 숨어 있을 법한, 그리고 그 어떤 여행 상품에도 포함되지 않을 법한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기에 더욱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나도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이기에 그 대상들이 나에게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한국의 사찰이나, 정원 등 우리의 건축은 자연과의 조화를 우선시 한다는 말을 학창 시절 언젠가 한번쯤을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교과서에서만 한번 읽고 지나간 문장 하나가 지속적으로 나의 사유에 영향을 줄 수는 결코 없는 일.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배운다. 소쇄원의 정원과, 부석사에서 내려다본 산맥들, 병산서원과 선암사. 2년 전쯤 선암사에 갔을 때, 그 때 이런 사실들을 알고 갔다면 고즈넉한 산사에 담겨진 의미를 더욱 음미할 수 있었을텐데 무척이나 아쉽다.
독일의 하르부르크에 있는 기념탑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1미터 사방에 12미터 높이의 아주 단순한 입방체로 이루어진 탑, 사람들은 이 탑에 자신들이 겪은 파시즘의 상처를 기록하였는데, 놀랍게도 이 탑은 매년 2미터씩 땅 밑으로 가라 앉게 설계되어 결국 탑 제일 위까지 사람들이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였을 때 완전히 땅 밑으로 가라 앉았다. 분명히 탑이면서도 탑처럼 솟아 있지 않은 탑. 파시스트에 대한 저항을 기념하는 탑은 점점 가라 앉아 이제 흔적만 남았다. 남은 것은 이제 살아 있는 자들의 몫...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웅장하고 화려해야만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의 건물의 생겨나고 소멸되는 것, 도시가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 없던 길이 생기고, 다시 그 길이 없어지는 것, 결국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다. 그 어떤 건축물도, 그 어떤 인위적인 행위도 그것을 함부로 바꾸고 마음대로 움직여 나갈 순 없다.
"여행이란 공간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얻는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살아간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이지만, 그 흔적들 위에서 흘러간 시간을 되짚어 사람들의 삶을 유추하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진정 여행이 가진 힘일 것이다. 이젠 공간에 방점을 찍는 여행이 아닌, 그 안에서의 '시간'을 찾는 여행을 해봐야겠다.
(이하 본문 중에서 발췌...)
타자화된 이방인은 싫든 좋든 현실에서 비켜서서 그 현실을 끊임없는 비교와 평가를 통해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사유의 세계로 모는 자이다. 자기 스스로를 제도권 밖으로 추방하여 경계속의 현실을 목도하고 때론 비판하며 성찰하는 자, 이를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이라고 했다.
건축은 땅에 새기는 삶의 기록이다.
지도 속에 나타난 마을 구조를 머리에 넣고도 그 길에 서면, 나는 그들의 삶이 만드는 일상의 예기치 못한 풍경에 새롭게 감동받는다.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이뤄지는 삶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공간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얻는 삶에 대한 성찰임을 다시 알았다.
나에게 건축과 도시는 무생물이 아니다. 건축이란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을 완공함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살게 되는 거주자의 삶으로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나로서는, 도시 역시 태어날 뿐이어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하는 생물적 존재라고 여긴다. 만약에 건축이나 도시가 완성되는 순간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붕괴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극단적이지만 그 완성의 존재체가 폐허인 것이다.
보이는 것은 침묵의 세계였으며 아마도 그게 이 절을 세운 목적이었다. 이 폐허는 쓸모없에 된 사찰이 아니었다. 여전히 우리 삶의 부질없음을 끊임없이 가르치는 '보이지 않는 절'이었던 것이다. 그게 참된 불교 아닌가......많은 파편이 지저분하게 남아 아직도 그 존재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서양의 폐허가 아니라, 건축의 숙명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맑은 수묵화처럼 존재를 비움으로 완결하는 폐허이다. 그게 바른 건축이요, 그로서 진실이었다.
대도시 서울에도 지금 남아 있는 가회동이나 인사동의 골목길은 아직도 아름다운 정취가 만만찮다. 그렇게 오래된 길만이 아니라 근래에도 그런 길을 볼 수 있는 곳이 있긴 하다. 바로 가난한 이들이 사는 달동네의 길들을 보면 우리가 길에 대한 생각을 원래 어떻게 가졌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길은 선이 아니라 공간이며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이고, 눈으로 보는 곳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곳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길들은 여전히 개발이나는 전가의 보도 앞에 맥없이 허물어지고 제거되고 지워지며 직선으로 뭉개지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의 길을 갖지 못하게 된 우리의 삶은 연결되지 못해 파편적이며 가두어진 채 때로는 방황하고 때로는 부유하는 것이다.
선조들이 가진 자연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명료함을 넘어 지혜로움 그 자체였다.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아 인위적으로 과장된 제스처를 가지는 것은 금기였으며, 놀이의 대상으로 자연을 농락하는 일을 경망스러운 것이었다. 자연은 그 자체가 선이요 동반자이며 공존의 대상이어서 함께 어우러지는 우리 자신인 것이다. 무슨 말인가. 그 실증이 소쇄원에 있다.
1986년 이 도시의 중심부 번잡한 길가 한 귀퉁이에 12미터 높이의 탑이 세워졌다. 이 탑은 하르부르크시 정부가 파시즘의 아픈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로, 공모를 통해 조각가 요한 게르츠와 에스터 샬레브 게르츠의 공동작을 선정한 바 있다. 이 부부 작가가 제출한 안은 1미터 사방에 12미터 높이의 단순한 입방체였지만, 이 평범하게 보이는 탑은 놀랍게도 매년 2미터씩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도록 되어 결국에는 모두가 사라지는 안이었다......어느 날 이 탑은 완전히 사라지고, 파시스트에 대한 저항을 기념하기 위한 이 탑이 놓인 장소는 비어 있게 될 것입니다. 불의에 대항하여 일어서야 하는 것은, 결국에는 우리 스스로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모든 도시와 건축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세운 자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아무리 튼튼하게 지었다고 해도, 중력의 힘에 의해 반드시 건축과 도시는 무너지고 만다. 때로는 경제적 이유로 붕괴되기도 하고, 더러는 자연재해로 혹은 테러로 사고로 모두 무너져 결국은 땅의 표면 위에 가라앉아 사라지고 만다. 영원한 것은 우리가 같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 기억만이 진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