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그냥 책

박헌영 트라우마-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

혁이맘 2013. 5. 23. 13:27


손석춘 (지은이) | 철수와영희 | 2013-04-17


얼마 전 조봉암 평전을 읽다가 책의 주인공인 조봉암 이외에 궁금했던 몇몇의 인물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박헌영. 이 이름 석자 역시 수업시간에 얼핏 듣고 넘어간 기억과 함께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사람이란 것 말고는 딱히 아는 지식이 없었다. 조봉암 평전에는 그보다 조금 더 자세한 사항들이 나오긴 하지만, 아무래도 책의 포커스는 조봉암이다 보니 조봉암의 변절에 날선 비판을 하며 일제 말기부터 조봉암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고 나올 뿐 아니라, 조봉암 입장에서 다소 서운한 느낌도 가질 수 있도록 서술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룸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지만, 반대로 그렇다면 박헌영 입장에서는 조봉암을 어떻게 보았을 지에 대핸 궁금함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던 차에 우연치 않게 본 박헌영 트라우마. 이 책은 저자가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스님과 나눈 대화록이다. 원경스님의 기억속에 있는 내용들은 거의 그대로 가감 없이 전달해준다. 사람의 기억이야 윤색되기 나름인 데다가, 워낙 어릴 적의 기억들이고, 그 이후 고종사촌의 손에 의해 키워지며 다시 전해들은 이야기까지 더해져 기억의 신뢰도는 사람마다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으나, 어쨌든 가장 가까이서 접했던 유일한 목격자이자 증언자로서 그의 이야기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고, 독립운동을 쉬지 않고 하기 위해 자신의 똥까지 먹어야 했던 사람, 목숨 바쳐 공산당을 세웠고, 자기가 세웠던 그 공산당에 의해 처형된 사람. 아무리 봐도 조봉암과 오버랩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국내의 독립운동, 거듭되는 투옥과 도피, 지하생활,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등 계속 궤를 같이 하던 두 사람이 일제시대 말기 각자의 선택에 의해 노선을 달리 한다. 하지만 그 이후는 다시 비슷한 운명을 걷는다. 하나는 남쪽에서, 하나는 북쪽에서 자신의 신념에 맞는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을 한다. 농민과 농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것도 똑같다. 사상의 자유, 집회의 자유, 신앙의 자유, 그리고 성 평등,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을 대우하는 것, 친일파의 척결, 민주주의의 원칙 수립 등 나라의 발전을 위해 얻어내고자 했던 것도 완벽하게 똑같다. 하지만 그들은 각각의 나라에서 사법적 살인을 당하고 만다. 조봉암은 이승만에 의해,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 


그들이 꿈꾸었던 나라는 대단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친일파들에 대한 청산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봉건제 시절의 지주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많은 땅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있고, 민주주의의 원칙 따윈 이미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한 지 오래인 나라. 그들이 살아서 지금의 현실을 마주 대하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조선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고, 북조선노동당의 설립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던 2인자 김일성의 치밀한 정치에 의해 조선노동당의 2인자로 내려 앉고, 다시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사형 당하는 과정을 보면서 정치의 비정함, 김일성의 권력욕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지만, 박헌영이 조봉암을 변절자로 내몰고 그와 말한마디 섞지 않으며, 조봉암에 대한 왜곡된 보고를 소련에 했던 걸 생각하면 권력투쟁의 본질은 결국 나 아니면 안 되고, 상대를 누르지 않으면 결국엔 내가 무너지게 되는 약육강식의 정글논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박헌영이 남과 북 모두에서 실패자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건 어찌 보면 역사의 법칙일 게다. 저자는, 이토록 훌륭한 인물이 남과 북 모두에 의해 배척받는 현실이 옳지 않다고 느꼈고, 남에서는 공사주의자이기 때문에, 반대로 북에서는 미제의 간첩이기 때문에 금기시 되는 이름이었던 박헌영을 이제는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독립을 위해 애썼던 과정을 고려할 때, 게다가 그와 함께 했던 주세죽, 김단야 등이 이미 독립유공자로서 복권이 되는 상황이니만큼 박헌영 또한 제대로 평가되어야 함은 맞다. 하지만,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하기에는 박헌영보다 조금 덜 뛰어나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못한 채 묻혀야했던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빨치산들이 너무나 많다. 이 지점에서 원경스님의 지적은 지극히 옳다. "저는 박헌영 선생은 복권하더라도 가장 마지막에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동행자들에 대해 진실이 밝혀지고 또 그분들 한 분 한 분을 복권시켜 주는 것이, 그 자손들한테도 바람직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너무나 명확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조봉암과 박헌영이 여전히 독립유공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진보진영 내부에서마저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란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좀 놀랍다.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지금은 뉴라이트에서 활동하는 김영환에 의해서 그런 인식이 퍼졌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서 저자의 주장에 백프로 동의한다. "1980년대 주체사상을 학생운동에 앞장서서 전파한 김영환이 박헌영을 미제의 간첩으로 규정한 게 섣부른 판단이듯이, 그가 비밀리에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만난 뒤 조직한 이른바 뉴라이트의 반북운동 또한 섣부르다. 박헌영을 간첩으로 몰아세울 만큼 김일성주의에 투철한 김영환과 김일성주의 타도를 외치며 반북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영환은 정반대의 모습이지만 천박한 역사인식이라는 점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짚을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박헌영 트라우마인 것이 절묘하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을 의미한다. 어떤 충격을 겪었을 때 그 충격으로 인한 후유증이 지속적으로, 영구적으로 정신적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부당한 일을 행해놓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거나 덮기 위해 또다른 불의과 압박이 횡행하게 되고, 그것이 사회 전반에 걸쳐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에서 박헌영이라는 존재를 너무나 적절하게 표현해준 말이라고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마지막 말은, 우리 사회가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인물 박헌영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비롯한 이 트라우마는 병명도 모른 채 1953년에서 2013년까지 옹근 60년 동안 남과 북에 만연했다. 이 책은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는 첫 걸음이다. 모든 트라우마의 치료가 그렇듯이 박헌영 트라우마의 치유책 또한 박헌영의 진실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


"우리가 현단계에 있어서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조선 민족의 완전독립, 토지개혁, 언론·집회·결사·신앙의 자유, 남녀동등의 선거, 피선거권의 확보, 8시간 노동제 실시, 국민개로에 의한 민족생활의 안정, 특히 근로대중 생활의 급진적 향상 등등의 기본적 문제를 해결한 구체적 내용을 가진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습니다." -  방송연설문 중


"오늘 조선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단계에 있다. 이 혁명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완전한 민족적 독립의 달성과 농업혁명의 완수이다. 즉 일본 제국주의 완전한 추방과 토지문제를 해결하는 새 정권 수립이다. 봉건과 자본주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혁명적으로 토지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대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분배하여야 한다. 또한 출판, 언론, 비판, 집회 및 시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도 중요하다. 공산당 및 기나 혁명적(합법적인) 단체들을 합법화하고, 정부 정책에 공산당이 참여권을 획득해야 한다. 일일 8시간 노동의 실현과 인민대중의 생활의 조속한 개조를 위해서도 투쟁해야 한다. 일본 식민주의자들에게서 토지, 산림, 지하자원, 공장 및 제조소, 운수, 우편, 은행을 몰수하고 그들을 국유화하여 국가 관리에 넘겨야 한다. 국가 재원으로 의무 교육을 실현하여야 한다. 정치와 경제부문에서 여성들의 지도적 역할을 강화할 것이다. 소득의 크기에 따른 세제를 실시하며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 - 8월 테제 중에서


=================================


책을 읽으며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신탁/반탁운동에 대해서 명확히 알게 되었다. 국사 시간에는 소련이 반탁, 미국이 찬탁을 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아무 이유없이 소련의 지시에 의해 반탁으로 돌아섰다고 배웠던 것 같다. 그 뒤 대학에 와서 다시 역사 공부를 하면서 어렴풋이 그게 아니라는 걸 배우긴 했는데, 다시 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 이참에 확실하게 기억해둬야겠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무장관 회의. 당시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주둔하고 있던 한국 문제도 논의했다. 신탁통치를 기본으로 하는 미국의 제안과 민주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기본으로 하는 소련의 수정안이 토론되었다. 결국 12월 28일 영국의 동의로 협정이 체결되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표되었다.

1.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 하에 발전시키고, 일본 통치의 잔재를 빨리 청할 조건들을 조성할 목적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2. 연합국이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협력할 방안의 작성은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미소공동위원회가 수행한다.

3.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4대 강국에 의한 신탁통치의 협정은 한국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4개국이 심의한 후 제출한다.

3개국의 합의는 당시 38선으로 나누어진 한반도의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할 때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점에서 분단을 해소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합의에 민주주의 임시정부 대목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신탁문제만 부각해 삼상회의를 '반탁'의 명분으로 반대한 세력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파탄시키고 결국 남과 북 양쪽에 국가가 수립된다. 

요컨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핵심 내용은 '찬탁, 반탁'이 아니라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의 문제였고 최장 5년 뒤 완전 독립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10년 '후견'을 받아들였고 오스트리아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10년이 지나 중립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뤘다.